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3. 김범식 대목장

대목장 외길 반세기, 쓰러지던 전각에 새생명 불어넣다

▲ 김범식 대목장은 50여년 외길 인생에 대해 “욕심이 없으니 실망할 일도 없고, 주어진 일에 충실할 수 있었다”면서 미소지었다.

일평생 한길을 걷는 이들이 있다. 그 길은 지독히도 외롭고 힘겨운 길이다. 부와 명예, 권력을 뒤로 한 채 수행하듯 오직 자신의 일에만 집중해 최고의 반열에 오른 이들을 우리는 ‘장인(匠人)’이라고 부른다. 장인으로 인정받기까지 그들이 흘려야했던 땀과 눈물, 고뇌와 열정의 시간들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그러한 장인의 손길에 의해 태어난 성과물들은 현재와 미래의 세대가 함께 공감하고, 시간을 잇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존재한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장인을 존경하고 그 길에 갈채를 보낸다.

김덕기 선생 문하서 목수일 시작
50여년 전통목조건축 외길 인생
직지사 비롯해 전각 200곳 작업
“도편수보다 ‘절집 목수’가 좋아”

김범식(74·범준) 대목장, 그는 전통목조건축의 길을 걸어왔다. 무려 반세기 이상의 세월이다. 그의 직업은 집터를 정하고 방향과 설계, 기술지도와 감리 등 건축의 시작에서부터 마지막까지 책임지는 도편수로, 무엇보다 전통사찰을 짓는 ‘건축 명인’으로 평가받는다. 김천 직지사 박물관(청풍료) 불사를 시작으로 전국의 사찰 전각 200여곳의 신축과 보수에 그의 지극한 손길이 닿았다. 합천 해인사, 문경 봉암사, 청도 운문사, 수원 봉녕사, 설악산 봉정암 등 전국의 내로라하는 사찰들이 그의 손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새로 지었으되 천년의 세월을 머금은 옛 전각들을 거스르지 않았고 자연과 어깨를 걸듯 조화로움이 돋보인다.

그가 조성한 전통 건축물은 정제된 조형미와 절제된 선, 건축물의 양감을 돋보이게 하는 화려한 부자재와 단청의 아름다움으로 요약된다. 그 옛날 장인이 지었을 목조건축의 지극함과 아름다움, 조화로움의 전통을 그대로 복원해 냈으니 그는 전생에도 도편수요, 대목장이었을 것이다. 곱게 늙은 도량 사이사이에 걸림 없이 전각을 짓고 복원한 도편수에게는 수많은 상이 따랐다. 건설환경근장과 한국건축가협회상, 문화재청공로상, 국무총리표창에 한국현대인물열전 33인에 이르기까지. 경상북도는 2012년 무형문화재 제37호 대목장으로 지정했다. 그럼에도 그는 ‘대목장’, ‘도편수’라는 호칭보다는 한사코 ‘절집 목수’로 불리길 좋아한다.

충주 석종사 불사 전체를 그에게 맡겼던 금봉선원장 혜국 스님은 대웅전 건립 당시를 회상하며 “모든 걸 믿고 맡길 수 있는 분이고 이 시대 최고의 장인”이라고 소개했다. 스님은 불사 중 일어난 일화 하나를 들려주셨다.

석종사 대웅전 불사가 한창인 어느 날 혜국 스님에게 급한 볼일이 생겨 며칠 사찰을 비워야 했다고 한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대웅전 마루 곳곳이 괭이에 찍혀 모두 뜯어내야 할 판이었다. 마루공사를 절반정도 마친 상황이라 더욱 황망했다. 범인(?)은 김범식 대목장이었다. 연유를 물으니 몇 년 후면 갈라지고 틀어질 게 빤히 보이는데 어떻게 불사를 계속할 수 있겠냐는 반문이었다.

“마루 하나에도 세심하게 마음을 쏟는 분인데 대들보나 석가래, 기둥은 어떻겠습니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전통 사찰들이 김범식 대목장에게 불사를 맡기는 데에는 다 합당한 이유가 있는 겁니다. 지난 8월 봉행된 석종사 선림원 낙성법회에서 ‘21세기 새로 지은 전각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완벽하다’는 총무원장 자승 스님의 말씀처럼 그는 부처님을 향한 지극한 신심에 실력과 신뢰까지 갖춘 최고의 장인입니다.”

김범식 대목장에게 목수일은 천직이자 부처님과 맺어준 귀한 인연이다. 그의 아버님은 장롱, 궤, 경대, 문갑 등 목가구를 제작하는 목수였다. 어린 시절 그의 놀이터는 나무향 가득한 목공소였고, 자연스레 대패질하는 아버지를 보며 자랐다. 목수의 DNA는 김범식 대목장의 세포 하나하나에 새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목수일이 자신의 업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런 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패와 망치를 잡게 된 것은 22살, 군복무를 마친 후다.

“밥벌이를 해야 할 나이가 됐고 먹고살기 위해 시작한 일이 바로 목수였습니다. 특별한 목표가 있었다기보다 가장 익숙한 일을 천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지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은 최고의 스승을 만나 문하에서 목수일을 제대로 배울 기회를 가진 것입니다.”

그의 스승은 당대 대표적인 목수였던 김덕희 선생이다. 김덕희 선생은 인간문화재 최기영·전흥수 대목장을 길러낸 대목장으로, 불교계에서는 전통사찰 건축의 대가로 통했다. 큰절 스님들 중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는 지인의 소개로 1964년 김천 직지사 청풍료 불사 현장에서 김덕희 선생을 만났고, 전통목조건축 기술을 배우는 인연으로 이어졌다.

전통목조건축 일은 무척 고된 작업이었다. 기둥으로 사용할 나무를 찾아 자르고 다듬어 집을 집는 모든 과정을 손으로 해야 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일을 맡으면 마무리될 때까지 수개월씩 객지생활을 해야 했다. 지금은 기계로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나 예전에 비해 작업은 훨씬 수월해졌다. 그러나 전국을 떠돌아다니면서 객지생활을 해야 한다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고단하고 힘겨운 일이지만 그는 당연히 해야 할 ‘내 일’로 받아들였다. 생명을 다해 스러져가던 건물이 대목장의 손길로 다시 장엄하게 복원되는 과정은 꺼져가는 생명에 새롭게 ‘숨’을 불어넣는 것과 같은 매력으로 다가왔다. 일체의 존재를 살리는 가르침이 곧 부처님의 핵심 사상이니 건물을 살리는 일은 그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바라밀인 셈이다.

 
사찰에서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의 불심도 나무의 옹이처럼 단단해졌다. 소박한 살림살이에 정갈한 스님들의 모습, 장엄하고 은은한 독경소리, 넉넉하고 푸근한 부처님의 미소까지 모든 게 좋았다. 여기에 단출하면서도 고졸한 도량은 그가 항상 머물고 싶은 최고의 작업장이었다. 무엇보다 즐겁고 신명났던 것은 매일 스님들과 생활을 같이 한다는 점이다. 스님들과 함께 부처님께 예배드리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해 독경소리 들으며 작업하고 기도시간에 맞춰 하루를 정리하는 게 즐거웠다. 작업 중 스님의 염불소리 따라하고 스님들처럼 몸과 마음을 간직하니 일상 하나하나가 스님들처럼 여여해졌다.

그는 1960년대 김덕희 선생과 함께 장인으로 꼽히는 조원재 대목장을 만나면서 또 한 번 목수로서의 눈을 뜨게 된다. 조 대목장은 그에게 도면의 중요성을 일깨워줬고 진주 촉석루 보수와 불국사 복원 불사에 동참시켜 훗날 도편수가 되기 위한 경험과 기술을 전수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당대 내로라하는 최고 목수 두 분을 스승으로 모셨으니 최상의 인연이라 하겠습니다. 또 목수였던 아버지의 손재주와 눈썰미까지 물려받았으니 이 또한 가피 중의 가피일 것입니다. 1977년 36세라는 젊은 나이에 목공분야 문화재수리기능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인연들 덕분이겠지요.”

문화재수리기능자로 지정되자 절집 목수 생활은 더욱 본격화됐다. 그의 손길로 직지사의 요사채와 종각이 복원됐고 운문사 회성당, 봉암사 극락전이 새 생명을 얻었다. 그리고 따듯한 온기를 품고 스님과 불자들을 맞이하는 존재로 거듭났다. 어디 그뿐인가. 해인사 조사전, 전등사 극락전, 봉녕사 향하당 등이 옛 모습을 담은 여법한 전각으로 거듭났다. 최근 충주 석종사 선림원 신축불사를 회향하고 지금은 거창 소림사 법당을 짓는 일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그에게는 불사에 임하는 원칙이 있다. 비록 불사기간이 늘어나더라도 기본과 전통에 충실하면서 제대로 된 도량을 지어야 한다는 것. 지난 50여년 스님과 불자들의 무한 신뢰 속에 한 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이유다.

“부처님 가피로 지금껏 살아 왔다고 생각합니다. 작은 재능이지만 불사에 보탬이 된다면 보답을 하는 게 불자된 도리일 듯합니다. 더욱이 1000년을 가야할 집인데 정성스럽지 못하다면 문제겠지요. 그곳에 부처님과 스님들이 상주한다고 생각하면 허투루 건물을 지을 수는 없습니다. 고려시대에 지은 수덕사, 봉녕사 전각들은 지금도 사용하고 앞으로도 사용될 것입니다. 선대 목수들은 1000년 후 후손들도 문제없이 쓸 수 있도록 짓겠다는 원력으로 건축했을 게 분명합니다. 부처님 모실 집인데 대충대충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껏 작업한 200여 전각 모두 혼신을 다했기에 저에게는 모두가 특별하고 생생하게 그 모습들이 기억납니다.”

전각을 지으면서 삿된 욕심을 갖지 않았다. 욕심을 내거나 이윤을 먼저 생각했다면 지금까지 목수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욕심이 없으니 실망할 일도 없고 주어진 일에 충실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목수 일에 충실하다 보니 더 많은 후배들에게 기술을 전해주지 못한 것이다. 이에 15년 전 한국전통건축연구원을 세웠다. 전통건축물들을 모형으로 남겨 더 많은 이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다. 지금까지 부석사 무량수전, 봉정사 극락전, 수덕사 대웅전, 동화사 대웅전을 비롯해 덕수궁 중화전 등 국보와 보물에 해당하는 건축물 모형 70여점을 제작했다. 모형이라지만 실물의 10분이1 또는 5분의1 크기로 세밀하게 축소시킴으로써 작품 하나를 만드는데 족히 6개월이 소요된다.

“문화재를 연구하고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자료가 될 것입니다. 비록 모형이지만 전통방식 그대로 재현해 놓았을 뿐 아니라 개방형 구조라서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 한 눈에 파악할 수 있지요. 훗날 사찰불사와 복원에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숫타니파타’에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했다. 세상의 온갖 애착에서 벗어나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같이 정진할 것을 당부한 말이다. 애착에 걸림 없이 정진하는 무소의 뿔처럼, 김범식 대목장은 전통목조건축을 화두삼아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 길이 외롭고 지난하더라도….

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1312호 / 2015년 9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