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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조병화의 ‘해인사’

기자명 김형중

‘평등’, 소박한 어법으로 깨우치는 시

큰 절이나/작은 절이나
믿음은 하나
큰 집에 사나/작은 집에 사나
인간은 하나

불법은 본래 평등 가르침
크고 작음은 상대적일 뿐
아상이 부처·중생 가르니
아상 떠나면 그대로 부처

인간은 평등하다. 생명체를 지닌 중생은 모두가 그 가치가 절대적이고 평등하다. 대붕(大鵬)의 경지에서 보면 모두가 천하일색(天下一色)이다. 불법은 모든 생명과 중생이 본래가 평등하다는 가르침이다. 크다 작다 하고 비교 분별하는 것은 인간의 관념이다. 본래 큰 것과 작은 것이 따로 정해진 것이 아니다. 큰 것은 작은 것을 대상으로 상대적으로 클 뿐이다. 작은 것 또한 큰 것을 대상으로 상대적으로 작을 뿐이다.

번뇌망상과 우비고뇌가 내가 잘 났다 못났다고 하는 차별심과 내가 크다 작다고 하는 분별심에서 생겨난다. 나라고 하는 아상(我相)과 아만이 부처와 중생을 가르는 기준이다. 아상을 떠나면 그대로 부처가 된다. 이상불(離相佛)이다.

부처와 불법에 대한 믿음은 벼슬이 높다고 해서 크고, 가난한 서민이라고 해서 약한 것이 아니다. 해인사처럼 큰 절에 가야 부처를 만나서 믿음이 크고, 작은 암자에서 기도한다고 믿음이 작은 것이 아니다. 부처님 재세시에 가난한 난타여인이 부처님께 바친 등불은 밤새도록 타올랐고, 국왕을 비롯한 고관대작의 등불은 바람에 모두 꺼진 일화가 생각나는 시이다.

사람이 큰 집에서 잘 살아야 훌륭한 인간, 성공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다. 빈부귀천의 불평등이 우리의 삶을 소외시키고 고통스럽게 한다. 작은 집에서 가난하게 살아도 참된 마음을 가지고 인간답게 살아가면 훌륭한 사람이다. 재물이나 지위에 의해서 인간의 삶이나 품격이 규정되고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종교에서의 믿음은 더욱 그렇다.

해인사는 우리나라 삼보사찰 가운데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하여 모신 팔만대장경을 봉안하고 있는 법보사찰이다. ‘해인사’는 평등의 개념을 소박한 어법으로 그 정곡을 찔러서 깨우침을 주는 시이다. 큰 것에 함몰되고 소외되고 있는 현대사회 자본주의 형태에 대하여 점잖게 충고를 하는 품위와 교양이 있는 시이다. 큰 교회나 큰 절에 가서 기도해야 기도발이 서는 건 아니다. 큰 것과 유명한 것에 허상이 많다. 큰 것이 작은 것을 모두 빨대처럼 흡수해 버리는 세상이다. 산모퉁이에 자리 잡은 들꽃 같은 작은 산사가 마음의 편안함을 주고 구원을 주기도 한다.

시인이 대가가 된 위치에서 보니 종교적인 신행과 믿음도 그렇고, 인간이 사는 것도 별 차이가 없다고 읊은 것이다. 큰 집에 산다고 극락 가고 천당 가는 것이 아니다.

좋은 시는 쉬우면서도 그 뜻이 깊고 묘해야 한다. ‘해인사’는 쉽고 간단한 시이지만 인생과 종교의 큰 뜻을 게시해 주는 시이다. 인간 평등이란 주제를 소박하고 담담한 어법으로 드러내서 환기시킨 시이다. 잘난 중생도 없고, 못난 중생도 없고, 모두가 평등한 부처(一佛)이고, 부처의 제자임을 읊은 격조 있는 시이다.

조병화(1921~2003)는 고교 교사에서 시작하여 대학교수로서 대한민국 예술원 회장을 역임하고, 시집을 35권이나 낸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모친 원행심(遠行心) 보살의 넉넉한 불심에 영향을 받아 부처의 세계를 시로 담담하게 노래하며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품위를 지키며 살다간 사람이다.

그의 시는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인생을 노래한 시가 많다. 그가 육십 환갑에 읊은 ‘나의 노래’는 그대로 ‘인생 무상가’이다. “인생은 구름 같은 것/ 이 산 저 산 떠도는 구름처럼/ 흘러온 세월/ 스쳐 지나가는 바람같이/ 어느덧 허공의 꽃 잡으러 달려온 세월/ 육십 년”

구름과 바람 그리고 허공의 꽃은 실체가 없이 잠시 머물고 떠나가는 공(空)을 비유하는 대표적인 시어이다.

김형중 동대부여중 교장·문학박사 ililsihoil1026@hanmail.net


[1314호 / 2015년 10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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