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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설법

기자명 서광 스님

생각 렌즈가 있는 그대로의 세상 경험 방해

“수보리야! 그대는 여래가 자신이 설한 법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가 설한 법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여래를 비방하는 것이다. 그는 내가 설한 뜻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설법이라는 것은 가히 설할 것이 없음을 가리켜서 설법이라고 말한다.”

중생 눈에는 설해진 법 있지만
법신 자리에선 법 자체도 없어
불교는 생각 넘어선 체험 중시
일반인도 에고 멈춘 순간 체험

우리 중생들의 눈으로 보면, 부처님은 깨달음을 이루신 후, 열반에 드실 때까지 49년간 설법을 하셨고, 설해진 법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생각이 끊어진 청정한 법신(法身)의 자리에서 보면 법을 설하는 주체도 없고 법을 듣는 대상도 없으며, 설해지는 법 자체가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가 끊어지고, 주객 이원성이 사라진 법신의 자리는 무엇이 있고 없음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무슨 의미인가? 일체중생에게 법신이 있다고 하는데, 과연 우리는 법신의 순간을 경험하기는 하는 걸까? 중생, 부처, 설법, 심지어 깨달음조차도 이름일 뿐, 실체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대체 언제, 어떻게 그 실체와 접촉하고 만날 수 있다는 것일까?

우리는 누구나 자신을 잊고, 우리와 함께하고 있는 상대도 잊어버리는 순간을 한번쯤은 경험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격의 없는 친구와 물놀이를 하면서 신나게 떠들고 놀다가 어느 순간 노는 나도 잊고 함께 놀고 있던 친구도 잊어버린 적이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온통 저녁노을로 물든 하늘과 바다가 맞닿는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가는 해를 바라보다가 문득 자신도 세상도 함께 잊어버린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저녁산사에 울려 퍼지는 범종소리, 이름 없는 들꽃 사이로 스치는 바람결에 찰나적으로 우리의 영혼이 접촉될 때,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순간의 전율과 울컥함을 느낀 적이 있었을 것이다.

온몸, 구석구석, 세포 하나하나에 그 느낌이 스며드는 순간,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고, 다시 그마저 사라져버리는 순간을 경험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오직 느낌만이 존재하는 뭔가 거룩하고 고요한 그런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 순간만큼은 나와 타자 간의 손익이 계산되어 지지 않는다. 과거에 연연하거나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없다. 그냥 살아있는 순간을 맛볼 뿐이다. 에고의 작용이 멈춘 순간이기도 하다.

도겐선사는 불교를 공부한다는 것은 자기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고, 자기에 대해 공부한다는 것은 자기를 잊는 것이고, 자기를 잊는다는 것은 만물과 친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살다가 보면 우리는 분명 우리 자신의 존재를 잊고 만물과 경계선이 없는 그런 순간들을 체험할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런 순간들을 오래 유지할 수 없게 만든다. 왜인가?

최근에 뇌과학은 우리 마음이 일없이 가만히 있을 때 강하게 활성화되는 ‘불이행모드 네트워크’ 라고 불리는 뇌의 영역(default mode network)을 발견했다. 이 영역의 주된 작용은 자아감각을 창조하고 과거와 미래 속으로 우리 자신을 투사하고, 신체적·정서적으로 자아감각을 위협하는 문제를 살피는 것이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을 돕기 위해서 진화해온 이 뇌의 부위가 우리들로 하여금 생각의 렌즈를 거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명상훈련이 불이행모드 네트워크의 작용을 억제한다는 연구가 있다.

법을 설한다는 것은 생각의 렌즈를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체험한 세상에 대한 일종의 묘사다. 우리가 온몸, 온 마음으로 세상 만물을 만나는 순간순간의 몸의 느낌, 몸의 감각(body-felt, body-sense)에 대한 설명이다. 또 불이행모드 네트워크의 작동이 멈춘 상태로 세상을 보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법은 생각, 관념, 언어로 굳어진 고정된 실체로 존재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는 뜻이다. 

서광 스님 한국명상심리상담연구원장 seogwang1@hanmail.net


[1312호 / 2015년 9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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