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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루쉰의 ‘고향’

기자명 이미령

모호한 가치 ‘희망’, 미래 향한 걸음 속에서 찾다

노신선집Ⅰ
루쉰
여강출판사
중국작가 루쉰(魯迅, 1881~1936)의 작품을 읽을 때면 마음으로 단단히 무장을 해야 합니다. 그의 작품은 현실을 지적하고 아주 따끔하게 비판하기 때문입니다. 그 매서운 비판의 대상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중국인민들입니다. 사실 그동안은 대체로 백성이란 아는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기 때문에 등 따습고 배부르면 그만이기에 그저 황제의 성은만을 기다리며 낮게 허리를 굽히면서 살아가는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중국 작가 루쉰의 자전적 소설
19세기 말~20세기 중국인민에
세상 속 모순·부조리 일깨워
희망 전하기 위한 신랄한 비판

20년만에 방문한 고향 경험 담아
옛 친구였던 머슴 아들 윤토
삶에 찌든 지친 모습으로 와
향로·촛대 챙겨가는 모습서
‘희망’에 대한 새로운 시각

굳이 백성을 일깨울 필요는 없으니, 이들은 어린 양인지라 왕공귀족들이 현명하게 양치기 노릇을 잘 하면 된다는 생각이 전제군주시절에는 통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데 루쉰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의 작품집 ‘외침’의 서문(自序)에는 사람들을 일깨우는 글을 써보라는 친구의 권유를 받고 이렇게 반문합니다.

“창문이 하나도 없고 무너뜨리기 어려운 무쇠로 지은 방이 있다고 하세. 만일 그 방에서 많은 사람이 잠이 들었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막혀 죽을 게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죽는다면 죽음의 슬픔을 느끼지 않을 거네. 지금 자네가 큰소리를 쳐서 잠이 깊이 들지 않은 몇몇 사람을 깨워 그 불행한 사람들에게 임종의 괴로움을 맛보인다면 오히려 더 미안하지 않은가?”

딴은,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냥 저냥 살다가 죽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에 눈을 뜨면 맨 괴로울 일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친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몇몇 사람이 일어난 이상 이 무쇠 방을 무너뜨릴 희망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않은가.”

루쉰은 친구의 이 말에 정신이 번쩍 든 모양입니다. 그는 생각합니다.

‘희망은 앞날에 속하기 때문에 희망이 없다는 내 증명으로 희망이 있다는 그를 설복시킬 수는 없었다.’

앞날의 일을 어찌 알겠습니까? 어찌 함부로 희망이란 게 있다 없다고 단언할 수 있겠으며, 그렇다면 희망을 품는 게 더 낫지 않겠느냐는 것이 루쉰의 생각입니다.

당시 중국은 엄청난 혼란의 시기였습니다. 일제의 침략으로 식민지화의 길을 걷고 있던 중이었고, 국민당과 공산당이 끝없이 견제하던 때였으니까요. 중국의 백성들은 이런 혼잡한 와중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들이라고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저 눈치 보다가 힘이 실리는 쪽에 가서 붙으면 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 일러스트=강병호 화백

루쉰은 이런 중국인민들을 향해 한껏 소리치기로 마음먹습니다. 소리쳐서 저들을 깨우는 임무를 자신이 맡은 거지요. 그리고 그 임무는 작품 활동으로 구현됩니다.

루쉰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아Q정전’입니다. 태어나서 성인이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제 손으로 붓을 쥔 적이 없는 무지한 아Q는 사람들에게 모진 수모를 당해도 현실을 제대로 판단하지 않고 제멋대로, 자기 좋은 대로 해석해버립니다. 일명 저 유명한 ‘정신승리’가 바로 그것이지요. 그리고 자기보다 약한 자들을 심술궂게 괴롭히며 억울함을 달랩니다. 처형당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는 그 어리석음.

조국의 동포들에게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똑바로 두 눈 뜨고 바라보라고 외치는 루쉰의 절규가 담긴 작품이 바로 ‘아Q정전’입니다. 딱히 어떤 특정인물을 지칭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모든 중국인들 누구나 ‘아Q’일 수도 있다는 뜻에서 주인공 이름을 그렇게 지은 것입니다. 동포들에 대한 그의 비판은 이렇게 혹독합니다.

하지만 그의 신랄한 비판의 칼날은 절망의 장막을 찢고 희망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희망을 노래하는 그의 작품은 ‘고향’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주인공(루쉰 자신이기도 합니다)은 20년 만에 고향을 방문합니다. 하지만 명절을 맞아 찾아가는 들뜬 귀향길이 아니라 몰락한 가문의 재산을 처분한 뒤 어머니와 어린 조카를 데리고 자신이 살고 있는 타향으로 떠나기 위한 귀향길입니다.

그의 고향은 딱하기 짝이 없을 정도로 희망 없는 곳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그래도 자연에서 뛰놀고 이웃끼리 오순도순 정을 주고받았지만 모처럼의 귀향길에서 그가 목격한 고향은 옛정을 완전히 잃어버리고만 삭막한 공간이었습니다.

늙은 어머니는 돈이 될 만한 가재도구를 처분해서 어떻게든 객지에서의 생활비를 충당하려고 하지만 이웃 아낙들이 일손을 거든답시고 찾아와서 집안 물건들을 하나씩 몰래 챙겨갑니다. 어처구니없어 황망해 하고 있는 주인공에게 때마침 옛 친구 윤토가 찾아옵니다. 윤토는 사실 주인공의 친구 신분이 아닙니다. 그 집안의 머슴 아들이었는데 나이가 엇비슷한 바람에 또래 친구로 어울렸던 사람입니다. 비록 신분은 귀천으로 나뉘었지만 어렸을 때는 자연의 품안에서 행복하게 지냈던 사이입니다. 윤토는 서당의 샌님이었던 주인공에게 자연을 가르쳐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우정도 아주 오래 전의 일입니다. 30년 세월이 흘러 중늙은이가 되어서 이번에 만나게 된즉슨 오래 전 주인으로 섬겼던 집안이 이사를 가면서 필요한 가재도구를 챙겨가라는 전갈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은 윤토가 찾아왔다는 말에 반가운 마음으로 나가보지만 어렸을 때 자연을 가르쳐주던 생기 넘치던 소년은 간 데 없고 깊게 주름살이 패이고 고생에 찌든 사내가 다섯째 아들을 데리고 그 앞에 서 있을 뿐입니다. 예전에는 형님동생하고 부르던 사이였건만 윤토는 깍듯하게 “나리마님!”이라고 부르며 허리를 깊이 숙입니다.

살림형편을 물어보자 그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합니다.

“무척 어렵습니다. 여섯째 놈까지 일손을 돕지만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리고 세상까지 뒤숭숭하다 보니 어딜 가나 돈을 뜯기게 마련이고, 뭐 어디 법이 따로 있습니까…. 게다가 농사까지 시원치 않고요. 뭘 좀 심어서 거리에 내다 팔려 해도 몇 번씩 세금을 물고 나면 본전까지 날리고 맙니다. 그렇다고 내다 팔지 않으면 모두 썩고 마니….”

‘아이들은 많고, 해마다 흉년이 들어 굶주리고, 가렴잡세가 많은데다가 군대와 토비와 관료와 지방 토호들의 등쌀에 그만 등신처럼 되고 만 윤토’입니다. 그런 윤토가 필요하다며 골라낸 가재도구는 긴 탁자 두 개, 의자 네 개, 향로와 촛대 한 쌍 그리고 저울입니다.

주인공과 윤토는 서먹하게 재회를 마치지만 그 짧은 사이에 주인공의 조카 굉아와 윤토의 아들 수생이 사귀어서 훗날 만나기를 약속합니다. 역시 아이들은 다릅니다.

그렇게 며칠에 걸쳐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집을 팔고 가재도구를 처분한 뒤 주인공은 노모와 조카를 데리고 배에 오릅니다. 이제 영원히 고향과는 이별할 시간이 왔습니다. 그의 마음은 처연하고 서글퍼집니다. 인정이 흐르고 맘껏 뛰놀던 자연의 고향은 찾아볼 수 없고 온통 빼앗기고 할퀴어서 상처뿐인 가난한 사람들만 남은 궁벽한 땅이 되어버린 곳-그곳을 도망치듯 떠나는 주인공은 참담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어 깊은 밤 뱃전에 누워 생각에 잠깁니다.

그와 윤토의 옛 우정은 이제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빈부와 귀천의 벽을 두 사람은 깰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지독한 가난으로 한없이 쪼그라든 윤토에게서는 이제 그 어떤 호방한 기운도 희망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 초라한 윤토를 떠올리던 주인공은 문득 그가 챙겨간 가재도구 안에 향로와 촛대 한 쌍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립니다.

향로와 촛대는 조상숭배나 종교행위에 필요한 도구입니다.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무엇보다 우상숭배에서 벗어나야 하건만 윤토는 지독한 가난과 착취에 시달리면서도 그 풍습을 이어가겠다는 뜻을 그렇게 내보였습니다.

대도시에서 신식학문을 공부한 주인공은 그런 윤토의 행동이 참 어리석게 느껴집니다.

‘참 희망이 없는 사람일세.’

그는 이렇게 윤토를 나무라다가 문득 자신이 생각하는 그 희망이란 건 어떤 것인지 묻게 됩니다. 어쩌면 자신이 말하는 그 희망이란 것도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낸 우상이 아닌가 하고 자문하게 된 것이지요. 그렇다면 시골의 윤토가 우상을 향해 품은 희망이나 타향 객지의 자신이 막연하게 품고 있는 희망이나 다를 것은 또 무엇인가 하는 의문으로 이어집니다.

루쉰은 그의 단편소설 ‘고향’의 끝을 이렇게 맺습니다.

“그의 희망은 현실과 좀 가까운 것이고, 내 희망은 아득한 것일 따름이었다. 비몽사몽간에 내 눈앞에는 바닷가의 푸른 모래톱이 펼쳐졌다. 쪽빛 하늘에는 둥근 달이 걸려 있다. 나는 생각했다. 희망이란 본래부터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마치 땅 위에 난 길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사실 말이지, 길이란 본래부터 있은 것이 아니라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차차 생긴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살기가 너무 힘들다고 말합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고 적을 만들고 폭력을 휘두르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집니다. 희망은 사라진지 오래고, 이젠 포기의 항목을 나열하며 자조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루쉰은 분명 이 시대를 향해서도 똑같이 외쳤을 것입니다. 절망하지 말고 쪼그라들지 말고 일어서서 걸어 나가라고 외칠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애초 우리에게 미래를 향한 길이 나있어 그 길을 걸어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미래는 어찌 보면 ‘아직은 없는 것’입니다. 희망은 현재에 없는 것을 바라는 마음이니, 그 희망이란 녀석 자체가 모호합니다. 그저 나름대로 한 발자국씩 내딛다보면 그 발자국으로 인해 길이 생기게 되고, 그 걸음을 쉬지 않고 옮기다보면 숨통이 확 트이는 큰 길이 생길 것입니다. 절망과 포기의 이 현실에 루쉰이 자꾸 생각나는 건 희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이미령 cittalmr@naver.com


[1311호 / 2015년 9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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