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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사찰의 자연유산-비자와 동백과 차

백성과 국가 생활용품 보급 위한 전통문화경관

▲ 장성 백양사의 비자나무 숲.

비자나무와 차나무와 동백나무. 이들 난대성 수목은 지난 천년 세월 동안 터줏대감처럼 남부지방 사찰의 중요한 식솔이었다. 사찰은 어떻게 천년 세월 동안 이들 수목과 깊은 인연을 이어왔을까? 사찰 숲은 이들 수종이 의탁해 살아갈 수 있는 좋은 생육환경이었고, 스님들은 이들 수목의 생육특성과 이용법을 대를 이어 끊임없이 전수하였으며, 그래서 이들 수종의 종자와 잎에서 생산된 특산품을 국가의 공납품(의약품, 제사용품)이나 사찰과 민간의 생활용품(기름, 의약품, 기호품)으로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산불 막고 민간약 대용
동백나무 민간 연료로
비자나무는 약용 사용

천년 농경사회 지탱한
사찰의 역할 주목해야

먼저 동백나무부터 살펴보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백련사(천연기념물 151호), 선운사의 동백숲(천연기념물 184호)은 물론이고, 화엄사, 옥련사, 불회사 등에서도 동백숲을 볼 수 있다. 남부지방 사찰에 동백숲이 많은 이유로 몇몇 전문가들은 산불의 피해를 막고자 산불에 강한 상록성 동백나무를 방화 수림대(防火樹林帶)로 활용한 전통생태지식의 사례라고 설명한다. 선운사의 경우, 만세루에서 영산전과 명부전을 향해서 찍은 ‘조선고적도보’(1922)에 실린 사진을 참고하면, 90여년 전 그 당시에도 동백숲이 무성했음을 알 수 있다.

▲ 백련사의 동백나무 숲.

조선시대의 ‘동국여지승람(1481년)’에 백련사는 ‘남쪽 바다에 임해 있고 골짜기 가득히 송백이 울창하여 동백 또한 곁들여서 수목이 싱싱하게 푸른 모습이 사계절을 통해 한결같은 절경’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내용을 참고하면,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고려시대에도 산불의 피해로부터 사찰을 지키고자 가람 주변에 동백나무를 심어온 전통생태지식이 사찰에 면면히 전승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사찰의 동백나무 숲에 대한 생태적 해석과는 별도로, 동백나무 종자에서 나오는 기름(동백유)의 가치도 무시할 수 없다. 농경사회에서 동백유는 식용유, 등유, 민간약의 대용품이나 머릿기름과 미용에 사용되었다. 오늘날 동백유는 식물유지 중에서 올리브유와 함께 올레산 함유량이 가장 많고, 리놀산, 리놀렌산 함유량이 적기 때문에 산화가 잘 안 되는 안전한 유지로 알려졌다. 화석연료가 없던 시절 스님들은 동백유의 가치를 정확하게 인식했고, 농경사회에서 동백유를 식용과 미용에 제대로 활용하였던 셈이다. 동백유의 가치는 일제강점기에 콩기름[大豆油]보다 3배 이상 비싼 가격으로 판매(동아일보 1938년 12월6일자)된 기사로도 확인된다.

차나무 역시 동백나무만큼 남부지방의 사찰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기호품인 차를 재배하던 전통이 남부지방의 사찰에 전승된 이유는 먼 옛날 선진 문화의 전파자였던 스님들의 활동상을 무시할 수 없다. 당나라를 왕래했던 스님들의 차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오늘날 쌍계사, 선암사, 화엄사의 차나무로 확인된다. 중국에서 신라시대에 도입된 차의 첫 재배지[始培地]에 대한 논란이 없잖아 있지만, 초의선사가 ‘동다송’에 “지리산 화개동에는 차나무가 사오십리나 잇따라 자라고 있는데, 우리나라 차밭의 넓이로는 이보다 지나친 것을 헤아릴 수가 없다”고 언급한 내용처럼, 쌍계사는 오래전부터 차와 밀접한 관계를 가져왔다.

▲ 선암사의 차나무 숲.

차나무와 인연이 있는 사찰 중, 천년 세월 동안 야생 차나무를 지켜온 선암사의 저력도 간과할 수 없다. 경북대 임학과 박용구 명예교수는 선암사의 차나무가 유전적으로 일본 소엽품종의 혈통이 섞이지 않은 야생종이라고 밝혀낸 바 있다. 박 교수는 화분비산(花粉飛散)으로 종자를 맺는 차나무의 특성과 결부지어 선암사가 야생차나무를 지켜올 수 있었던 이유를 화분오염을 막을 수 있었던 선암사의 지형적 특성을 들고 있다. 다른 지역의 차나무들이 일제강점기에 도입된 일본 차나무의 꽃가루에 의해서 야생성을 지켜낼 수 없었던 것에 비해, 선암사는 조계산을 비롯한 주변 산악 지형 덕분에 외래 화분의 오염 없이 야생의 혈통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해석이다.

동백유와 차보다 사찰에서 생산된 비자(榧子; 비자나무 열매)는 좀 더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백성들의 횟배를 치료한 구충제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 왕실의 제사용품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비자나무는 백양사의 비자나무 숲(천연기념물 153호)과 금탑사의 비자림(천연기념물 239호)이 대표적이다. 그밖에 장흥 보림사의 비자림과 함께 선운사, 불갑사, 백련사, 구암사 터의 비자나무 등을 들 수 있다.
비자나무에 대한 역사상의 기록은 ‘고려사’에서 먼저 찾을 수 있다. ‘고려사’에는 문종 7년에 탐라국에서 조정에 비자를 바쳤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밖에 중국 송나라 사신 서긍이 저술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토산(土産) 조에도 비자가 서술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경상도 동래현과 전라도 나주목 해진군, 영암군, 영광군, 강진현, 함평현, 무안현, 장성현, 장흥도호부의 보성군, 고흥현, 진원현,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의 토공(土貢) 등에 비자가 등재되어 있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 토산 조에는 경상도 고령현, 남해현, 고성현, 전라도 나주목, 함평현, 장흥도후보, 제주목, 보성군, 흥양현에 비자나무가 기록되어 있다.

남부지방의 사찰에 비자나무가 숲의 형태나 단목으로 자라는 이유는 조선시대에 비자나무의 열매를 사찰에서 공물로 바쳤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백양사의 절목에는 복분자와 함께 비자 25말(榧子二十五斗), 회화나무 꽃 봄가을 2말(槐花春秋二斗式), 송홧가루 2말(松花春秋二斗式)등이 공납품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다산 정약용이 남긴 한시 ‘승발송행’을 통해서 강진 백련사도 비자 공납의 사역(寺役)을 감당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조정은 구충제를 확보하고자 각 사찰에 비자나무를 키우게 하였고, 그 흔적들이 오늘날도 호남 해안가의 각 사찰에 비자나무로 남아 있는 셈이다. 결국, 사찰 숲에서 키워낸 비자는 기생충으로 횟배를 앓던 백성들의 고통을 구제해준 특효약이었던 셈이다. 백양사의 경우, 1970년대만 해도 주변 농민들에게 비자 채취를 개방하였고, 농민들은 비자 구충제 판매로 농가소득에 보탬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비자는 조선시대 왕실에서 관리하는 과일이기도 했다. ‘중종실록’(1519)에는 “각 고을에서 장원서(掌苑署)에 수납(輸納)하는 과일 중에 비자(榧子) 같은 것은 그 수량이 너무 많아, 매양 그 수량을 감하도록 아뢰고 싶었습니다”라는 기사가 나온다. 장원서는 조선시대 화초·과물 등의 관리를 관장하고자 설치된 관서인데, 조정에서 왜 비자를 관리했을까? 그 답은 비자가 종묘대례나 선왕 선후의 능에서 제사를 지낼 때, 필요한 제향 용품이었기 때문이다.

“제향(祭享)에 쓰이는 비자(榧子)·표고(古)는 제주(濟州)에서 봉진(封進)하던 것인데, 정봉(停封)하라는 하교가 있었으니, 마땅히 선혜청(宣惠廳)으로 하여금 공가(貢價)를 주어 진배(進排)하게 하소서”라는 ‘영조실록’(1769)의 기사는 비자가 제향 용품임을 뒷받침한다.

조선 조정이 비자를 정말 과일로 치부했을까? ‘고종실록’(1881)에 황태후(皇太后)의 장례 시에 “전례에 따라 은행 대신에 연꽃 열매, 개암 대신에 비자[依前例, 銀杏代蓮子, 榛子代榧子]”를 사용한다고 언급되어 있음에 비추어 볼 때, 과일보다는 제향 용품으로 더 중요하게 여겼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성리학을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삼은 조선 조정이 위패용 율목의 원활한 조달 못지않게 비자 조달 역시 중요하게 여겼고, 그 책무의 일정 부분을 사찰이 감당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조정과 백성들에게 필요했던 비자와 동백유와 차의 생산을 감당했던 사찰의 책무는 더 이상 존속되지 않는다. 과학과 기술이 대체품목을 개발했거나 대면적 재배와 대량생산으로 더 이상 사찰의 기여가 불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불교계는 남부 지방 사찰의 비자나무, 동백나무, 차나무의 보전에 더 각별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이들 수목이 천년 세월 동안 농경사회에 필요한 생활용품의 생산을 위해 사찰의 가호를 받아온 전통문화경관이자 자연유산이기 때문이다.

전영우 국민대 산림환경시스템학과 교수  ychun@kookmin.ac.kr

[1315호 / 2015년 10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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