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8. 물질적 보시 vs 영적 보시

기자명 서광 스님

이타·연기적 세계관 깨달을 때 자유롭다

“수보리야! 만약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산들 가운데 가장 높고 큰 수미산 크기의 칠보무더기를 보시한 사람보다는 이 반야바라밀경의 4가지 구절을 지니고 읽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설명해 주는 사람의 공덕이 백배, 백천만억배 더 크고, 나아가서 어떤 계산이나 비유로도 비교할 수 없느니라. 수보리야! 그대들은 ‘내가 중생을 제도한다’는 생각을 한다고 여기지 말라. 왜냐하면 만일 여래가 제도할 중생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여래 또한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여래가 자아에 대해서 언급할 때는 자아가 없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인데, 범부들은 이를 자아가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수보리야! 범부라는 말도 범부가 아니고 단지 그 이름이 범부라는 뜻이다.”

물질적·정신적 형태 보시는
일시적인 평화·안전만 제공
근원적인 고통은 해결 못해
영적인 보시가 가장 이상적

보시에는 물질적 보시(財施)와 정신적 보시(無碍施), 그리고 영적 보시(法施)의 3종류가 있다. 위에서 부처님께서는 수미산 크기의 칠보를 보시(물질적 보시)하는 공덕과 ‘금강경’ 네 구절을 설명해 주는(영적 보시) 공덕의 크기를 비유적으로 말씀하시면서, 아무리 작은 보시라 할지라도 영적 보시의 공덕이 어떤 엄청난 크기의 물질적 보시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귀하다는 사실을 강조하시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정신적 보시와 영적 보시를 혼동한 나머지, 영적차원이 아니라 그냥 이원적 앎의 알음알이 수준에서 ‘금강경’을 공부하고 외워서 설명하는 것(정신적 보시)이 마치 그 어떤 물질적 보시보다 더 훌륭한 일이라고 착각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착각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본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오늘날에는 자칫 비현실성, 무의식적 내적갈등, 자기기만 등의 불건강한 심리상태를 유발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내가 한다’는 자아의식이 비대해지고 강화되는 엄청난 부작용을 초래할 수도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정신적 차원에서의 보시는 물질적 차원의 보시와 특별한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필요한 물질이나 정신적 위로와 가르침은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방편적으로 적절하게 쓰여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승보살이 수행하는 과정에서 물질적으로 결핍된 중생을 만나면 물질적으로 지원하고, 정신적 안정이 필요한 중생을 만나면 정신적 안정을 제공하는 것이다. 또 이 둘이 동시에 필요한 경우라면 그렇게 하는 것일 뿐, 이 둘의 우열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그렇다면 정신적·물질적 보시와 영적 보시는 어떻게 다른가? 깨달음의 차이다. 깨닫지 못한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 친구, 이웃 등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그들의 마음을 편안하고 안정감을 느끼도록 도와줄 수 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영혼을 성장시키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정신적 보시는 높은 깨달음이나 지혜가 없어도 따뜻한 애정으로 가능하지만, 영적 보시는 깨달음, 높은 수준의 지혜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정신적 보시는 ‘내가 상대를 가르친다’라는 생각을 가지고도 가능하지만, 영적 보시는 ‘내가 누구를 가르친다’는 자아의식, 즉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으면(깨달음이 없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왜 영적 보시가 물질적 보시와는 아주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른 공덕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하신 것일까?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이들은 일시적 평화와 안전을 제공할 뿐 우리의 고통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자기중심의 생각에서 벗어나 ‘나’와 ‘너’, ‘나’와 만물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너’를 해치는 것이 곧 ‘나’를 해치는 것이고 ‘너’를 돕는 것이 바로 ‘나’를 돕는 것이라는 이타적, 연기적 세계관에 대한 철저한 깨달음만이 근본적으로 마음의 해방과 자유를 가져다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서광 스님 한국명상심리상담연구원장 seogwang1@hanmail.net

[1315호 / 2015년 10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