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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북한산 노적사-중흥사-태고사

거북봉에 올라 ‘오래된 오늘’을 노래하다

▲ 태고보우 원증국사 탑은 태고사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 선가에서 인가를 중시한다면 한국의 임제선 초조는 태고보우 원증국사다.

“조주는 차 마셨고
운문은 떡 먹었다.
태고가 삼킨 건
‘맛없는 음식’”

한양(서울) 북쪽에 있는 큰 산 북한산(北漢山). 백운대와 인수봉, 만경대가 이 산을 상징하는데, 세 봉우리가 뿔처럼 툭 올라섰다 해서 고려 사람들은 삼각산(三角山)이라 했다. 저 바다 건너 유럽 알프스 산맥에도 뿔 달린 큰 산 하나있다. ‘알프스 초원의 뿔’ 마터호른(Matterhorn). 사진만 보아도 설산이 뿜어내는 장엄미가 느껴진다. 그러나 뿔은 하나다. 북한산은 멋진 뿔을 세 개나 달고 있다.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과 겨울 따라 제 모습 달리해가며 서울을 호령해 왔으니 마터호른 보다 역동적이다.

세 뿔 아래 또 하나의 멋진 봉우리 서 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슬이 쌓여간다는 노적봉(露積峰). 그 이슬 너무도 달콤해 감로(甘露)라 하는데 한 방울만 마셔도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다’는 이치를 간파할 수 있다. 마시는 사람 마음 따라 108번민도 한 순간에 녹여낼 수 있다 하니 상서로운 이슬이다. 단언컨대 그 감로, 이 땅의 그 어느 산보다 북한산이 풍부하게 품고 있다.

▲ 절과 절을 잇는 길도 붉게 물들었다.

서늘한 가을바람 도반 삼아 선시 한 수 보고 싶어 ‘선시감상사전’(석지현 역음. 민족사)을 펴 보았더랬다.

‘내가 사는 이 암자 나도 모르나니, 깊고 깊어 치밀하나 비좁지 않네’로 시작해 ‘노래와 춤은 끝나고 돌아간 다음, 푸른 산은 예대로 숲과 물을 마주했네’로 끝나는 ‘태고암가’에 마음 한 자락 뺏기고 말았다. 그 선사가 남긴 향훈 한 움큼 잡고 싶어 단풍나무가 쏟아내는 붉은 빛 길 따라 산을 오르는 중이다.

노적봉 아래 절 하나. 조선 숙종(1712년) 당시 북한산성 축조할 때 팔도도총섭(전국 승려 통솔 직책)을 맡았던 성능 스님이 저 절을 지었는데 그 때는 ‘진국사(眞國寺)’라 했다. 1960년대 무위 스님이 폐사된 사찰을 다시 중창하며 ‘노적사’라 고쳤다. 북한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성능 스님을 기억해야 한다. 북한산의 형세와 지세, 그리고 산성의 윤곽과 절, 문루, 장대(將臺), 창고 등을 상세하게 기록해 놓은 ‘북한지(北漢誌)’를 남긴 인물이다. 그 북한지, 저 중흥사에서 쓰였다. 그리고 불교사에 길이 남을 선지식 태고보우 원증국사의 향훈도 저 도량에 배어있다.

▲ 노적봉 아래의 노적사는 ‘북한지’를 남긴 성능 스님이 창건했다.

“조주에 사는 옛 조사, 앉은 채 천 명 성인의 길을 끊었네. 칼날(취모검)을 얼굴에 들이대도, 온몸에 구멍 하나 없어라. 여우 토끼의 자취 없는데, 문득 뛰어드는 사자. 뇌관(牢關)쳐 부수니, 맑은 바람 태고(太古)로부터 불어온다”

13세에 광지 선사 문하로 들어간 후 국가고시(교종 승과)에 합격(26세)하고도 “교학은 고기 잡는 통발”이라며 선 수행에 더 매진한 보우는 38세에 저 오도송을 내놓았다. 원효의 화쟁회통 정신을 이어 ‘5교홍통 9산원융’을 주장하며 5교9산 통합에 나섰던 스님. 한양천도를 비롯해 고려 말 왕권과 정치부패, 그리고 불교폐단까지 개혁하려 했던 보우를 공민왕이 끝까지 믿고 밀어붙였다면 고려는 조금 더 긴 역사를 썼을 것임에 분명하다. 태고보우를 조계종은 중흥조로, 태고종은 종조로 모시고 있다.

중흥사에 보우가 머물자(41세) 절과 산은 새 활기를 띠었고 보우의 감로법문을 들으려는 사람들 발길이 줄을 이었다. 좀 더 조용한 공간이 필요했을 게다. 눈 푸른 선객을 제접할 방 하나 필요했을 것이다. 동쪽 솔밭 거북봉 아래 작은 암자 하나 짓고 태고암(현 태고사)이라 했다. 중국의 석옥청공도 한 번 보고는 그대로 반해버렸다는 82구 연작시 ‘태고암가(太古庵歌)’는 이 암자서 지어졌다.

▲ 태고보우가 머물면서 북한산은 정토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사진 아래 지붕만 보이는 곳이 태고사이고, 멀리 보이는 절이 중흥사. 태고사, 중흥사 모두 도량불사가 한창이다.

그 옛날 암자는 아주 작았을 터. 지금의 태고사만 보아도 사면 중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서남쪽이 다소 트여 있으나 태고암이 지금보다 좀 더 위쪽에 있던 점과, 큰 나무가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태고암은 사방 안에 갇혀진 암자였을 게다.

보우에게 좁고 넓다는 이분법적 공간성은 가당치 않다. ‘한 털 위의 태고암이여, 넓어도 넓지 않고 좁아도 좁지 않다’는 보우다. 쌀 한 톨, 소금 한 톨도 지고 올라가야 하는 절. 오신채도 쓰지 않는 태고의 절밥 맛은 어떨까? ‘맛있다, 맛없다’라는 평가 또한 보우에게는 거추장스런 잣대일 뿐. 그런데 놀랍게도 보우는 그 맛 하나로 자신은 운문, 조주와는 다르다는 점을 분명하게 짚어내고 있다.

‘맛없어도 음식이며 맛있어도 음식이니, 누구든 식성 따라 먹기에 맡겨 두네. 운문의 떡과 조주의 차여, 이 암자의 맛없는 음식에 어이 비기리’

“어떤 것이 부처와 조사를 초월한 도리냐”는 물음에 운문은 “호떡 하나 먹어보라” 했다. 달마가 동쪽에서 온 뜻, 불법의 대의를 묻는 물음에 조주는 “차 한 잔 하라” 했다. 운문의 떡과 조주의 차, 그리고 맛없는 음식은 명칭만 다를 뿐 체득된 깨달음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같다. 그러나 떡은 운문의 것이고 차는 조주 것이지 보우의 것은 아니다. 보우가 삼킨 건 ‘맛없는 음식’이다.

▲ 사진 오른쪽이 태고보우의 사리가 안치된 보월승공탑(寶月昇空塔). 사나사, 양산사, 청송사에도 스님의 사리가 모셔져 있다.

7월의 한 여름. 보우는 태고암을 떠나 중국 하무산 천호암으로 길을 떠났더랬다. 일찍이 “중국 남방에 임제정맥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는 무극 스님의 전언에 중국행을 결심했지만 사부대중의 중흥사 주석 요청을 차마 사양만 할 수 없어 미뤄두던 차였다.

태고보우와 석옥청공의 만남. 보름 동안 나눴던 법거량은 임제선을 표방하는 조계종 불교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보우가 천호암을 떠나려는 찰나 청공은 묻는다.

“공겁 이전에도 태고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공(空)은 태고의 가운데서 생겼습니다.”

청공은 “부처님 법이 동방으로 갔다”며 가사와 주장자를 주었다. 인가 기록에 따르는 한 한국의 임제선 초조는 태고보우다.

‘태고암가’를 본 청공의 가슴에도 파문이 일었나 보다. 석옥 스님이 직접 쓴 ‘태고암가 발문’을 보면 분명 그렇다.

“(태고와) 이별할 때가 다달아 전에 지었던 태고가를 내어 보였다. 나는 그것을 밝은 창 앞에서 펴 보고 늙은 눈이 한층 밝아졌다. 그 노래를 외워 보면 순박하고 무거우며, 그 글귀를 음미해 보면 한가하고 맑았으니, 참으로 공겁 이전의 소식을 얻은 것으로 요즘의 첨신(尖新)하고 현란한 것들에 비할 것이 아니었으니 ‘태고’라는 이름이 틀리지 않았다.”

그리고는 시 한 수 적는다.

“먼저 이 암자가 있은 뒤 비로소 세계가 있었나니, 세계가 무너질 때에도 이 암자는 무너지지 않으리. 암자 안의 주인이야 있고 없고 관계없이, 달은 먼 허공을 비추고 바람은 온갖 소리를 내리.”

태고암과 중흥사 사이로 부는 바람이 ‘태고암가’ 한 수를 전한다.

“이 암자의 본이름은 태고가 아닌데, 오늘이 있으므로 태고라 부른다.”

그렇다면 내가 있기에 저 세 뿔 있고, 저 세 뿔 있기에 나도 있다. 서늘한 바람이 뺨을 스쳐간다. 중흥사와 태고암을 잇는 길에 들어차는 바람도 저 먼 옛날부터 불어오던 그 바람이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본지 상임논설위원penshoot@beopbo.com 

 

[도움말]

 

길라잡이
들머리는 서울 은평구 진관동 북한산성 탐방지원센터. 북한동역사관까지 계곡 탐방길과 차길이 있는데 계곡길을 권한다. 중성문을 지나면 노적사다. 중흥사에 이르기 직전 두 갈래 길이 나온다. 한 길은 중흥사 가는 길이고, 다른 한 길은 부왕동왕문으로 향한다. 왼쪽 중흥사 길로 들어서야만 한다. 중흥사에서 태고사까지는 10분. 북한산 대피소쪽으로 걸음 해야 한다. 총 거리는 3.6km, 1시간30분이면 충분하다.

이것만은 꼭!

 
북한동역사관 : 북한산 이름의 유래와 역사, 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규모는 작지만 북한산에 대한 핵심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원효봉과, 백운대, 만경대, 노적봉을 역사관 앞 전망대에서 감상할 수 있다.

 
태고사 원증국사 탑비 : 태고사 대웅전 바로 옆에 있는데 태고보우 국사의 내력이 새겨져 있다. 목은 이색이 글을 짓고, 당대 명필가였던 권주가 썼다. 현재 태고사는 도량 정비 중이어서 어수선하지만 이 탑비만큼은 꼭 한 번 봐야 한다.

 
태고사 석조 산신각 : 태고사 주변에 있던 막돌과 흙으로 지은 듯한 산신각이다. 바위를 축대 삼아 지었는데 우리나라 산신각 중 가장 멋진 작품으로 손꼽힐만하다.

[1316호 / 2015년 10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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