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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

기자명 이미령

사랑이란 세월 흐름에 변할 순 있지만 늙진 않는 것

'콜레라 시대의 사랑1'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송병선 옮김
민음사
한때 사람들은 변심한 애인을 앞에 두고 이렇게 따졌습니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하지만 정답은 “사랑은 변하는 거야”였고, 이 말은 광고문구로 등장해서 꽤 많은 호응을 불러 모았습니다.

사랑은 변한다. 세상 모든 것이 덧없기 짝이 없는데 사랑이라고 별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랑은 변하는 겁니다. 이건 진리입니다. 그런데 이것 하나만큼은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은 늙지 않습니다.”

세월이 늙고, 사람이 늙고, 시대가 늙어도 사랑은 늙지 않습니다. 그걸 세월로 증명해보인 이가 바로 플로렌티노 아리사입니다.

무려 51년하고도 9개월 4일…. 그 긴 세월 동안 조금도 늙지 않고 조금도 낡지 않고 조금도 시들지 않은 것이 페르미나 다사를 향한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사랑이었습니다. 이 징하도록 질긴 사랑을 그려낸 작가가 바로 ‘콜롬비아의 세르반테스’라 불리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1927~2014)입니다. 그의 작품 ‘콜레라 시대의 사랑’ 속에서 두 연인의 사랑은 그 긴 세월을 버텨냅니다.

마르케스는 23년 동안 생각하고 18개월에 걸쳐 집필하여 1967년에 발표해서 온 세상이 소설 읽는 재미에 폭 빠지게 만든 ‘백년의 고독’의 작가입니다. 그러고 보니 마르케스의 작품을 읽으려면 일단은 ‘좀 살아본 사람’이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의 작품들은 세월을 무기로 하기 때문입니다. ‘백년의 고독’도 23년 동안 구상했다고 하질 않나, 오늘 소개할 ‘콜레라 시대의 사랑’도 51년…이라는 숫자가 버젓하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선박회사 사장의 아들이면서도 거의 사생아와 다름없이 자라나야 했던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우체국에서 일하는 소심한 청년이었고, 페르미나 다사는 노새 장사꾼으로 돈을 모은 뒤에 신분상승의 기회를 엿보고 있는 홀아버지 슬하에서 자란 처녀입니다.

어느 날 전보 심부름을 하러 페르미나 다사네 집에 들른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책을 읽는 낭랑한 음성을 듣게 되고, 무심코 그 목소리의 주인을 찾다가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칩니다.

한 순간에 사랑에 빠진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매일 아침 7시면 페르미나 다사가 늘 지나다니는 조그만 공원의 아몬드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시집을 읽는 척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쓰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바람대로 숙녀 수업을 받고 있던 페르미나 다사는 애송이 청년의 들뜬 연애편지에 속을 태울 그런 여자가 아니었지요. 아무리 기다려도 답장 한 줄 받지 못하자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그만 속을 태우다 몸져눕습니다. 상사병인 거지요. 열을 내며 끙끙 앓자 그런 아들을 초조하게 지켜보던 어머니는 혹시 콜레라가 아닌지 의심까지 하게 됩니다.

하지만 천만다행하게도 페르미나 다사의 맘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이제 두 사람의 순수한 연애편지 교환은 속도를 냅니다. 결국 어린 그들은 사랑의 언약까지 하게 되지요. 그러다 소녀의 아버지가 딸의 비밀연애를 알아차리고 진화에 나섭니다. 그 도시에서 최고로 유서 있는 집안의 청년과 결혼시키는 것이 꿈인데 아비가 누군지도 모르는 우체국 견습 사원이라니요.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소리입니다.

아버지는 그날로 가산을 정리하고 딸을 데리고 여행에 나섭니다. 고단하고 험한 노새 장사꾼들과 함께 한 이 여정 끝에 페르미나 다사는 다른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아버지의 과보호 속에서 꿈만 꾸던 소녀에서 어머니의 빈자리를 대신해 집안 모든 일을 처리하는 의젓한 숙녀로 바뀐 것입니다. 아버지는 딸의 변화를 확인하고 다시 예전 집으로 돌아옵니다.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마음은 한결같았지만 페르미나 다사는 변했습니다. 다시 사랑의 불을 지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럴 마음도 별로 없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콜레라 증세를 보이던 열여덟 살의 그녀는 스물여덟 살의 젊은 의사 후베날 우르비노 박사의 왕진을 받게 되고, 박사는 페르미나 다사의 도발적이면서도 고혹적인 매력에 빠져 앞뒤 재지 않고 애정공세를 벌입니다. 결국 페르미나 다사의 남편은 플로렌티노 아리사가 아닌, 그녀 아버지가 그토록 꿈꾸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후베날 우르비노 박사였습니다.

사랑의 패배자가 된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콜레라와 같은 지독한 고열에 시달린 뒤에 그녀를 평생 마음속에 품고 살기로 결심합니다.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마음속에는 페르미나 다사뿐이고, 페르미나 다사의 마음속에는 남편 후베날 우르비노 박사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지고지순한 아내를 향한 후베날 우르비노 박사의 애정은 이내 식어버립니다. 몰래 다른 여인과 밀회를 즐기게 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족 집안으로 시집을 가서 흠 잡히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며 후덕한 아내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던 페르미나 다사는 그 도시에서 인정받는 귀부인으로 거듭납니다. 남편과 함께 주요인사로 도시의 큰 행사에 등장하는 페르미나 다사를 지켜보는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마음은 편치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향한 사랑을 거듭 확인하고, 그리고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순결을 지킵니다.

순결을….

순결을 지킨다는 이 대목에서 혹시라도 소설을 읽어본 사람들은 풉~하고 웃어버릴 수도 있겠습니다. 그는 첫사랑 여인을 향한 애정을 지키기 위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여인과 정사를 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일정을 조목조목 노트에 기록하였으니 622번의 사랑이 그의 생애에 이어집니다. 그래도 이렇게나마 첫사랑을 마음속에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었다니 그러면 된 겁니다.

▲ 일러스트=강병호 화백

그렇게 51년하고도 9개월 4일 동안 사랑의 순결을 지켜온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어느 날 기쁜(?) 소식을 듣게 됩니다. 첫사랑을 빼앗아간 후베날 우르비노 박사가 앵무새를 잡으려고 사다리에 올랐다가 떨어져 죽었다는 소식입니다. 이제 페르미나 다사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스페인 식민지배가 끝나고 보수파와 진보파가 세력다툼을 벌이는 시대의 격변기임에도 불구하고 구시대의 유물인 귀족집안의 명망에 먹칠을 하지 않으려 노심초사 애를 쓰던 페르미나 다사는 70대 할머니가 된 후에야 자신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다시 한 번 사랑의 불을 지핍니다. 다시는 실패하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천천히 ‘귀족이 되어버린 옛 연인’에게 다가갑니다.

남편의 죽음 이후에 페르미나 다사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됩니다. 신분상승한 신데렐라로서 남의 눈치만 보고 남을 위해서만 살아왔던 그녀는 평생 쇼윈도부부로서 지내오는 가운데 자기가 하고 싶었던 것을 자기 의지대로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그녀는 다 늙어 과부가 된 자신의 집에 들락거리는 플로렌티노 아리사를 통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자신의 본래 모습을 되찾게 됩니다. 이성과 지성의 저 깊은 우물 바닥에 웅크리고 있던 뜨거운 열정이 그제야 기지개를 펴게 된 겁니다.

하지만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녀의 자식들은 70대 늙은 남녀의 만남을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저들의 생각에 사랑이란 젊은이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요, 늙은이의 사랑은 노망나고 주책이며 남 보기 부끄러운 추잡한 짓일 뿐입니다.

중년의 딸자식은 이렇게 비난합니다.

“우리 나이에 사랑이란 우스꽝스러운 것이지만, 그들 나이에 사랑이란 더러운 짓이에요.”

평생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밖에서 주어지는 가치에 따라 행동하며 자신의 본모습을 감추며 지내야 했던 페르미나 다사에게 이런 자식들의 비난은 하나의 전환점이 되어버립니다. 이제는 더 이상 남을 위한 삶을 살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일흔 두 살의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일 세기 전에는 우리가 너무 젊다는 이유로 그 불쌍한 남자와 날 괴롭히더니 이제는 너무 늙었다는 이유로 그러는군.”

본능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기로 작정한 페르미나 다사입니다. 그런 그녀에게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배를 타고서 강을 여행하자’고 제안합니다. 인간의 규범이 미치지 않는, 이 강둑과 저 강둑 사이를 흘러 다니는 여행, 전통과 규제라는 딱딱한 대지가 아닌, 유연하게 흐르는 강물 위에 두 사람은 몸을 맡깁니다. 천천히 강을 따라 내려갔다가 다시 강을 따라 올라오는 소박한 일정이지만 51년하고도 9개월 4일 동안 속만 태우다 다시 만나고 그로부터도 주변 시선에 얽매여 속절없이 발만 구르는 시간을 보낸 두 사람은 여객선 안에서 몸을 섞습니다.

머리는 다 빠지고, 치아마저 빠져 틀니를 해야 하고, 젖가슴은 짜부라지고 배에는 탄력이 없으며, 팔다리가 뻑뻑해져 움직이기가 영 힘들고, 노인네 냄새가 풀풀 나는 두 사람은 그렇게 사랑을 맺습니다. 정사는 싱겁기 짝이 없었고 딱 그렇게 끝이 납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그게 현실인 것이지요. 70대에 접어든 노인들의 사랑은 그런 것입니다. 아니, 그런 것인가 봅니다. 두 사람은 세상의 방해를 받지 않고 사랑의 행각을 계속 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 유일한 방법은 노란 깃발입니다.

“이 배에 콜레라 환자가 타고 있다”는 징표인 노란 깃발을 내걸고 두 사람은 강을 오르내리기로 결심합니다. 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하겠다는 말인가요? 이에 대해 53년 7개월 11일의 낮과 밤 동안 준비해온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우리 목숨이 다할 때까지.”

사랑의 유효기간이 궁금하십니까? 남의 눈치 보는 사랑이 아닌 진정 자신의 사랑은 유효기간이 없습니다. 굳이 정한다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이겠지요.

마르케스의 작품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70대 노인들이 첫사랑을 마침내 이룬다는 줄거리는 좀 식상합니다만, 그래도 이들의 사랑이야기는 팔팔합니다. 청춘을 살아보기도 전에 낡아버린 젊은이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진한 사랑이야기입니다.

죽음을 불러왔던 콜레라 시대. 그런 시대도 너끈히 이겨내야 진짜 사랑이라 부를 만하지 않을까요.

이미령 cittalmr@naver.com 

 

[1313호 / 2015년 10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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