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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12연기-③ 행

생각·인식 이전 삶을 위해 작동하는 의지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무명을 조건으로 발생하는 행(行)이란 무엇인가? 행이란 무언가를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려는 의지를 발동시키는 것이다. 무엇이 의지를 발동시키는가? 일단 살아있는 것이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살아있는 것만 그런 것은 아니다. 물리적인 물체들도 일종의 ‘의지’가 있다. 관성이라고 불리는 게 그것이다. 가려던 방향으로 계속 가려는 성향, 그게 관성이다. 그런 관성은 유기체나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로 있다. 인간의 경우엔 ‘타성’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담배 피우던 이가 몸이 안 좋아도 계속 피우려 하는 것도, 먹지 않던 종류의 음식에 대해 맛없다고 느끼며 먹던 종류의 음식을 계속 먹으려는 것도, 남들에게 상처주고 괴롭히는 말을 어느새 다시 입 밖으로 내게 되는 것도 모두 이런 종류의 관성이다. 공부하려던 이가 계속 공부하려는 것도, 선방에 앉아 참선하던 이가 그걸 계속 하려는 것도 다르지 않다. 이런 관성을 불교에선 ‘습’이나 ‘업’이란 말로 표현한다. 어떤 행을 지속하게 만드는 것, 그게 습이고 업이다. 좋은 행의 지속은 좋은 결과로 이어질 것이고, 나쁜 행의 지속은 나쁜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이처럼 업을 통해 행을 지속하여 어떤 결과를 얻는 것을 잘 알다시피 ‘자업자득’이라고 한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아이가 엄마의 젖을 찾듯
행은 무명의 세계 속에서
어떤 판단 앞서 작동하는
살기 위한 본능적 의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이런 행동은, 혹은 그런 행동을 낳는 이런 의지는 생각이나 인식 이전에 존재하고 발동한다. 생명체로 돌려서 살펴봐도 그렇다. 아이가 엄마 젖을 찾는 것은 살기 위한 본능적 행동이다. 먹고 살기 위한 그 의지는 생각이나 인식 이전에 작동한다. 성인이라고 다르지 않다. 배고플 때만은 아니다. 짝을 얻고자 하는 행동이나 생식을 위한 행동처럼 번식과 관련된 행동의 의지 또한 생각이나 인식 이전에 작동한다. 그렇게 생각 이전에 작동하는 의지를 보통 ‘충동’이라 한다. 충동이란 생존과 번식을 위해,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기 위해 일차적으로 작동하는 성분이다. 그것은 ‘식’이라고 명명된 작용 이전에 존재하고 작동한다. 그렇기에 그것은 흔히 ‘맹목적’이라고 간주된다. 생각 없이, 인식 없이 행동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 것은 사실 그 충동이 비록 ‘생각이 없다’고 해도 명확한 목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생존의 지속, 그게 바로 그 목적이다.

의지나 충동이라 불리는 이 ‘행’은 무명을 조건으로 작동한다. 이때 무명이란 조건은 행을 적극적으로 규정하는 요인이라기보다는 행이, 생명체의 충동이 헤쳐가야 할 조건이다. 하이데거 풍으로 말하면, 살아 있는 어떤 것도 이 무명의 세계 속으로 ‘던져지며’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도 그것은 행을 규정하는 조건이다. 무명의 세계란 모든 것이 생존을 지속하기 위한 조건이고 적응해야 할 조건이다. 살려는 의지인 ‘행’은 이 무명의 세계, 알 수 없고 아직 알지 못하는 세계에서 어떤 식보다 먼저, 어떤 판단보다 먼저 작동하기에, 일단 작동하며 시작한다. 그래서일까? 괴테는 파우스트의 손을 빌어 “태초에 말씀이 있었느니라”라는 성경의 문장을 이렇게 고친다. “태초에 행동이 있었으니라.” 생명의 ‘원초적’ 힘인 이런 의지 내지 충동을 ‘맹목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무명의 세계와 직접 대면하며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알지 못하고 충분히 알 수 없는 세계 속에서, 여기저기를 더듬고 이리저리 몸을 옮기며 생존을 위한 길을 찾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려는 것은 생명의 ‘본성’에 속한다. 생명의 존재에 이유는 없다. 예전에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는 말로, 합목적적 본질에 따라 만들어진 도구와 달리 인간의 존재(실존)는 그런 본질이나 목적 없이 태어났음을 강조했지만, 그건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모든 생명체는 태어났기에 존재하는 것이고 살아가는 것이다. 생명이란 그런 점에서 자신의 생존을 지속하는 문제에 관한 한 ‘맹목적’이다. 존재하기에 존재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명의 세계 앞에서 합리적 이유 없이 존재하며, 세상을 통찰하는 어떤 생각 없이도 그 존재를 지속하려 한다. 생명을 지속하려는 이런 의지나 충동을 ‘생명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는 존재를 지속하려는 이러한 성향이나 ‘노력’, 혹은 그러기 위한 충동이나 의지를 ‘코나투스’라고 정의하는데, 그는 이것이 생명체뿐 아니라 모든 존재의 본성이라고 본다. 현재의 상태를 지속하려는 사물의 관성조차 이런 코나투스의 일종인 것이다. 생명이 있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과 다른 점은 존재를 지속하려는 의지가 생존할 수 있는 능력 자체의 고양을 지향한다는 것일 게다. 주어진 조건에서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을 증가시키고, 다른 환경에서 생존을 지속하기 위해 자신을 변화시켜 가는 것이 그것이다. 이를 위해 생명체는 자신이 처한 조건에 대해 ‘알고자’ 하게 된다. 끝없이 요동치는 바다 속에서 지푸라기든 나무조각이든 찾듯이, 알 수 없이 빠르게 변화하는 무상의 세계 속에서 삶을 지속할 단서를 찾고자 한다. 세상에 대해 알고자 한다. 동물이 먹을 것을 찾아 움직이려 한 것도, 이동이나 운동을 위해 유용한 세포를 발전시킨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테고, 식물이 빛을 감지하는 능력을 섬세하게 발전시킨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터이다. 살고자 하는 충동에서 비롯된 ‘행’이, 알고자 하는 의지를 발동시켜 ‘식’을, 지각하고 인지하는 능력을 발동시키는 것이다. 이는 식을 발동시키는 전제지 식에 의해 작용하는 의지가 아니다. 식은 살고자 하는 의지를 조건으로 존재하게 된다.

모든 생명체는 무한속도로 변하는 이 무상한 세계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생명의 역사를 시작했던 박테리아나 아메바 같은 원생생물에서부터 작금의 인간에 이르기까지 이점에선 어느 것도 다르지 않다. 무명의 어둠 속에 위족을 내밀어 살 길을 찾아야 하고, 인근에 있는 것을 더듬으며 판단하길 반복하며 ‘식’을 형성해야 한다. 변화하는 대기의 흐름 속에서 자신이 살 거처를 찾아야 하고, 변화하는 빛의 흐름 속으로 가지를 뻗어야 하며, 변화하는 물의 흐름 속에 신체의 일부를 담가야 한다. 변화하는 온도를 포착하여 꽃을 피워야 할지 잎을 떨구어야 할지를 판단해야 하고, 그 변화의 뒤에 무엇이 올 지를 예상해야 한다. 눈앞에 있는 것의 움직임을 포착하여 적인지 먹이인지를 판단해야 하며, 달리는 놈의 속도와 방향을 포착하며 쫓든 도망치든 달려야 살아남을 수 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식 이전에 작동하는 이런 의지를 갖고 있다. 그것이 12연기에서 식 이전에 있으며 식을 조건 짓는 행이다. 의식 없는 생명체는 있지만, 이런 충동 없는 생명체는 없다. 이게 없다면 어떤 행동도, 살아가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행이, 그런 의지가 작동하면서, 살기 위해 무엇을 먹어야 할지, 그걸 찾기 위해 어디로 가야 할지, 저기 있는 것을 먹어도 좋은지 아닌지를 판단하려 할 때, ‘식’이라고 부른 작용이 발동되며, 그런 의지가 식의 작용을 규정하고 방향 짓는다. 식이란 생존을 위해 발동하는 이 행에 기대어 발생하고 작동한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315호 / 2015년 10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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