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12연기-① 12연기란
36. 12연기-① 12연기란
  • 이진경 교수
  • 승인 2015.10.05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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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연기법이란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에 저것이 일어남”을 뜻한다. 어떤 것도 그것을 조건 짓는 것에 따라 존재하며, 그 조건이 사라지면 그 또한 사라짐을. 이는 ‘중아함경’에서 말하듯, 석가모니가 만든 것도 아니고 다른 누군가가 만든 것도 아니다. “그것은 부처가 세간에 나오든 그렇지 않든 간에 우주[법계] 안에 항상 있는” 것이고, 부처란 이를 깨달아 중생들에게 설하여 알려주는 이이다. 그 조건에 따라 어떤 것도 그 존재나 본성이 달라진다는 이런 가르침은, 지금은 철학이나 과학에서 약간은 다른 어법으로 다양한 양상으로 지적되고 강조되는 바이다.

노병사 고통 목격한 부처가
연기법 깨닫고 고통 원인을
연기적 인과관계 통해 설명
12개 개념 모두 ‘무지’ 함축

그런데 ‘아함경’ 등 초기경전에 연기법에 대한 가르침과 더불어 석가모니의 깨달음을 구성하는 중요한 가르침이 ‘12연기’이다. 잘 알려진 것이지만 나중의 논의를 위해 간단히 요약하면, 사람들이 살면서 겪는 가장 근본적인 고통인 ‘늙고 죽음’(老死)은 태어남(生)을 조건으로 하여 존재하며, 태어남은 ‘있음’(有)을 조건으로 하여 존재한다. 있음은 ‘집착/취착’(取)을 조건으로 하여 존재하고, 집착은 ‘애착’(愛)을 조건으로 하여 존재하며, 애착은 쾌감이나 불쾌감 같은 ‘감각작용’(感受, 受)을 조건으로 한다. 감각작용은 감각기관과 외부의 만남 내지 ‘접촉’(觸) 없이는 있을 수 없으니 접촉을 조건으로 하고, 그런 접촉은 눈과 귀, 코 등 6개의 ‘감각기관’(六入, 六處)을 조건으로 하여 가능하게 된다. 이런 육처는 사물(色)을 구별하고 그것을 파악하는(~~라고 명명하는) 작용(名色)을 조건으로 하여 존재하고, 명색은 분별능력이나 분별작용(識)을 조건으로 가능하게 된다. 분별작용은 필경 살기 위해 발동되기 마련인 충동이나 의지, 그에 따른 행동(行) 때문에 발생하며, 그런 행동이나 의지는 세상이 무언지 알지 못하는 조건 위에서, 즉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하여 발생한다. 이를 조건이 되는 것, 혹은 원인이 되는 것부터 다시 쓰면, ①무명(無明), ②행(行), ③식(識), ④명색(名色), ⑤육처(六處), ⑥촉(觸), ⑦수(受), ⑧애(愛), ⑨취(取), ⑩유(有), ⑪생(生), ⑫노사(老死)의 순서로 배열할 수 있다.

통상 이를 설명하면서 무명이란 빛(明)이라고 표현된 지혜가 없음을, 다시 말해 연기법이나 무아의 진리를 알지 못함에서 오는 무지의 상태라고 하고, 행(行)이란 행위나 그것을 하게 하는 의지, 충동을 뜻하는데, 무지로 인한 행동이나 충동을 뜻한다고 본다. 식(識)은 인식작용이나 인식주체라고 하고, 분별작용이라고도 하는데, 불교에서 분별이 대개 그렇듯 ‘지혜’와 반대되는 의미를 함축한다. 무지에 따른 충동을 조건으로 하는 분별작용이니 그럴 것이다. 명색(名色)은 물질(色)과 정신(名)을 뜻한다고 보기도 하고, 신체와 영혼, 혹은 신체적 작용과 정신적 작용을 뜻한다고 보기도 한다. 육처(六處)는 눈 코 귀 혀 몸 및 의식이라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촉은 그런 감각기관과 대상의 접촉을, 수(受)는 그 접촉에 따라 감각된 내용이나 그런 감각작용을 뜻한다. 애(愛)는 말 그대로 괴로움이나 즐거움에 따른 애증의 작용을 뜻하고, 취(取)는 맹목적 애증에 따른 집착이며, 유(有)는 그런 애증에 따라 만들어지는 ‘존재’를, 생(生)은 그런 존재의 발생을, 노사(老死)는 그 존재의 쇠락과 죽음을, 그에 따른 괴로움을 뜻한다.

이는 늙고 병들고 죽는 것에서 오는 고통을 목도하여 출가했던 석가모니가 연기법을 깨달은 이후, 그에 따라 그런 고통의 이유를 해명해주는 연기적 인과연쇄를 해명하여 설한 것일 게다. 무상과 무아의 실상에 대한 무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무능력, 그것이 노사로 귀착되는 고통의 이유인 셈이다. 그렇기에 무명에서 시작된 12개 개념이 연쇄는 모두 무지를 함축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해석하면, 사실은 설명해야 할 ‘무지’라는 현상이 어떻게 발생하게 되는 것인지를 해명하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전제로 하여 반복하여 강변하는 것이 되고 만다. 무지하기에 세상은 ‘무명’인 것이고, 무명이니 맹목적 의지나 충동에 따라 행동하게 되고, 그런 무지를 조건으로 분별하게 되고…. 무명이란 무지를 뜻한다고 정의하는 순간, 설명해야 할 무지를 이미 전제하는 게 되고, 그렇게 가정된 무지로 무지를 설명하는 순환논증의 오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를 피하려면 무지를 가정하지 않고 무명이란 개념을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무명이란 빛이 없음이고 지혜 없음이니 그 자체로 무지를 뜻하지 않는가? 무지 없는 무명이란 어불성설 아닌가? 그렇다면 순환논증은 피할 수 없는 것일까?

이런 의문을 갖고 유심히 12연기의 항목들을 다시 보면, 각각의 개념들이나 개념들의 연결이 생각보다 이해하기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3번째 항에 있는 ‘식’을 두고 ‘잡아함경’에선 6근의 분별작용이라고 설명하는데, 6근은 5번째 항에 가서야 존재한다. 즉 6근이 아직 존재하기 않는 단계에서 6근의 분별작용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6근 없는 6식이라니! 이는 조건에 따라 사태를 보라는 연기법의 원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리고 6근(6처), 그리고 그것과의 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발생하는 감수작용은 6식의 작용일 것이다(6식이 분별작용이 있어야 할 자리는 바로 여기다). 그렇다면 이는 3번째 있는 ‘식’과 같은 것이 된다. 같은 개념이라면 이렇게 반복할 이유가 있을까? 더구나 6처 이전에 무리하게 6식의 개념을 말하면서까지.

명색의 개념 또한 그러하다. 명색을 정신과 육체 내지 그것들의 작용이라고 한다면, 이것이 6처보다 먼저 나온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다. 데카르트 같은 사람처럼 정신과 육체가 감각기관 이전에, 그것과 별도로 존재하는 실체라고 본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실체가 없음을 보았던 석가모니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실체라고 처음부터 가정하지 않는 한, 정신이란 가령 6식 없이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들리지 않는 소리를 아름답다고 판단할 수 없는 것처럼. 이는 명색을 물질과 정신이라고 보아도 마찬가지다.

‘식’보다 먼저 나오는 ‘행’의 개념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도 이해하기 쉽지 않다. 무지한 관념(식)이라고 해도, 통상 관념 없이 행동하지는 않는다고 하지 않는가? 무지가 문제인 것은 그것이 행동을 오도하는 관념이기 때문 아닌가? 그렇다면 무명에서 무지한 식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무지한 행동을 야기한다고 하는 게 더 그럴듯해 보이는데, 무명 다음에 곧바로 ‘행’을 잇고, 그걸 조건으로 ‘식’을 설명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위치 속에서 이해되는 행이나 식이란 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이것만은 아니다. 그 뒤에 있는 다른 개념들도 세심하게 따져보면 수많은 의문들을 야기한다. 이는 ‘12연기’의 가르침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자명한 연쇄가 아니며, 거기 사용된 개념들 또한 상식이나 통념과 같지 않음을 뜻한다. 앞에서부터 하나씩 다시 짚어가며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313호 / 2015년 10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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