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6. 허련, ‘완당난화’

기자명 조정육

오늘 심은 자비 씨앗이 진리 꽃 되어 세상을 물들이리

▲ 허련, ‘완당난화’, 19세기, 종이에 연한 색, 26.5×12.9cm, 국립중앙박물관.

팔자다. 말려도 소용없다. 고생해도 상관없으니 그 길을 꼭 가겠다는 사람을 보면 흔히 하는 소리다. 나의 경우만 봐도 그렇다. 나 또한 평생 글만 생각하고 살았다. 시인을 보면 두근거렸고 시집을 펼치면 설레었다. 글이 되겠다 싶으면 밥을 먹다가도 메모를 했고 만질수록 반질반질해지는 문장을 보면 정신 줄을 놓은 듯 히죽거렸다. 이런 자신을 보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팔자다. 정말 못 말리는 팔자다. 이름을 얻고 얻지 않고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내가 만족할만한 글을 쓰면 충분하다. 글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지독했는지는 죽음을 경험할 때 확인했다. 3년 전 뇌종양 판정을 받았을 때였다. 수술 결과는 반반이라는 말을 의사에게 들었는데 내 마음도 반반이었다. 죽어서도 나는 글을 쓰고 있겠지. 운 좋게 살아난다면 죽음을 직접 체험한 사람으로서 그 경험담을 쓸 수 있으니 얼마나 생생할까. 죽으나 사나 남는 장사였다. 글 쓸 생각에 병의 심각성은 잊어버렸다. 내가 얼마나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식구들의 반응을 보고서야 알았다. 그 당시 나의 모습은 꼭 해외여행을 앞둔 사람처럼 들떠 있었다고 한다. 너무 심한 충격으로 정신이 이상한 줄 알았단다. 삶과 죽음이라는 불가항력도 글을 잡고 있으면 돌파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순히 아는 단어를 나열하는 글이 아니라 철학과 수행과 통찰력이 수반되는 글이라면 죽음이라도 막지 못할 것 같았다. 전생으로부터의 습(習)일 것이다.

나에게는 글이 팔자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음악이 팔자일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가르치는 것이 사업이 그림이 팔자일 테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사기치고 음해하고 끝없이 욕망하는 것이 팔자일 것이다. 어떤 팔자든 자신이 있기 전보다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놓을 수 있다면 밀고 나가도 좋은 팔자다. 사람마다 편견이 있다. 유달리 선호하는 분야가 있고 때론 편벽되게 치우친 경우도 있다. 나의 경우는 특별히 글을 남긴 사람에 대한 존경심이 가장 크다. 존경심을 넘어 숭배에 가깝다. 불기 2559년의 역사 동안 부처님의 뛰어난 제자는 하늘의 별처럼 많다. 그 많은 별 중에서 이번 연재에 선정된 48명의 제자는 거의 자신의 저작물을 가지고 있거나 제자들에 의해 그의 사상이 전달된 경우다. 아무리 위대한 선사의 가르침이라도 문자를 통해 전해지지 않는다면 후대 사람들은 알 수가 없다. 서산대사(西山大師,1520~1604)를 선정하게 된 배경도 저서인 ‘선가귀감(禪家龜鑑)’이 있기 때문이다.

처음 연재를 시작할 때는 부처님의 생애만 쓸 예정이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일이다. 과유불급임을 알면서도 굳이 부처님의 가르침과 조사들까지 연재 범위를 확대시킨 이유는 다음의 문장 때문이었다.

“선의 등불(禪燈)은 가섭의 마음에 켜시고, 가르침의 바다(敎海)는 아난의 입에 부으셨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모든 것이 결정됐다. 부처님이 밝힌 진리의 등불이 2559년의 세월을 건너 우리 집 안방까지 붙여졌다. 팔만대장경을 가득 채운 부처님의 가르침이 내 마음속에서 바다처럼 출렁거렸다. 어둠속에 빛나는 환한 불빛은 신기루처럼 황홀했다. 출렁거리는 바다와 황홀한 불빛에 취해 이끌리듯 오다 보니 불법승 삼보가 되었다. 가섭의 마음에 켠 선의 등불과 아난의 입에 부으신 가르침의 바다를 직접 손으로 만져보고 싶다는 열망이 수준미달의 글쟁이를 겁 없이 여기까지 오게 했다.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문장의 출처가 바로 ‘선가귀감’이다.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선가귀감’ 지은 서산대사
선종 핵심 뽑아 요약정리
각 구절마다 주해 달기도

서산대사는 법명이 휴정(休靜,1520~1604), 호는 청허(淸虛)다. 묘향산에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묘향산인(妙香山人) 또는 서산대사(西山大師)라 부른다. 15세에 과거시험에 낙방한 후 불교를 공부하고 5년 동안 교리에 심취하다 불문에 들었다. 29세 때인 1549년 승과 합격을 시작으로 대선(大選)을 거쳐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었다. 서산대사는 36세 때인 1556년에 출가의 본뜻이 입신양명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혼자 미륵봉 아래에서 살다 어느 날 밤 산에 달이 떠서 천지가 환한 것을 보고 문득 깨우쳤다. 그 후 금강산·태백산·오대산·묘향산 등지를 돌아다니며 보임(保任)과 후학 지도에 전념했다.

‘선가귀감’은 서산대사가 1564년 여름에 50여 종의 불교서적에서 선종과 관련해 꼭 필요한 내용을 뽑아 편집한 책이다.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한 교재로 제작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왜 이런 교재가 필요했을까. 불교를 처음 공부하는 사람들은 자칫 방대한 팔만대장경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종지를 놓칠 수가 있다. 그럴 때 핵심을 간추려줄 수 있는 스승의 지도가 필요하다. ‘선가귀감’은 그 용도로 제작한 편저다. 선종에 대한 내용 중 핵심만 뽑아 요약 정리한 책이니만큼 입문과정생이 아니라 졸업생들이 ‘파이널 코스’에서 봐야 할 책이다. 어느 정도 공부가 된 사람이라면 교재만 봐도 알 수 있지만 초심자는 다르다. 교재를 봐도 모르겠다고 어려움을 호소하는 제자가 속출했다. 서산대사는 다시 각 구절마다 주해를 달아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선가귀감’은 주해가 백미다.

서산대사는 금강산 백화암에서 ‘선가귀감’의 서문을 썼다. 그 후 묘향산에서 10여년 동안 학인들을 가르치는 교재로 사용하면서 필요한 부분을 손질하고 첨삭했다. 완벽한 강의교재다.

서산대사는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의 부름을 받고 전국에 격문을 보내 승군을 조직해 왜적에 대항했다. 난이 평정된 후 여러 곳을 순력하다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했다. 세수 85세, 법랍 67세였다. 서산대사는 입적하기 전에 자신의 영정을 꺼낸 후 다음과 같이 말했다.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

연로한 선비가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정자관(程子冠)을 쓰고 심의(深衣)를 입고 반듯하게 앉아 붓을 들었다. 휘어진 등 뒤로 신산스러웠던 삶이 아득하게 떠 있다. 오만하고 분노하고 그리워하고 후회하면서도 결코 읽고 쓰기를 멈추지 않았으니 이젠 붓을 통해 세상으로 향하려는 생각을 놓아줄 때가 되었다. 늙은 선비는 침침한 눈으로 종이를 내려다보며 또박또박 글씨를 써내려간다. 오랜 시간 붓을 들고 글씨를 쓰는 일은 쉽지 않다. 천 개의 붓을 닳게 하고 열 개의 벼루를 구멍 낼 정도로 거듭된 연습이 있어 가능하다. 그는 지금 글씨를 잘 쓰기 위해 붓을 들지 않았다. 이젠 글씨의 외형과 형식은 잘 훈련된 말처럼 그가 원하는 대로 따라온다. 중요한 것은 생각이다. 머릿속에서 오랫동안 궁굴리며 다듬고 덜어내고 채우고 교체했던 단어들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다. 어렸을 때부터 신동이란 소리를 듣고 자란 그였다. 여기에 엄청난 독서량이 더해졌으니 글쓰기가 뭐 그리 어려울까. 스스로를 다독거려도 여전히 단어에 대한 허기와 갈증은 채울 수가 없다. 적합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차선책으로 준비한 단어를 쓰면 된다. 그러나 차선은 차선일 뿐이어서 결코 우선이 될 수 없다. 우선의 경지에 올라보지 못한 차선의 단어로 우선의 세계를 보여줘야 하는 불가항력. 결핍감과 공허함이 납덩이처럼 무겁게 가슴을 짓누른다. 그만 두고 싶지만 그만 둘 수도 없다. 매순간 자포자기의 심정에 사로잡히지만 글과 함께 살아왔으므로 도망갈 수도 없다. 도망은 삶을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저항할 수 없다 해도 마지막 순간까지 글을 쓰며 살아야 하는 것이 글 쓴 자의 숙명이다. 노인은 다시 붓을 들고 멈추었던 지점부터 쓰기 시작한다.

‘완당난화(阮堂蘭話)’는 소치(小癡) 허련(許鍊,1808~1893)의 작품이다. 소치는 스승 완당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난 치는 법에 관해 쓴 글을 베끼면서 처음과 마지막 면에 인물과 산수를 각각 그려 넣었다. 그림 속 인물이 김정희라는 부연 설명은 붙이지 않았다. 스승에 대한 마음이 극진했던 소치가 스승의 글을 필사한 만큼 김정희일 것으로 추정된다. 김정희 주변에 있는 소품들은 그의 생활을 말해준다. 선비의 필수품인 문방사우와 화로 위의 주전자, 매화 심은 화분과 수선화가 전부다. 그가 무엇을 하고 어떤 취미생활을 했는지 알 수 있다. 매화는 선비들이 좋아하는 사군자다. 방에 놓인 이유가 이해된다. 뿌리를 드러낸 수선화는 왜 그렸을까. 김정희는 수선화를 사랑했다. 그는 겨울을 견디고 꽃을 피우는 수선화를 ‘그윽하고 담담한 기품이 냉철하고 빼어나다’고 찬탄했다. 김정희의 그림과 글씨를 탁본한 ‘완당탁묵(阮堂拓墨)’에는 그가 그렸다는 수선화 그림이 실려 있다. 그가 수선화를 사랑한 이유는 간단하다. 꽃이 사랑스러워서다. 사랑스러운데 당차기까지 하다. 그 여린 꽃잎으로 한겨울 추위를 견뎌낸다. 수선화는 12월에서 3월 사이에 개화한다. 김정희는 수선화를 보면서 겨울 추위 같은 제주도 유배를 견뎌야겠다고 다짐했으리라. 스승의 마음을 아는 제자가 굳이 수선화를 그려 넣은 이유다.

화로 위에 끓고 있는 주전자의 물은 오랜 시간 차와 함께 살아온 김정희의 일상을 보여준다. 찻잔은 벼루 옆에 하나, 화로 옆에 두 개다. 스승과 제자는 보글보글 끓는 물을 부어 차를 마시며 난 치는 법에 대해 묻고 답하리라.

‘완당난화’는 일기 같은 그림이다. 수선화를 사랑하고 차를 마시고 그림을 그리는 김정희의 일상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드러난다. 19세기를 살았던 선비의 일상을 가감 없이 보여준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진정으로 이 그림이 가치 있는 것은 김정희의 기록정신에 있다. 그는 자신이 평생 연구하고 사유한 학문의 세계를 후학들을 위해 기록했다. 그가 난 치는 법에 대해 쓴 글은 단순히 한 개인의 기록을 넘어 당시까지 논의되던 난화에 대한 총정리라 할 수 있다. 대나무의 마디에 해당된다. 마디가 있어야 그 위에 또 다른 공간이 형성된다. 내가 오늘 마디 하나를 형성하면 누군가 다른 사람이 나타나 내 마디 위에 또 다른 마디를 덮을 것이다. 그러면서 대나무는 위로 치솟고 높이 자란다. 학문도 사상도 예술도 그렇다.

수행자는 수행을 해야 수행자다. 자신이 수행한 결과를 진리에 목말라하는 중생들과 시방삼세에 아낌없이 회향하는 것은 자비심이다. 부처님의 전법도 자비심에서 출발했고 서산대사의 집필도 자비심에서 시작됐다. 우리 시대를 사는 수행자들도 책과 신문, 인터넷 매체 등을 통해 중생들에게 조금 더 적극적으로 자비심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불은(佛恩)을 입어 진리를 깨우쳤으니 법공양으로 그 은혜를 나누어주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팔자라서 글을 쓰는 게 아니다. 글은 과거로부터 내려온 정신을 후세에 전해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받는 만큼 돌려줘야 하지 않겠는가.

조정sixgardn@hanmail.net

[1313호 / 2015년 10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