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전(傳) 이징, ‘연사모종도’
37. 전(傳) 이징, ‘연사모종도’
  • 조정육
  • 승인 2015.10.13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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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자는 어느 곳에 있든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 전(傳) 이징, ‘연사모종도’, 17세기, 견본담채, 103.9×55.1cm, 국립중앙박물관.

출판사 편집자를 만났다. 통일신라 탑에 대해 얘기를 하다 석가탑과 다보탑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자꾸 두 탑을 혼동했다. 나한테는 너무나 분명하게 구분되는 두 탑이 그 사람에게는 어려웠던 모양이다. 아니 두 탑이 이렇게 다른데 어떻게 헷갈릴 수가 있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문화재에 대한 애정이 부족한 것 같아 살짝 실망스러웠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도 마찬가지였다. 불법승 삼보에 대해 연재하면서 언제나 어려운 것이 띄어쓰기다. 특히 ‘~지’는 거의 매번 틀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령 ‘만난 지’와 ‘만났는지’는 띄어쓰기 용법이 다르다. ‘만난 지’처럼 시간의 경과를 나타날 때는 띄어 쓴다. ‘만났는지’처럼 의문이나 추측을 나타낼 때는 붙여 쓴다. 이론상으로는 그런데 막상 문장에 적용할 때는 금방 잊어버린다. 두 가지 사용법을 구분하지 못하고 마구 섞어서 원고를 써서 보내면 담당기자가 곧바로 지적해준다. 친절한 설명과 더불어. 설명 들을 때는 정확히 이해한다. 다음 주 원고를 쓰기 전날까지만. 그러기를 벌써 3년이 흘렀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띄어쓰기에 대해 지적을 받고 있다. 3년 동안 줄기차게 틀리게 쓴 원고를 보내는 나의 둔함도 대단하지만 그때마다 포기하지 않고 매번 설명해주는 담당기자의 인내력도 대단하다. 아마 전생에 나한테 빚을 많이 졌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 승병 이끌고
여러 차례 승리 이끈 서산
선조가 환속을 권유했으나
종전 후 제자리로 돌아가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도 난제였다. 서산대사는 법명이 휴정(休靜)이고 사명대사(泗溟大師,1544~1610)는 유정(惟政)이다. 한자는 다르지만 한글 발음은 비슷하다. 어디 그뿐인가. 두 분 삶의 궤적도 비슷하다.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 사이다. 두 사람 모두 왜적과 대항해 싸웠고 높은 지위에 올랐다. 공부가 깊지 않은 사람은 당연히 혼동할만하다. 변명 같지만 내가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를 혼동한 이유가 꼭 머리가 나빠서만은 아니란 뜻이다. 같은 시대를 살았고 같은 문제를 고민했으며 같은 해법을 실천하며 살았다는 데 더 큰 원인이 있다. 면피하려고 별의별 변명을 다 늘어놓는다.

사명대사는 법명이 유정으로 자는 이환(離幻), 호는 송운(松雲)이다. 당호가 사명당이라 흔히 존경의 뜻을 담아 사명대사라 부른다. 사명대사는 15세에 어머니가, 16세에 아버지가 연이어 세상을 떠났다. 부모의 죽음이 계기가 되어 가문이 영락(零落)하고 집안이 몰락함으로써 삶에 대한 근원적인 모색이 시작되었다. 그는 구경(究竟)의 법과 무루(無漏)의 학을 배우기 위해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한다. 출가 후 18세라는 빠른 나이에 승과(僧科)에 합격한다. 서산대사가 33세에 승과에 합격한 것을 감안하더라도 매우 빠른 나이였다. 그 후 직지사의 주지를 거쳐 31세에는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천거되었다. 그러나 그 자리를 사양하고, 묘향산의 서산대사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이 출발한 지점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자세는 삶에서 매우 중요하다.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서산대사의 가르침을 “법의 은혜는 하늘과 같고 입은 덕은 땅과 같다”고 표현했다. 그 후 스승과 헤어져 금강산 보덕암에서 3년을 보낸 후 팔공산, 청량산, 태백산 등을 다니면서 선을 닦았다. 43세 때는 옥천산 상동암(上東庵)에서 오도한 후 제자들을 가르쳤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7년 동안 왜적을 물리치는 데 전공을 세웠다. 연로한 서산대사가 승병을 모으는 상징적 구심점이었다면 사명대사는 전쟁을 수행하는 실질적인 업무를 맡았다. 불살생을 금과옥조로 한 불교 수행자로서 전쟁에 참여하는 데 갈등은 없었을까. 임진왜란이 발생할 무렵 조선은 붕당정치의 폐해로 민생이 도탄에 빠져 전쟁수행능력이 거의 없었다.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오는 왜적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사명대사는 자신의 삶 속에서 체득한 경지를 실질적으로 구현하려고 노력했다. 그 경지가 바로 자비심이었다. 처음에 사명대사는 왜적들을 타일러서 흉기를 쓰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의지를 세웠다. 고성에서 적장 3명을 만나 살생하지 말 것을 당부한 것도 그와 같은 이유에서다. 그러나 조선을 완전 정복하려는 왜군의 야욕을 알고 나서는 적을 설득하는 단계를 넘어 토벌하는 방향으로 참전을 결정한다.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제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비의 실천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시에서 ‘어육(魚肉)이 된 우리 백성/ 도로에서 송장이 서로 베고 누워 있네’라고 전쟁의 참상을 묘사한다. 이런 참상을 보고 어찌 외면할 수 있으랴. 그는 ‘통곡하고 통곡하니 날은 저물고 창창하다’라고 참담한 심정을 밝힌다. 그리고 일어선다. 단지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슬픔의 근원으로 향해 돌진한다. 그는 승병을 이끌고 여러 차례의 전쟁에 참여해 승리를 이끈다. 선조는 그의 전공을 높이 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했다. 이때 선조는 사명대사에게 환속을 권한다. 그러면서 만약 환속한다면 ‘마땅히 백리를 다스릴만한 책임을 맡길 것이오, 삼군의 장수를 제수할 것’이라고 제안한다. 이런 솔깃한 제안을 받은 많은 승군(僧軍)들이 환속의 길을 택했다. 그러나 사명대사는 왕의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한다. 그는 자신이 돌아갈 자리를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후 1604년 2월에 스승 서산대사가 입적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사명대사는 묘향산으로 향한다. 그런데 가는 도중 선조로부터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파견한다는 임명장이 도착했다. 그는 스승 곁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왕명에 따라 1604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8개월 동안 눈부신 활약으로 외교성과를 거두어 전란 때 잡혀간 3000여명의 조선인들을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했다. 그의 나이 62세 때였다. 이번 성과로 조선은 물론 일본에서조차 사명대사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높은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귀국한 사명대사는 헛된 이름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신의 갈 길을 분명히 직시했다. 오대산 묘향산을 찾아 비로소 스승의 영전에 머리 숙여 절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왕의 부름을 따라 산성 축조에 참여하는 등 세속적인 일에 관여하다 말년에는 해인사에 머물렀다.

1610년 8월26일이었다. 세상을 떠날 시간이 다가온 것을 안 사명대사는 스승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마음은 환(幻)을 만드는 환술사이고, 몸은 환의 성이며, 세계는 환의 옷이고, 이름과 형상은 모두 환의 밥이니,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내는 것, 거짓, 참 모두 환 아닌 것이 없다. 때문에 시작도 없는 환상 같은 무명이 본래 다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모든 환상은 실체가 없는 허공꽃과 같기에 환상이 없어지면 바로 그 자리가 부동의 경지이다.”

그의 자가 ‘환을 떠난다’는 이환(離幻)이듯 사명대사는 환을 떠나 부동의 경지에 들어갔다. 설법을 마친 사명대사는 환의 옷을 벗고 결가부좌한 채 조용히 입적에 들었다.

각이 진 흙 비탈(土坡) 위로 두 그루 소나무가 우람하다. 시선을 들어 낙락장송의 꼭대기까지 향하니 대각선으로 솟은 봉우리가 불안하게 서 있다. 봉우리 오른쪽 계곡은, 가라앉을 듯 자리한 서너 채의 초가집을 제외하면 텅 빈 여백이라 더욱 위태롭다. 위태로운 봉우리 정상에는 휘장처럼 안개가 걸렸다. 산봉우리를 휘감은 안개는 계곡으로 내려앉았다 솟구치기를 반복한다. 안개 때문에 주변 풍경이 수시로 바뀐다. 겹겹이 물러난 원경(遠景)의 봉우리들은 안개에 가려 보일 듯 말 듯 형체만 남았다. 사람의 발길을 쉽사리 허락할 것 같지 않은 깊은 산속이다. 화면의 대부분은 산과 나무와 언덕과 물로 채워져 있다. 멋진 풍경이다.

그런데 이 그림이 단순한 풍경화를 벗어나 활기를 얻게 된 것은 순전히 인물 때문이다. 붉은색 가사를 입은 스님이 다리를 건너고 있다. 손에는 석장을 짚고 조심스럽게 발을 앞으로 내딛는 스님의 등이 살짝 굽었다. 이 늦은 시간에 스님은 어디로 가는 걸까. 스님이 향한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겨보니 왼쪽 상단에 종각이 보인다. 절이다. 안개에 다리를 걸친 듯 아슬아슬한 절벽에 세워진 종각 안에는 둥근 종이 걸려 있다. 스님이 발걸음을 옮기는 내내 저녁 예불을 알리는 종소리가 계곡 사이로 울려 퍼진다. 해거름에 울리는 종소리는 육중하면서도 경건하다. 하루 위에 쌓인 번민과 망상을 털어내라는 듯 간절하면서도 무겁다.

‘연사모종도(煙寺暮鐘圖)’는 ‘안개에 싸인 산사에서 저녁 종소리가 울리는 풍경’을 그린 작품이다. 조선 중기의 화원 허주(虛舟) 이징(李澄,1581~1674 이후)의 작품이다. 이징은 16세기 대표적인 왕족출신화가인 이경윤(李慶胤)의 서자(庶子)로 서화에 능했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는데 오세창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에는 그의 어린 시절 일화가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다. 이징이 어렸을 때 다락에 올라가 그림 연습을 하고 있었다. 집안사람들은 그가 어디 갔는지 몰랐다가 사흘이 지난 뒤에야 찾게 되었다. 화가 난 아버지가 종아리를 치자 이징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새(鳥) 그림을 끝냈다. 그림만이 오직 그의 관심사였음을 알 수 있다.

이징은 전통적인 화풍인 안견파(安堅派) 화풍을 선호했다. ‘연사모종도’에서도 그 취향을 확인할 수 있다. ‘연사모종도’는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중의 한 폭이다. ‘소상팔경도’는 중국 호남성(湖南省)의 소수(瀟水)와 상강(湘江)이 만나는 동정호(洞庭湖) 주변의 절경을 8폭에 그린 그림이다. 처음에는 빼어난 경치를 그린 승경(勝景)을 대상으로 그려졌지만 나중에는 마음속의 이상향으로 사랑을 받았다.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조선에서도 초기부터 말기까지 지속적으로 많은 화가들이 즐겨 화제(畫題)로 삼았다.

특히 이징은 여러 점의 ‘소상팔경도’를 그렸다. 인조(仁祖)의 명으로 ‘소상팔경도’를 제작한 이후 여러 사대부들의 요청이 끊이지 않았다고 전해지는데 현재까지 남아 있는 작품도 여러 점이다. 현존하는 작품으로는 온전하게 8경을 모두 갖춘 화첩이 있다. 본래 병풍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 중 3폭만 남은 것, 그리고 원래의 형식을 알 수 없는 2점도 유존한다. ‘소상팔경도’는 아니지만 이와 유사한 형식의 ‘니금산수도(泥金山水圖)’도 현존한다. 오늘 감상한 ‘연사모종도’는 병풍으로 추정되는 3폭 중 한 점이다.

다시 ‘연사모종도’의 두 그루 소나무가 서 있는 근경으로 눈길을 돌려보자. 나무와 봉우리 등의 경물(景物)이 유난히 왼쪽으로 많이 치우쳤다. 무게가 한쪽으로 실린 편파(偏頗)구도다. 편파구도는 조선 전기에 활동한 안견이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에서 즐겨 사용했다. 전경에 뿌리가 드러난 소나무를 그려 중경으로 시선을 유도하는 구도도 안견의 특징이다. 이징이 안견 화풍을 매우 선호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연사모종도’에는 안견 화풍의 계승 못지않게 새로운 화풍도 발견할 수 있다. 안견의 ‘사시팔경도’가 원경(遠景)을 그렸다면 이징의 ‘소상팔경도’는 근경(近景)을 그렸다. ‘사시팔경도’가 전경과 후경의 이단(二段) 구도라면 ‘소상팔경도’는 전경과 후경 사이에 중경을 집어넣은 삼단(三段)구도다. 그만큼 복잡하고 그림 읽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소상팔경도’에서는 조선 중기에 유행한 새로운 절파(浙派) 화풍의 흔적도 확인할 수 있다. 중경에 사선으로 솟은 봉우리와 전경의 각이 진 바위에 보이는 흑백 대비가 심한 바위표현은 절파 화풍의 특징이다. ‘연사모종도’는 이징이라는 작가가 전통을 어떻게 소화했고 새로운 화풍을 어떻게 자기화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조선 후기의 문인 남태응(南泰膺)은 ‘청죽화사(聽竹畵史)’에서 이징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화가 집안에서 태어나 가업을 이어 받아 그 문호를 개척했고 각 체의 그림을 모두 잘 그렸으니 진실로 대가의 반열에 들어갈 만하게 되었다. 그러나 법도만을 공손히 지키고 그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해서, 비록 많이 알기는 했으나 그 기운이 웅장하지 못하고 비록 정일(精一)하기는 했으나 묘한 지경에는 이르지 못했으며 비록 공교롭기는 했으나 변화하지 못했으니, 그 단점은 평범함을 떨어내지 못한 데 있다.”

이징의 장점과 단점을 정확히 짚어낸 평가다. ‘연사모종도’는 차분한 그림이다. 오랫동안 그림에 전념했으되 특별히 작가의 특징이나 필력이 드러나지 않은 작품이다. 천부적인 재능이나 강렬한 개성 같은 단어는 이징의 작품과 거리가 멀다. 대신 그의 그림에는 재능이 있고 없고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세계를 끝까지 밀고 나간 예술가의 성실성과 헌신성이 들어 있다. 남태응의 평가처럼 ‘연사모종도’가 ‘기운이 웅장하지 못하고 묘한 지경에는 이르지 못했으며 변화하지 못해 평범함을 떨어내지 못했다’ 해도 한 번 보면 쉽사리 잊을 수 없는 작품이다. 한결같은 길을 걸어간 자의 신뢰가 느껴지는 그림이다.

다보탑과 석가탑을 혼동하는 것은 괜찮다. 띄어쓰기를 헷갈리는 것도 상관없다. 그 정도 실수는 언제든 수정하면 된다. 진짜 중요한 것은 자기가 갈 길을 잊지 않는 것이다. 이징의 ‘연사모종도’가 주제의식이 뚜렷하게 부각되는 것은 절로 향하는 스님이 있기 때문이다. 수행자는 시절인연에 따라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다. 원하든 원치 않든 번거로운 직책을 맡아야 할 때도 있고 어쩔 수 없이 남들 앞에 서서 버벅거리는 목소리라도 들려주어야 할 때도 있다.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을 하느냐가 아니다. 어떤 직책을 맡았느냐도 중요하지 않다. 그 일이 끝나면 언제든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수행자는 어느 곳에 있든 항상 절(고향)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누구인가. 나의 행위가 일체중생에게 어떤 이로움을 주는가. 이런 질문으로 다시 돌아와 자신을 재점검할 때 수행자는 아무리 먼 타국에 있더라도 절을 떠나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314호 / 2015년 10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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