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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김홍도·임희지 ‘맹호도’

기자명 조정육

대낮의 격정 휘몰아쳐도 새벽에 세웠던 서원 잊지 않으리

 

▲ 김홍도·임희지, ‘죽하맹호도’, 18세기, 비단에 연한 색, 91×34cm, 개인 소장.


긴 슬럼프에 빠졌다. 부처님 법을 공부한 지 벌써 20여년. 최근 3년 동안 불법승 삼보에 대해 연재하면서는 온통 불교에 젖어 살았다. 새벽 4시면 일어나 경전을 읽고 예불을 드리고 참선을 한다. 새벽은 감히 어떤 사악한 기운도 범접할 수 없을 만큼 신령스럽다. 우주가 선물한 새벽기운을 받고 고요히 앉아 내면을 들여다본다. 사람으로 태어날 만큼 공덕을 쌓은 내 자신이 고맙고 감사하다. 넘칠 만큼 행복하다보니 세상 한편에서 울고 있을 누군가에게 슬그머니 미안해진다. 그때쯤 가만히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한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격려와 위로를 담아 밝은 기운을 보낸다. 이때의 나는 관세음보살의 자비심으로 충만하다. 아미타부처님이 법장비구 시절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라고 서원하던 영특한 수행자를 닮는다. 예불을 끝내고 방문을 나서는 순간까지 나의 몸에서는 광채가 나듯 경건하다.

동학사서 교학 가르치던 경허
콜레라가 휩쓴 마을 지나가다
회심한 뒤 폐관수행에 몰입해
목숨 건 수행으로 깨달음 얻어

딱 거기까지다. 새벽마다 다짐하듯 올리는 발원은 예불이 끝나버림과 동시에 끝난다. 일상으로 돌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전혀 다른 나로 돌변한다. 성스러운 모습은 사라지고 사소한 문제마다 경계에 부딪친다. 염불하던 입에서는 거친 말이 튀어나오고 경전을 담았던 가슴에는 분노가 들어찬다. 온전히 나의 것이라 여겼던 부처님의 가르침은 완벽하게 나의 것이 아니었다. 나의 말과 행동은 ‘립싱크’에 지나지 않았다. 공부 따로 행동 따로다. 이런 나의 살림살이를 지켜볼 때마다 통곡하고 싶을 만큼 한탄스럽다. 이 생에서 내가 죽자사자 노력한다한들 나의 업력을 얼마나 바꿀 수 있을까. 절망감도 없지 않다. 내 슬럼프의 원인은 여기에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경허(鏡虛,1849~1912)선사도 나와 비슷한 체험을 했던 것 같다. 경허의 속성은 송씨(宋氏), 속명은 동욱(東旭)이다. 경허는 법명으로 성우(惺牛)라고도 한다. 9세 때 과천의 청계사에서 출가하여 계허(桂虛) 밑에서 수학했는데 계허가 환속하는 바람에 동학사의 원오(圓悟)에게서 경학을 배웠다. 동학사의 강사가 되어 교학을 가르치던 중 30세 때인 1879년에 스승인 계허를 만나러 길을 떠난다. 가는 도중 콜레라가 휩쓴 죽음의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한암선사의 표현처럼 ‘모골이 송연해지고 정신이 아득해져서 죽음이 임박하여 목숨이 한 호흡 사이에 끊어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죽음의 위협을 겪으며 자신이 지금까지 공부하고 강의한 교학이 얼마나 허망한가를 처절하게 깨닫는다. 자신의 것이라 여겼던 불학의 세계가 ‘립싱크’였음을 알았다. 그는 가던 길을 되돌아와 가르치던 학인들을 전부 돌려보내고 폐관수행에 몰입한다. ‘나귀의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는 화두를 참구하며 폐침망식(廢寢忘食)했다. 목숨을 건 수행이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소가 되어도 콧구멍 뚫을 곳이 없는 소가 된다’는 말을 듣고 대오한 후 은산철벽을 뚫었다. 그는 자신의 새로운 법명을 성우(惺牛), 깨달은 소라고 지었다.

그 후 서산에 있는 천장암에서 보림한 후 전국을 다니며 선법을 전했다. 그는 남녀노소, 빈부격차, 승과 속을 묻지 않고 자신의 법문을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에게나 법을 설했다. 그의 설법을 듣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릇된 견해를 버리고 집착이 사라져서 그 시원하기가 마치 뼈를 바꾸고 창자를 씻어낸 듯하다’고 말했다. 그가 한 번 거쳐 간 곳은 다투어 선원을 열었고 발심한 승려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의 철저한 선 체험과 전법으로 몰락해가던 근현대 한국불교가 바로 섰다. 그는 ‘오직 투철하게 깨닫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주체적인 자기 형성의 자유를 체득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한암, 만공, 수월, 혜월, 남전 등 그의 가르침을 받은 기라성 같은 제자들에 의해 근현대 불교가 생명력을 되찾았다. 말년에는 주장자를 꺾어버리고 갑산, 강계를 돌아다니며 머리를 기르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박난주(朴蘭州)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수많은 기행을 일삼으며 자발적인 시련과 고독을 선택한 그는 1912년 4월25일에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했다. 세수 67세, 법랍 59세였다. 1913년 7월15일에 혜월과 만공이 관을 모셔다 난덕산에서 다비하고 화장했다.

‘죽하맹호도(竹下猛虎圖)’는 대나무 아래 선 호랑이를 그린 작품이다. 오른쪽 위에 단정한 글씨로 쓴 능산(菱山) 황기천(黃基天,1760~1821)의 제발이 적혀 있다. ‘조선의 서호산인이 호랑이를 그리고 수월옹이 대나무를 그리다(朝鮮西湖散人畵虎 水月翁畵竹)’라고 되어 있어 두 사람의 합작품임을 알 수 있다. 서호산인은 김홍도(金弘道,1745~1806?)의 젊은 시절 호이고, 수월옹은 임희지(林熙之,1765~?)의 호다. 앞에 ‘조선’이라는 국적을 표시한 것은 일본에 보내기 위해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에는 매와 호랑이가 없어 조선에서 그린 그림을 많이 구입해갔다.

지금은 멸종되었지만 조선 산천은 호랑이가 지배했다. 단군신화에서부터 시작된 호랑이 신화는 그 초월적인 힘과 위풍당당한 자세로 백수(百獸)의 왕으로 여겨졌다.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 가죽은 다른 동물과 인간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맹수의 능력을 상징했다. 호랑이가 지닌 절대적인 힘과 능력은 반대로 사악한 기운을 복종시킬 수 있다고 믿어 벽사의 의미로 신격화되었다. 백호(白虎)가 서방을 지키는 방위신으로 선정되고, 설화와 민담에 자주 출몰하는 것도 불가사의한 능력에 대한 경외심 때문이다. 용호상박(龍虎相搏)이란 단어에서 알 수 있듯 호랑이의 능력은 용에 비견될 만큼 강력하다. 12지 중 오직 용만이 실재하지 않은 상상의 동물이다.

호랑이는 단독으로 그려질 때도 있지만 소나무나 대나무를 배경으로 그려질 때가 더 많다. 소나무는 지혜롭고 굳건한 영웅호걸을 상징한다. 때로는 소나무가 용을 대신할 때도 있다. 용맹스런 호랑이가 강렬한 힘을 가진 용과 함께 서 있으니 송호도(松虎圖)는 벽에 붙여놓은 것만으로 삼재를 물리쳐줄 든든한 그림이 된다. 소나무 위에 까치가 등장할 때도 있다. 까치 역시 벽사적인 의미가 스며있다. 무속에서 까치는 서낭신의 사자로 호랑이에게 신탁(神託)을 전하는 메신저로 인정받는다.

호랑이가 대나무를 배경으로 서 있는 죽호도(竹虎圖)는 주로 일본에서 인기가 많았다. 대나무는 불교적인 의미가 많이 투영되어 있다. 대나무가 자라는 곳은 명상의 장소이자 자비가 펼쳐지는 성스러운 장소다. 석가모니의 ‘본생담(本生譚)’ 중 널리 알려진 '사신사호(捨身飼虎)'에도 대나무가 나온다. 석가모니가 과거 생에 전담마제라는 태자였을 때 굶주린 호랑이에게 자신의 몸을 던져 호랑이의 먹이가 된 ‘사신사호’의 배경이 죽림(竹林)이다. 수월관음(水月觀音)이 거처하는 보타락가산에도 대나무가 자란다.

김홍도는 각 분야를 다 잘 그렸다. 인물과 동물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전칭작으로 알려진 호랑이 그림이 여러 점 남아 있다. ‘죽하맹호도’는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송하맹호도’와 여러 면에서 공통점이 많다. 두 작품은 모두 호랑이 한 마리가 각각 소나무와 대나무를 배경으로 서 있는 출산호(出山虎)의 형식을 취했다. 출산호는 산에서 나온 호랑이 모습을 그린 형식이다. 백수(百獸)의 왕이 꼬리를 세운 채 걷는 모습은 사나운 맹수로서의 진면목을 드러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특히 호랑이가 많았던 우리나라에서 출산호는 호환(虎患)의 두려움을 환기시킨다. 앉아 있는 호랑이를 그린 좌호(坐虎)는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로서 경외감을 불러 일으켰다. 호랑이는 두루마리나 병풍에 여러 마리를 한꺼번에 그린 군집형식보다 축(軸)이나 화첩에 한 마리를 단독으로 그린 그림이 훨씬 더 위압적이다.

‘죽하맹호도’는 ‘송하맹호도’와 자세가 정반대다. 얼굴은 정면인데 고개를 좌측으로 살짝 돌렸다. 다리는 짧아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다. 긴 등은 높게 둥글리고 있어 언제라도 먹잇감을 향해 뛰어오를 수 있는 응축된 힘이 저장되어 있다. 꼬리는 굽이치며 하늘로 향했다. 온 몸에 긴장감이 팽팽하게 흐른다. 몸 전체는 연한 황색으로 바탕색을 칠한 후 털은 가느다란 붓으로 세밀하게 그렸다. 움직일 때마다 물결치는 검은색 줄무늬가 생동하다. 뻣뻣하고 부드럽고 짧고 굵은 수많은 털이 방향을 달리하며 온 몸을 덮었다. 붓질로 덮었다. 배와 엉덩이 꼬리에는 흰 선을 더해 호피의 질감을 능숙하게 처리했다. 눈두덩이에 나비처럼 그려 넣은 흰 선과 치켜 올라간 눈동자가 불을 뿜듯 형형하다. 먹색의 미묘한 변화와 탁월한 양감, 사실력이 극대화된 붓질은 가히 조선 최고의 작가만이 그릴 수 있는 솜씨다. 김홍도가 아니면 그릴 수 없는 신운의 경지다.

‘죽하맹호도’는 ‘송하맹호도’에 비해 맹호의 비중이 축소되었다. 대나무에게 화면을 많이 내어준 탓이다. 대나무를 그린 임희지는 호가 수월당(水月堂), 수월헌(水月軒), 수월도인(水月道人)이다. 그림을 그린 후 ‘水月’이란 두 글자를 초서체로 특이하게 흘려 써 마치 부적 글씨 같았다고 한다. ‘죽하맹호도’는 합작품이이서인지 낙관을 생략했다. 그가 수월관음을 염두에 두고 수월이란 호를 지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풍류에 기행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두어 칸 밖에 되지 않은 집에 살면서도 반드시 연못을 팠다. 샘이 나오지 않자 연못에 쌀뜨물을 부어놓고 휘파람을 불며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내가 수월의 뜻을 저버리지 않으니 달이 어찌 물을 가려 비추랴.”

그는 한역관(漢譯官)으로 중인출신 문인의 모임인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의 일원이었다. 그는 대나무와 난을 잘 그렸다. ‘근역서화징’에는 임희지의 대나무가 ‘강세황(姜世晃)과 더불어 이름이 가지런하고’ 난초는 ‘그보다 낫다’고 적혀 있다. ‘죽하맹호도’에 소나무 대신 대나무를 그린 이유가 이해된다. 일본에 보낼 그림이라는 이유 외에도 김홍도와 임희지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야를 그렸다. 임희지는 김홍도보다 20세 어린 후배로 이름이 덜 알려진 작가다. 그런데 기인적인 행동과 호탕함은 김홍도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그의 특별한 사고방식을 짐작할 수 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가 배를 타고 강화도에 갈 때였다. 바다 가운데에 이르러 큰 바람과 소낙비가 몰아 쳐서 거의 건널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뱃사람들은 정신없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만을 불렀다. 그런데 임희지가 갑자기 껄껄대고 웃으며 일어나더니 캄캄한 구름 속 허연 물결 사이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바람이 잔잔해진 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었다. 임희지가 대답했다. “누구든지 한 번 죽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바다 가운데서 비바람이 몰아치는 장관은 쉽사리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어찌 춤을 추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의 행동은 기행을 위한 기행이었을까. 생사를 초월한 뜻이 있었을까. 확인할 수 없으니 안타깝다. 그의 일화는 계속된다. 어느 날 아이들에게 거위털을 얻어다 엮어서 옷을 만들었다. 달밤에 쌍상투를 짜고 맨발로 그 털옷을 걸친 채 피리를 불면서 종로십자로를 걸어가니 순라꾼이 보고 귀신이라면서 모두 도망갔다. 임희지는 기행이 많이 알려진 작가다. 기행은 기행일 뿐이다. 그림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그의 난과 대나무는 기행을 미화할 정도로 예술성이 뛰어날까. 죽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 비바람 속에서도 담대하게 춤출 수 있을 정도로 화격이 높을까. 그런 기행 한 번 없는 김홍도의 호랑이는 붓끝으로도 충분히 속세를 초탈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에 호랑이가 많았듯 호랑이 그림도 많이 그려졌다. 수많은 호랑이 그림 중에서 유독 김홍도가 그린 호랑이가 신령스러운 것은 그리는 사람의 능력 때문이다. 참선을 하고 염불을 하고 관경을 하는 사람은 많지만 경허선사 같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경허선사를 준비하면서 그를 대변할만한 그림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돌올한 경지를 드러낼 수 있는 그림이 어떤 것이 있을까.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 무의식적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정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곁에 있던 남편이 내 얘기를 듣자마자 일초도 망설이지 않고 ‘호랑이!’라고 소리친다. 경허에 대한 전기를 읽을 때부터 남편의 머릿속에는 그의 초상화 대신 호랑이가 들어와 있었단다. 호랑이가 멸종된 한반도에서 호랑이 그림이 여전히 호랑이를 기억하게 하듯 경허가 살았던 격정적인 삶은 지금도 여전히 진리를 향해 나아가게 한다. 그가 도달한 경지에는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채 막행막식만을 행하는 사람이 결코 알 수 없는 세계다. 경허선사는 어떻게 해서 그런 경지에 도달했을까. 고민의 시작은 비슷한데 수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어떻게 해서 진리의 핵심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새벽이면 세웠던 굳건한 서원도 해가 지기 전에 놓쳐버리는데 그는 어떻게 해서 한 생을 진리 속에서 살 수 있었을까. 고민의 정도가 차이가 있어서일까. 여전히 어렵고 절망스럽고 고통스런 삶이다. 내 앞에 놓인 생은.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315호 / 2015년 10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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