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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을 사색하다

기자명 재마 스님
  • 법보시론
  • 입력 2015.10.26 15:22
  • 수정 2015.10.26 15:25
  • 댓글 0

현대사회의 쾌락주의와 공리주의는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자연재해나 노화, 죽음까지 제거하고 극복하려고 한다. 또한 죽음을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앗아가는 부정적인 의미로만 부각시킨다. 하지만 죽음은 인간이 피하고자 한다고 피해지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살아있는 생명이라면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찾아온다.

지난 13일 종로의 한 고층빌딩에서 20세 젊은이가 투신자살을 하였다. 이를 목격한 이들은 놀람과 당황, 공포감들이 따라다닐 것이다. 갑작스럽게 가족과 친구를 잃은 이들은 더할 것이다. 평소 죽음이 나쁘고 외면하고 싶은 대상이었다면 더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자살은 자신에게 가하는 최고의 폭력이다. 이 폭력은 설사 그 사람이 죽고 없어진다 해도 연기적으로 볼 때 관련된 이들에게도 폭력이 되면서 그 사회에 영향을 미친다.

한국의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1위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생명생존국민운동본부의 자료에 의하면, 고용불안에 시달리기 시작한 2007년부터 2011년까지 자살로 사망한 수가 전쟁터에서 사망한 숫자보다 더 많다. 이 기간 이라크 전쟁에서 3만8625명,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1만4717명이 희생되었다. 같은 기간 우리나라 교통사고로 숨진 사람들은 1만4719명, 이 모두를 합친 수보다 더 많은 7만1916명이다.

숫자로만 표기하니 어느 만큼인지 상상력이 부족한 필자 같은 이들을 위해 어느 블로그에서 알기 쉽게 풀이한 표현을 빌어본다. 2013년 한해 자살한 수는 1만4427명으로, 이는 2시간에 3명 정도가 자살을 하는 것이다. 저녁 6시가 되면 고등학교 한 학급 학생들 30명이 자살하고, 하루가 지나면 관광버스 1대의 탑승객인 40명이 자살한다. 월급 받는 24일이 되면 KTX 8냥 기차의 전체탑승객인 950명이, 한 달에 한 번씩 300세대 아파트 전체주민 약 1240명이 자살을 하고, 약 8개월마다 울릉도의 전 주민 약 1만 명이 자살을 하고, 1년이 되면 서귀포시민 1만5000명만큼의 인구가 없어진다는 것이다(http:// freest80.blog.me). 이제 이 나라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망한민국’ ‘헬(hell-지옥)조선’이라고 부른다. 헬조선에 살고 있는 청춘들의 자살은 10~30대 연령대의 사망원인 1위를 차지한다.

청춘들이 혐오하는 이 땅과 이 시대에, 우리에게 꼭 필요한 시련과 고난을 이겨내는 회복과 치유를 위한 심리적 회복탄력성(RQ-Resilience Quotient), 마음의 ‘탄력성(resilience)’을 어떻게 키워야 할까? 권력자들도 부자들도, 가난한 이 땅의 청춘들도 죽음에 대한 명상과 감사와 나눔 일기를 써보라고 권한다. 죽음에 대한 명상을 지속적으로 하면, 삶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욕망의 거품을 뺄 수 있으며 평등함을 기를 수 있다. 빈 몸으로 온 이 세상에서 감사하고 나눌 것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될 것이다. ‘감사(gratitude)’라는 말에는 삶에 대한 놀라움과 경이, 진심어린 기쁨과 긍정적인 태도 등이 모두 녹아있다.

14세기 티베트불교의 겔룩파를 창시한 쫑까파의 ‘보리도차제광론’에서는 죽음에 대한 3가지 자각을 통해 죽음을 내면화함으로써 죽음이 왔을 때 공포로부터 벗어나고 삶을 보다 활기차게 살 수 있다고 가르친다. 첫째로 죽음은 반드시 누구에게나 찾아오며, 살아갈 날과 살아갈 동안 사랑하고 행복할 수 있는 날은 계속 줄어든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다. 둘째는 죽음의 시간이 정해지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정해지지 않고, 죽을 수 있는 조건들은 다양하기 때문에 이 몸이 무너지기는 너무 쉽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셋째는 죽음에 이르렀을 때는 친구도, 재물도, 우리의 몸도 어떠한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오직 수행(공덕)만이 나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명상을 통해 우리 삶의 유한함과 변화의 창조성을 적극적으로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암 병동에서 치료중이지만 죽음을 앞둔 젊은 청년들, ‘빤냐’와 ‘까루나’는 ‘오늘 하루’를 살 수 있는 것에 기쁨과 감사의 눈물을 흘린다. 한 호흡이라도 더 자신과 세상을 향해 자애(metta-)의 마음을 담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재마 스님 중승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 jeama3@naver.com


[1316호 / 2015년 10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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