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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의 시대’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

  • 법보시론
  • 입력 2015.10.05 12:26
  • 수정 2015.10.05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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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는 인류의 정신발전에서 자양분이 될 만한 위대한 변화가 이루어진 시기를 ‘축의 시대(Axial Age)’라고 했다. 이 시기는 대략 기원전 900년부터 기원전 200년 사이의 시기를 말한다. 이 때 지상에 출현한 이들이 소크라테스, 붓다, 공자, 노자 등이다. 이들은 영적, 철학적 선구자들로 인류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거나 위대한 종교의 교조가 된 사람들이다. 물론 불자들은 축의 시대 성자들 가운데 석가모니 붓다의 가르침이 가장 높고 심오하고 고귀하다 여기며 신앙해 왔다.

근대라고 하는 대변화의 시기, 에너지 혁명과 함께 정치·경제 등 사회 전반에 변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던 시절, 사람들은 역설적이게 ‘축의 시대’로 눈을 돌렸다. 왜였을까. 모든 분야가 변화해 갔던 근대기에 종교계에는 화석화(fossilizaton) 현상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종교가 형식화(formalism)와 개혁화(reform)의 과정을 번갈아 진행하지 않고, 개혁화는 중지 된 채 형식화의 과정만 지속되어 시대의 흐름을 선도하지 못하던 시기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사람들은 새로운 종교를 찾거나 기성 종교를 부정하며 개혁화를 위한 변화를 꿈꾸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다른 종교는 물론이며 불교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불교가 남방불교, 소승불교, 장로불교라 불리며 형식화(formalism)에 머물러 화석화되고 있을 때, 대승불교를 주장한 새로운 세력은 이를 거부하고 개혁화(reform)의 과정을 찾았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경우도 같은 상황이라고 하겠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근대로 접어들며 ‘삼교회통’의 시도가 있었다. “유도, 불도 누천년에 도를 이미 다 했던가?”를 외친 수운 최제우(1824~1864)가 그랬고, 불교를 양생(養生)의 종교라고 주장한 증산 강일순(1871~1909)이 그랬다.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석가모니를 연원으로 모시고 신 불교운동을 주장한 소태산 박중빈(1891~1943)의 행적이 이와 같은 상황을 방증한다.

중국의 강유위(1858~1927)는 그의 저서 ‘대동서(大同書)’를 통해서 유토피아적인 이상세계에서 불교가 중심에 자리할 것을 예견했다. 경우는 다르지만 천리교를 창시한 나카야마 미키(中山美伎:1798~1887)도 그 뿌리를 불교에 두었다는 것은 흔히 알려진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들은 다 같이 시대적 문제 해답의 중심을 불교에서 찾고자 했다. 하지만 그 기저에는 사회적 측면에서 발견된 종교의 역기능에 대한 비판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종교가 시대적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사회적 순기능을 하지 못하자 기성종교가 지닌 장점을 전승하고 단점을 바꾸어서 새로운 종교적 이상을 제시한 것이다. 불교 역시 본질적인 부분은 계승해야할 장점임을 인정하지만 그 역할과 모습은 개혁의 대상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한 종교의 변혁은 내부에서 혹은 외부에서 시작된다. 내부에서 스스로 시작하면 개혁의 주체가 되어 형식화(formalism)와 개혁화(reform)의 과정을 반복하며 시대의 조류를 주도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 개혁의 대상이 되면 그 모습이 비참해 지거나 역사에서 사라져 버릴 수밖에 없다.

지금 한국 불교는 다시 한 번 ‘축의 시대’로 눈을 돌릴 때가 된 것 같다. 스스로 개혁의 주체가 되어 이상세계 구현의 노둣돌이 돼야 할 때이다. ‘축의 시대’의 성자나 현인들은 고요하고 평화로운 상황에서 진리를 전한 것이 아니다. 전쟁과 폭력, 미신과 배타성으로 얼룩진 열악한 환경에서 진리를 설파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석가모니 붓다나 예수, 그리고 공자는 앉아서 도를 전한 것이 아니라 다니면서 도를 전했다. 특히 석가모니 붓다는 자신을 향해 오는 숭배를 저지하고 자신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기를 권했다고 한다. 지금의 사람들은 어디에 귀를 기울이는가? 다시 한 번 통찰의 눈을 돌려볼 때이다.

장재진 교수 sira113@naver.com

[1313호 / 2015년 10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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