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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논산 관촉사 보살입상

기자명 신대현

대중 향한 고려불교 관음신앙이 빚어낸 부처님

오랜 시간 동안 이어져온 인류의 미(美)를 향한 추구를 기차여행으로 표현해 본다면 한 시대의 양식(樣式, Style)은 중간 역으로 비유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선사시대부터 떠나온 머나먼 여정 동안 우리는 삼국, 고려, 조선이라는 이름의 역을 차례로 지나와 지금은 현재라는 역을 지나치고 있다. 한참을 가다가 역에 내려 잠시 숨을 고르면서 지나온 여행을 되돌아보면 그 때까지의 경험은 가슴과 머리에 담겨 추억으로 간직된다. 그리고 또 다시 다른 역을 향해 떠나면서 새로운 경험을 하고 안목도 기르게 될 것이다. 이처럼 여행(미의 추구)이 새로움을 찾는 과정인 것처럼, 미 역시 하나의 양식(중간 역)에 머무르지 않고 늘 새로운 형태(경험)로 바뀌기 마련인 것 같다. 미의 추구란 바로 이런 이치가 담겨 있어 오랜 세월을 지내오며 각각의 시대마다 그 시기에 걸맞은 양식이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에 고정되지 않고 전체를 유연하게 바라보려는 관점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한 양식을 다른 양식에 비교해 그 우월을 따지려는 건 부질없는 일 같다. 여행 중에 만나는 고장마다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는 것처럼, 양식 역시 시대마다의 고유한 의미를 갖고 나타나는 것이라서 그들 사이에 우월하고 열등한 차이는 없기 때문이다.

고려 건국 50년 뒤 968년 조성
보관 위에 사각형 보개와 풍탁
고려불상 고유양식 시초격 불상

법당 아닌 야외 전제로 제작돼
체구에 비해 커다란 상호 독특
보다 많은 대중들의 향유 의도

아미타불 정대와 연꽃가지 등
관음보살 추정되는 근거 다수

시대의 고고함, 뛰어난 예술성, 학술적 가치 같은 조건들을 떠나서 그냥 우리에게 친근하게 느껴지고 바라보면 마음이 편해지는 그런 불상(보살상을 포함하여)을 꼽으라면 어떤 작품들이 떠올려질까? 서산 마애불, 석굴암 여래좌상, 갓바위부처님 등의 이름이 금세 입가에 맴돌 것 같다. 만약 설문조사를 한다면 앞서 말한 불상들 외에 순위 10위 안에 꼭 들 것 같아 보이는 고려시대 불상은 아마도 논산 관촉사 보살입상일 것 같다. 그만큼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고 또 고려 불상 중에서 가장 대표적 작품으로 꼽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 관촉사 관음보살상 얼굴 세부 모습.

이 상은 고려가 건국한지 꼭 50년 뒤인 968년에 만들었다고 전한다. 이 무렵이면 신라와는 다른 고려만의 분위기가 정착되어 나가던 시기이고, 실제로 이 상부터 고려 불상의 고유한 양식이 뚜렷하게 묻어나오기 시작한다. 고려에서 가장 이른 작품 중 하나라는 것 외에, 높이 18미터나 되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불상’이라는 타이틀도 갖고 있다. 고려 불상의 특징 중 하나가 이처럼 거상(巨像)이 많다는 점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새로운 왕조의 권위를 나타내려 한 것, 일정한 계층이 아니라 많은 대중에게 불교를 전파하려는 경향에 따른 것 등 여러 해석이 나와 있다.

▲ 논산 관촉사 관음보살상 정면.

이 보살상을 보면 누구나 커다란 얼굴과 머리 위에 쓰고 있는 원통형의 높은 관(冠)에 눈길이 먼저 간다. 보관 위에 이중의 사각형 보개(寶蓋)가 올라가 있고 보개의 네 모서리에 청동으로 만든 풍탁(風鐸)이 달려 있는 점도 색다르다. 통일신라시대까지는 보개가 달린 관을 쓴 불상이 아주 드문데, 고려에 들어와서는 이 같은 불상이 자주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관촉사 보살입상은 보개가 있는 보관을 쓴 불상 유행의 서막을 알리고 있는 작품이다. 보개에 풍탁을 단 것도 고려에 와서 비롯된 새로운 유행으로, 석탑의 옥개석 네 모서리에 풍탁을 다는 풍습이 불상으로 이어져온 것으로 보인다. 체구에 비하여 얼굴이 아주 큰 편인데, 이에 대해 대부분 학자가 비례감을 잃었다고 지적한다. 또 ‘불상의 몸이 거대한 돌을 원통형으로 깎아 만든 느낌을 주어 대형화된 신체에 비해 조각수법은 이를 따르지 못하고 있다’고 혹평하기도 한다. 그런데 고려의 불상은 부분적 성취보다는 불상이 주는 전체적 효과와 조화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관점을 달리해 보면 이런 표현을 이해할 수 있다. 관촉사 상을 비롯해 고려시대에 유행한 거상은 처음부터 법당 안이 아니라 야외에 놓이는 것을 전제로 한다. 다시 말해서 제한된 건물보다는 누구나 가까이 갈 수 있고 또 먼발치에서도 바라볼 수 있도록 트이고 막힘없는 공간을 선호했다. 가장 멀리 그리고 잘 보이도록 얼굴을 비례에서 벗어나서 일부러 크게 만든 것이다. 이는 곧 보다 많은 대중들이 향유하기를 의도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상호 외에 간략한 옷 주름이나 부분 묘사가 많이 생략된 점을 흠이라고도 하지만, 이 역시 소박하면서 굳센 고려 초의 사회분위기가 그대로 반영된 것 같다.

▲ 부여 대조사 보살입상.

관촉사 보살입상이 고려시대 불상 조각의 주요 흐름을 주도했다는 점은 이후 이와 양식적으로 비슷한 작품들이 잇달아 나타난 것을 봐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부여 대조사 보살입상은 작풍(作風)이 관촉사 상의 그것과 아주 닮았다. 대조사 상 역시 높이 10미터로 고려시대에 유행한 거상의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다. 머리 위에 이중의 보개를 얹은 네모난 관(冠)을 쓰고 있는 점, 보개의 네 모서리에 작은 풍탁이 달려있는 점 그리고 보관 밑으로 머리카락이 짧게 내려져 있는 점까지 관촉사 상과 같은 패턴이다. 다른 점은 관촉사 상의 얼굴이 기다란 달걀형인데 비해 대조사 상은 비교적 사각형에 가깝고, 관촉사 상이 두 눈과 귀가 아주 큼직하고 코나 입도 선명하고 뚜렷한 각선으로 조각되었지만 대조사 상은 이런 부분이 다소 작게 표현된 점이 다르다. 그래도 연꽃가지를 잡고 있는 두 손의 모양이라든지 옷 주름선의 기본 패턴 등은 분명히 많이 닮았다. 그래서 관촉사 상이 나타나면서 이후 작품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이 관촉사 상은 우리 불교미술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품인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 동안 학계에서는 고려시대 불상의 양식을 저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관촉사 보살입상에도 ‘토속화 된 양식’, ‘지방화 된 양식’ 등의 듣기에 따라서는 약간 낮춰보는 어감을 주는 수식어가 따르곤 한다. 그런데 이런 견해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전국을 경향(京鄕), 곧 서울과 지방으로 파악하려는 것은 중앙이 좋고 지방은 상대적으로 낙후되었다는 어감을 주는데다가, 이미 사라진 신라를 아직도 ‘중앙’으로 인식해 이런 용어를 쓴 것 같기도 해서다. 고려의 미술은 나름의 미의식과 기준이 있고 그것이 삼국이나 신라와 ‘다를’ 뿐이지 ‘좋고 나쁨’의 문제는 아니다. 이런 선입감으로 인해 관촉사 상이 고려라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불상 양식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던 작품으로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다.

관촉사 석불입상을 양식적 측면으로 보는 것도 필요하고 또 이 상의 정체성(正體性)을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 그 존명(尊名)이 무엇인지 아는 것도 중요하다. 흔히 ‘은진 미륵’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리듯 미륵보살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렇게 보는 데는 아마도 머리 위에 쓴 사각형 보개가 달린 높다란 보관을 갖고 판단해 그런 것 같다. 미륵보살상이 이런 모습의 보관을 쓰고 있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그것이 꼭 미륵보살상만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갓바위부처님’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대구 팔공산 약사불좌상도 통일신라시대 작품이지만 둥근 갓 형태의 보관을 쓰고 있다. 미륵보살 외에 관음보살상으로 추정할 근거가 있다. 관음보살상의 가장 큰 특징은 보관 중앙에 아미타여래상을 새긴다는 점으로, 이를 ‘정대(頂戴, 머리에 이고 있음)한다’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바로 앞에 있는 ‘관촉사 사적비’에 이 상 위에 ‘3척 5촌 되는 작은 금불상이 있다(小金佛三尺五寸)’라는 기록이 있어서, 비록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본래 보관 맨 위에 여래상을 정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을 입증하는 이야기도 있다. 근대까지만 해도 높이 90센티미터의 금동불상이 관촉사 보살상의 높다란 보관 위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초에 일본인들이 이 보살상 뒤편에 있는 언덕에 올라가 보살상을 향해 면포(綿布)를 던져 걸쳐놓은 다음 그것을 타고 보관 위까지 올라가서 금동불상을 가져갔다고 한다. 실제 이 보살상 보관 꼭대기에는 둥근 구멍 세 개가 같은 간격으로 뚫려 있다. 금동불상을 고정했던 장치였을 것이다. 관음보살상으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근거는 연꽃가지를 쥐고 있는 점이다. 앞서의 사적기에도 ‘연꽃가지 길이가 11척이다(蓮花枝十一尺)’라는 표현이 있고 또 현재도 기다란 연꽃가지를 들고 있다. 화불(化佛)로서 아미타여래를 정대하고, 연꽃가지를 들고 있는 점은 관음보살상의 고유한 특징 두 가지이니, 이 상을 관음상으로 추정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는 셈이다.

관촉사 보살입상은 세부보다는 전체에, 일부 계층보다는 보다 많은 대중에게 다가가려는 고려 불상의 특징을 잘 표현한 작품이다. 어떤 사람은 균제미가 없고 세밀한 부분이 떨어진다고 혹평하지만, 마치 기차여행 할 때 역마다 느껴지는 색깔이 다르듯이 고려의 불상 역시 신라 불상에 비해 풍모가 다를 뿐이다. 토속적 혹은 지방 양식이라고 하는 것은 관점과 시각이 너무 신라시대에 매어있어서 고려 나름의 색깔을 외면한 탓이 아닐까 싶다. 그보다는 고려 건국 후 관음보살의 신앙을 배경으로 새로운 풍모로 조성된, 대중을 향한 고려 불교의 지향점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일찍이 황수영 박사가 말했듯이, ‘우리의 고대 조상사(造像史)에서 하나의 기념비적 작품’이 바로 이 관촉사 보살입상인 것이다.

신대현 사찰문화연구원 연구위원 buam0915@hanmail.net

  [1313호 / 2015년 10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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