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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푸티상사의 지상법문] 21. 각오의 기점(3)

기자명 법보신문
  • 법공양
  • 입력 2015.10.13 17:33
  • 수정 2016.01.05 16:04
  • 댓글 0

지금 할 수 있는 수행을 왜 내세로 미루려 합니까

 
지옥은 아래에 있습니다. 탁한 기운은 아래로 가라앉고 맑은 기운은 위로 올라갑니다.

내세 위해 수행 한다는 말은
이 생의 깨달음 포기하는 것
불법 배우는 제자라면
오늘 할 일 미루지 말아야

그렇다면 어떤 것이 맑은 기운일까요? 이것은 수행과 관계됩니다. 마음과 영혼에 무겁고 심각하게 오염되지 않은, 즉 죄악감과 같은 짐이 없고 업을 지고 있지 않으면 당신은 가볍습니다. 특히 공덕을 짓고 수행을 하여 원래의 아주 많이 탐하고 집착하던 것을 이미 내려놓은 상태입니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 역시 탐하고 집착하지 않도록 알려줍니다. 내가 탐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짐을 내려놓아도 나의 빚은 다 갚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더욱 해탈하게 하는 방법은 자신의 이러한 지혜와 이해한 것을 다시 전달하는 것입니다. 열 사람, 백 사람에게 알려줍니다. 그러면 그들도 당신처럼 많은 것을 내려놓게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악업을 없애고 동시에 전달한 당신은 공덕이 생깁니다.

만약 당신이 50%의 악업을 없앴다면 아직 50%의 악업은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가르친 상대가 자신의 50%의 죄업을 없앨 때 당신의 원래 남은 50%의 악업과 빚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즉 그가 50을 얻으면 당신도 50을 얻습니다. 만약 당신이 백 명을 가르쳐 사람마다 50을 없애면 그 공덕이 당신에게 모여 당신은 팔백만 벌의 공덕을 쌓게 되는데 당신이 승화하지 않으면 누가 승화하겠습니까? 당신이 그렇게 많은 공덕을 쌓는 것은 자재와 희열이며 햇빛이고 긍정적인 에너지입니다. 그래서 인간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당신의 지혜, 번뇌에 대한 정력(定力)과 정확한 인식과 투철한 견해입니다. 당신은 아주 알맞고 예리한 언어로 어리석고 명석하지 않아 고통 받는 사람에게 알립니다. 그가 3년간 번뇌한 것을 세 마디 말로 해결합니다. 상대는 ‘와! 이렇게 간단하구나. 나는 정말 깨달았어’하고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당신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공덕 있는 사람을 인간 세상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장차 육체를 내려놓을 때, 우리의 육체가 낡아 조만간 자동차처럼 폐기할 때 우리는 승화합니다. 승화란 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진심으로 수행한 사람은 자신을 마중 나온 불보살을 볼 수 있습니다. 마중 나오지 않아도 당신은 위로 올라갑니다. 당신은 맑은 기운이고 상승하는 기운이며 빛의 기운으로 햇빛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반드시 하늘로 상승합니다. 짐이 많을수록 원한이 클수록 상해가 많을수록 당신 몸에 상처나 짐이 됩니다. 당신의 주머니에 여러 가지 무거운 물건이 가득 담겨 아래로 가라앉습니다.

그렇다면 선행을 하고 수행하면 왜 위로 상승할까요? 탐하거나 집착하지 않게 되어 인생에서의 죄업과 짐을 가져가는 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것은 햇빛 같은 긍정적인 일입니다. 기체보다 가볍고 빛보다 아름다워서 위로 올라갑니다. 같은 큰 주머니지만 당신의 주머니에는 수소가 담겨있기에 당신을 하늘로 데려갑니다. 모든 탐욕에 집착하여 악한 일을 하거나 좋고 나쁨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부와 행복을 자루 가득 가졌다고 여기지만, 모두 짐이 되어 자신을 가라앉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래로 가라앉은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당신의 미래도 가라앉을지 모르므로 모든 탐욕과 상처 주려는 마음을 마음의 주머니에서 꺼내어 탐하거나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많이 꺼낼수록 나의 맑은 기운은 점점 많아지고 위로 올라가는 에너지는 더 강해집니다.

수행의 경지는 아주 깊습니다. ‘위 없는 미묘법’을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아주 깊기 때문입니다. 모든 단계마다 차제(次第-때마침 주어진 기회)라고 하는데 이 기회마다 수행방법이 있습니다. 현재 우리의 이 차제는 먼저 진정한 진심을 수련하는 것입니다. 진심 그리고 공경입니다. 왜 공경해야 하나요? 자신은 아무런 집착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맞지만, 이것은 경지에 따라 다릅니다. 우리의 경지가 극히 높은 단계가 아닐 때, 80% 이상 성취하지 못했을 때는 집착해야 합니다. 무엇을 집착할까요? 공경에 집착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금강경’에서 불법도 버릴 수 있다고 했는데 무엇을 버리지 못하느냐고 말합니다. 마지막에는 많은 사람이 수행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해는 잘못된 것입니다. 진정한 수행 경지에서는 성불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공경은 집착해야 합니다. 일체에 대해 집착하지 않지만, 하나의 집착은 있습니다. 하나도 집착하지 않으면 이미 죽은 사람으로 존재의 느낌이 없습니다. 존재의 느낌이 없는 사람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만약 살아 있는 사람이 일체를 집착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사실 일체의 탐욕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성불이나 깨달음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물론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오체투지를 할 때 ‘나는 깨달아야 해. 깨달음, 깨달음!’ 모든 머리로 깨달음, 깨달음만 생각한다면 깨달음은 보따리가 되어 당신을 감싸 깨달음에 불리할 수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일깨우는 것은 공경과 찬미입니다. 공경과 찬미의 생각은 무한하고 무량하며 이런 무한과 무량함은 자신의 마음에서 나옵니다. 자신의 세포마다 내뿜는 이런 공경과 자비와 광채를 불보살께 공양하면 자신이 꼭 깨닫겠다는 이기적이고 협소한 마음이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돌파하고 자신을 잘 써야 합니다.

수행의 과정은 이렇습니다. 자신을 잘 써야 합니다. 무아(無我)는 ‘나를 쓰지 않는다’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자신을 쓰지 않으면 누구를 쓰겠습니까? 수행도 여러분이 합니다. 이런 여러분은 자신의 욕심과 집착이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의 목적도 없습니까? 있습니다. 완전히 깨닫고 공덕이 무량하며 상상하는 것은 모두 생각할 수 있지만, 늘 생각만 해서는 안 되고 늘 행해야 합니다. 늘 깨닫고 성불하는 것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늘 이것만 생각하면 상상하는 대뇌 구역을 감싸 너무 이기적이 됩니다. 성불은 생각으로 되는 것입니까? 성불을 생각한다면 중생이 이고득락하게 하는 것이 가장 빨리 성취하는 방법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경계가 없으면 어떻게 할까요? 하나의 상(相)에 집착하여 깨달음의 천지에 들어가야 합니다. 어디부터 들어갈까요? 불상에서, 부처님의 눈에서  혹은 부처님을 대표하는 스승의 눈에서 하나의 지름길을 찾습니다. 그것을 돌파하면 여러분은 도달합니다. 여러분의 정신과 여러분의 생명은 다른 세계로 갑니다. 반드시 구체적으로 수행할 때 자신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먼저 배워야 할 것은 공경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이 염불할 때 공경하고 찬미하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문수보살의 말을 아주 특별하게 번역했습니다.

‘만약 수행자가 나를 기쁘게 하면, 나를 기쁘게 한다면 나는 그도 내가 좋아하는 지혜와 빛을 얻게 하겠다.’

만약 수행하는 제자가 스승의 마음에 환희와 자재가 생기게 하면 스승은 부처님의 빛을 그에게 전달합니다. 만약 그 제자가 자신의 공경과 진심을 전부 열 수 있다면 스승이 그에게 주는 것도 전부이고, 만약 그가 자신의 마음을 절반만 열었다면 스승의 빛도 전부 들어갈 수 없으며 전부 들어가려면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나는 일깨웁니다. 큰 원과 큰 깨달음, 바꿔 말하면 원이 크면 깨달음도 크고 지혜도 크며 에너지도 크고 마음도 크며 성취도 큽니다. ‘나는 소원이 없어요’ 하며 언쟁하려는 사람도 있는데 원이 없으면 나아갈 길도 없습니다. 원이 없는 것은 곧 무명입니다. 원이 없는 인생은 마치 하나의 돌멩이와 같고 원이 잘못되면 가는 길도 잘못됩니다. 당신의 소원과 추구하는 것이 잘못됐다면 당신이 가는 모든 길, 모든 행위가 잘못된 것입니다.

인간 세상은 간단하여 모두 서로 대응합니다. 나쁜 직업에 종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이 잘못된 직업을 가져 장차 거기서 일한다고 할 때 예를 들어 그 직업이 백정이라 할 때 당신은 평생 살생해야 합니다. 만약 당신이 선택한 직업이 글을 가르치는 선생이라면 당신은 사람을 가르치고 교화하는 일을 합니다. 미래에 성불하고 보살이 되려 한다면 당신의 모든 행위는 자비롭게 자비와 불광, 부드러움으로 모든 인연 있는 사람을 보호해야 합니다. 그래서 소원이 옳지 않으면 여러분의 행위도 바르지 못하고 여러분의 소원이 잘못되면 여러분의 모든 행위도 잘못됩니다. 여러분의 소원이 바르고 커야 비로소 지혜와 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불가사의한 것은 속도인데 소원이 바르고 클수록 절대적인 진심일수록 성취하는 속도도 빠릅니다.

오늘날 많은 법문에서도 수행하라고 하는 것에 어떤 이는 ‘스승님 이 문제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하고 묻습니다. 어떤 법사들의 대화를 듣거나 그들의 법문을 들어보면 내세를 닦으라고 합니다. 듣기에 아주 자비롭고 부드럽지만, 그 말은 이생에 깨달음을 얻겠다는 생각을 접으라는 의미지요. “그런 덕행이 없어서 불가능하니 내세에 봅시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내세라는 것은 얼마나 많은 겁 이후입니까?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왜 내세까지 기다립니까? 지금의 일은 지금 해야 합니다. 불법을 배우는 사람으로서 학생으로서 제자로서 지금 할 일을 미래로 미루지 말아야 하고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2013년 4월 3일 타이완 타이베이
번역:정금주
제공:보리선수 약사선원 (1661-0803)


[1314호 / 2015년 10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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