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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봉암사를 나오다

기자명 김택근

▲ 희양산 봉암사계곡 한 쪽에 서있는 마애불. 봉암사 결사를 외호하며 그 시작과 끝을 지켜봤을 것이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성철이 가만히 보니 시절이 수상했다. 스님들도 하나둘 흩어졌다. 성철은 경찰과 빨치산 양쪽 모두에 의심을 받고 있었다. 봉암사의 실질적인 대표로 인식되어 ‘손봐 줄 대상’이었다. 당시 편을 가르는 사회 분위기로는 양쪽에서 모두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한반도에 전쟁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전쟁이 터질 것이라는 소문들이 산문을 넘어왔다. 문경 봉암사는 빨치산들이 오가는 길목에 있었고, 실제로 산사람들이 봉암사 인근에 자주 출몰했다. 이에 군경의 출동도 잦아졌다. 빨치산은 기어이 봉암사에도 들이닥쳐 식량을 약탈해갔다. 어느 날은 깎아놓은 곶감을 몽땅 가져가 버렸다. 봉암사 일대는 감나무가 많아서 곶감은 겨울 양식의 하나였다. 맑은 도량이 갑자기 혼탁해졌다. 고요했던 산사에 고함 소리가 난무했다.

한번은 군인 70~80명이 올라와 절에서 잤다. 자신들을 빨치산 토벌대라고 했다. 빨치산을 수색하러 가야하니 절에서 밥을 해달라고 했다. 난처해진 청담이 성철에게 어쩌면 좋으냐고 물었다. 성철은 단호하게 그럴 수 없다며 토벌대장을 불렀다.

“당신들이 군율(軍律)이 안서면 싸움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절에도 법이 있소. 우리가 여기 들어온 뒤로 여태 한 번도 아침에 밥해 먹은 적이 없어요. 당신네들이 들어서 우리가 여태까지 죽 끓여 먹던 법을 깨야 되겠소?”

“그야 안 되지요.”

성철의 설득에 군인들이 마을로 내려갔다. 봉암사에 빨치산이 자주 출몰하다보니 군인과 경찰이 봉암사 승려들을 의심했다. 봉암사는 빨치산에게도 경찰에게도 불온한 곳이 되어갔다. 

1949년 봄, 부처님오신날을 보낸 직후였다. 봉암사 백련암의 비구니들이 나물을 뜯으러 나갔다. 고사리를 꺾고 다래순도 땄다. 나물을 찾던 묘엄은 문득 둘러보니 도반은 보이지 않고 깊은 산속에 홀로 있었다. 그때 갑자기 코앞에서 괴물이 나타났다. 묘엄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괴물은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황토가 범벅인 두루마기를 입고 얼굴에는 숯검정을 칠한 사내였다. 사내는 북에서 내려왔다며 자신을 따라오라 했다. 묘엄이 가지 않겠다고 버티자 총을 꺼내 위협했다.

그때 나물을 캐던 묘찬이 이 광경을 보고 달려왔다. 묘찬은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출가했고 묘엄보다는 6살 위였다. 묘찬은 묘엄 대신 자신을 데려가라고 소리쳤다. 사내가 난감했던지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사내 둘이 나타났다. 모두 황토 묻은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세 사내가 두 비구니를 끌고 가려 했다. 묘찬이 한 사내의 등짝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차라리 우리를 죽이시오.”
“정말 죽어도 못가겠다는 거야!”
“그렇소. 우리는 불도를 지키면서 단 하루를 살다 죽을지언정 부처님 법을 어기며 백년 살기를 원치 않소.”

아침저녁으로 외우던 자장율사의 시가 용기이고 힘이었다. 이념에 휘둘리기 보다는 그 자리에서 죽는 것이 나을 듯했다. 그러자 사내들 태도가 확 바뀌었다.

“이렇게 철저한 분들이 여승을 하고 있는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사내 하나가 총을 거두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사실 저는 산 아래 가은지서 지서장입니다.”

사내들은 모두 빨치산이 아닌 경찰이었다. 경찰이 승려의 사상을 시험해보려 변장을 하고 속을 떠본 것이었다. 기가 막혔다. 비열하고 더러운 짓이었다. 묘찬이 달려가 지서장의 뺨을 후려쳤다. 지서장은 잠자코 있었다. 만일 순순히 따라나섰다면 어찌할 뻔 했던가. 저들에게 사람 목숨은 별 것이 아니었다. 내 편이냐 네 편이냐만 따졌다.

다리에 힘이 빠진 두 비구니는 비틀거리며 봉암사로 내려왔다. 그리고 청담과 성철 앞에서 소리 내어 울었다. 분하고 서러웠다. 봉암사에 대중공사가 벌어졌다. 아무래도 비구니들이 위험하니 거처를 옮기도록 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결국 비구니들은 걸망을 챙겨야 했다. 백련암을 나와 봉암사 계곡 한 편에 서있는 마애불을 찾아갔다. 고려시대부터 봉암사의 성쇠를 지켜본 돌부처께 하직인사를 했다. 다시 큰절로 내려와 법당에 엎드렸다. 진정 아쉬웠다. 몇 번씩 봉암사를 돌아보며 비구니들은 희양산을 내려갔다. 성철과 청담을 비롯한 대중이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총구는 봉암사 결사까지 겨누고 있었다. 경찰이 조사할 것이 있다며 봉암사 대표를 경찰서로 나오라 했다. 성철은 삿갓을 쓰고 육환장을 짚고 경찰서로 들어섰다. ‘봉암사식 나들이’ 차림이었다. 그러나 경찰들이 보기에 성철의 차림새는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경찰들이 호통을 쳤다.

“당신이 누군데 어디 함부로 창을 들고 들어오는거야!”  

성철은 제대로 해명도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절에 돌아와서는 이내 청담에게 화풀이를 했다.

“절이 위험한데 묵언만하고 있을 거야!”

그 날로 청담은 묵언을 그만 두고 사태 수습에 나섰다. 봉암사 아랫마을 출신으로 이 광경을 지켜본 혜명 스님은 당시 일을 이렇게 전했다.

“그때 청담 스님은 철스님을 보시고는 혼자 말씀하시기를 ‘철스님이 도인인데 이런 일 하나 수습하지 못한다’고 한탄을 하였어. 내가 보기에 철스님은 문자를 갖고 하는 것은 도가 텄지만, 사회활동이나 사람과 대면하는 것에는 능하지 못했거든.” (김광식 지음 ‘아! 청담’ ) 

성철이 가만히 보니 시절이 수상했다. 스님들도 하나둘 흩어졌다. 성철은 경찰과 빨치산 양쪽 모두에 의심을 받고 있었다. 봉암사의 실질적인 대표로 인식되어 ‘손봐 줄 대상’이었다. 당시 편을 가르는 사회 분위기로는 양쪽에서 모두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성철은 수행도량을 옮기게 된 당시 정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가을이 되고 보니, 뭣인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요. 딴 사람은 있어도 괜찮지만 나는 거기 있으면 안 되겠다 말입니다. 그래서 추석 지나고 난 뒤에 대중공사를 했습니다. ‘나는 떠나야 하니까 그리 알고, 순호(청담) 스님한테 전부 맡기니 입승스님 시키는 대로 하시오.’ 그렇게 말한 뒤 봉암사를 나왔습니다.”

성철이 먼저 떠난다고 하니 청담의 심기가 편치 않았던 듯하다. 두 사람의 작별을 지켜본 정천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철스님이 장경과 책을 싸서 봉암사를 떠나가면서 청담 스님에게 잘 있으라 인사를 하니 청담 스님은 철스님에게 ‘안 죽으면, 만나보겠지’라고 퉁명스럽게 응대했지.”

성철이 전쟁이 터질 것을 예견했는지는 알 수 없다. 훗날 봉암사 주변 사람들은 “뭣인가 좀 알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작 성철 자신은 “소발에 쥐잡기로 그리 된 것”이라 얘기했다. 하지만 소장하고 있던 책들을 옮긴 것은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가만히 보니 시절이 잘못 돌아간단 말입니다. 나무를 베어다가 켜서는 책이 좀 있었는데 나무로 궤짝을 짜 가지고 책을 모두 괘 속에 넣었습니다. 그래 놓고 향곡 스님을 시켜서 트럭을 하나 가져오라 해서는 책을 밤중에 실어다가 향곡 스님 토굴인 월래(月來)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6•25사변이 일어나기 바로 일 년 전입니다.” 

불서를 실은 트럭이 어둠을 헤치며 희양산을 내려갔다. 어쩌면 결사의 상징물이 봉암사를 떠나가는 것이었다. 불서를 먼저 보내고 서너 달이 지나 성철은 부산 기장군 묘관음사로 거처를 옮겼다.

성철이 산문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한밤중에 빨치산들이 몰려왔다. 어림 20명이 넘어 보였다. 대중을 모두 큰방으로 모이게 했다. 경찰에 자신들의 동태를 신고했다는 이유로 원주인 보경을 묶어서 꿇어 앉혔다. 끌고 가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죽이면 그냥 죽어야 했다. 빨치산들은 일체유심조, 유물론, 유심 같은 말을 뱉으며 나름 불교에 대해 얘기했다. 허망한 종교라며 승려들을 폄하하고 공산주의 이론을 들먹였다. 함께 먹고 함께 쓰는 공산주의야 말로 평등하다는 것이었다.

이때 청담이 나섰다. 빨치산을 상대로 그들의 설익은 논리를 물리쳐야 했다. 그러나 총을 든 그들을 설복시키기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들의 감정을 상하지 않도록 좋은 말로, 쉬운 말로 다독여야 했다. 한 사람을 설득시키면 다른 사람이 나섰다. 청담은 빨치산 서너 명을 상대로 불교의 다양한 소재를 들어 그들의 편견을 녹였다. 불교가 그들의 사상보다 더 평등하다는 것을 예를 들어 설명했다. 그 장면을 지켜 본 혜명 스님이 훗날 이렇게 증언했다.

“스님은 경을 보고, 지견을 얻었고, 참선도 하였으니 말이 청산유수거든. 그런데 빨치산들은 자꾸 말이 막히거든. 그 빨치산 대장은 나하고는 동네 불알친구거든. 이름이 장붓들이라고. 키만 크고, 학교도 못 다닌 녀석인데. 그래 나는 더욱 말도 못하고 숨을 죽이며 그 장면을 보았지.” (김광식 지음 ‘아! 청담’)

마침내 산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밤 10시경에 시작한 산사람들과의 대화는 새벽 두, 세 시경에 끝이 났다. 산사람들은 총구를 거뒀다. 보경을 풀어주면서 자신들이 나간 후 3시간 후에 신고하라며 사라졌다.

김택근 언론인·시인 wtk222@hanmail.net
 

[1312호 / 2015년 9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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