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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극락정토와 성현

기자명 이제열

아미타불은 법신이며 보신이며 화신

▲ 김천 고방사 아미타여래설법도. 보물 제1854호.

사리불이여, 그 부처님을 어째서 ‘아미타불’이라 하는 줄 아는가? 그 부처님의 광명이 한량없이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어도 조금도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또 그 부처님의 수명과 그 나라 인민의 수명이 한량없고 끝이 없는 아승지겁(阿僧祗劫)이므로 아미타불이라 한다. 아미타불이 부처가 된 지는 벌써 열 겁[十劫]이 지났다. 사리불이여, 그 부처님에게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성문(聲聞) 제자들이 있는데 모두 아라한들이다. 어떠한 수학(數學)으로도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으며 보살대중의 수도 또한 그렇다. 사리불이여, 극락세계는 이와 같은 공덕장엄으로 이루어졌느니라. 사리불이여, 극락세계에 태어나는 중생들은 다 보리심에서 물러나지 않는 이들이며 그 가운데는 일생보처(一生補處)에 오른 이들이 많아 숫자와 비유로도 헤아릴 수 없고 다만 무량(無量) 무변(無邊) 아승지(阿僧祗)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대승, 중생은 이미 부처
불성, 온갖 성현 발원지

한번 불성 깨닫게 되면
반드시 부처가 되게 돼

대승불교의 가르침에 등장하는 부처님들은 모두 중생의 본심(本心)인 불성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또한 부처님들이 건립하신 정토 역시 불성을 떠나서는 이야기 할 수 없다. 대승경전에 나오는 부처님들은 불성을 인격화시킨 것이며 정토는 그 불성을 공간화, 세계화 시킨 것이다. 부처와 중생과 세계는 불성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불성은 부처 자체이고 중생의 근본이며 세계의 실상이다. 오로지 세상에는 불성만이 참되고 한가지로 존재하므로 일진법계(一眞法界)라 이름 한다. 아미타경에서는 이와 같은 불성과 일진법계를 아미타와 극락세계라는 명칭으로 부르고 중생들로 하여금 보리심을 발하여 성불의 대열에 들게 하고 있다. 불성은 중생 마음 안에서 언제 어디서나 빛을 발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중생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불성은 고요하기만 한 정지태적 존재가 아니라 온갖 청정한 바라밀을 흘려보내는 능동태적 존재이다. 중생의 무명과 번뇌 속에서도 불성(부처님)은 언제나 자신에게 본래부터 갖추어진 한량없는 공덕들을 분출시킨다.

대승불교의 최고 논서인 대승기신론에서는 불성을 부처님의 몸, 즉 불체(佛體)로 표현하고 이 불체에는 한량없고 부사의 한 공덕이 가득차 넘친다고 가르친다. 불성에는 본래부터 중생 자신과 세계를 성불시키려는 서원이 깃들어 있으며 능력이 갖추어져 있다. 이를 대승기신론에서는 본원(本願)과 법력훈습(法力薰習)이라고 한다. 본원은 중생이 성불하기 위해 일부러 서원을 발하기 이전에 이미 마음 안에 성불에 필요한 원이 갖추어져 있는 것이고 법력훈습은 불성이 중생을 제도하는 자연 발생적 힘이라 할수 있다.

이를 아미타불과 연결하여 설명하면 아미타불은 중생과 세계를 벗어난 초월자가 아니라 중생의 마음 안에 존재하면서 동시에 법계에 충만한 동체자이다. 본문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아미타불을 광명과 수명이 끝이 없는 부처님이라고 한 것은 불성은 무명과 미혹과 번뇌를 떠나 홀로 밝아 있기 때문이며 생사를 벗어나 능히 사라지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불체에 세 종류가 있다고 한다. 이른바 삼신불이 그것으로 법신과 보신과 화신이다. 이를 불성에 맞추어 살펴보면 불성 그 자체는 법신이고 불성이 지니고 있는 한량없는 공덕들은 보신이고 법신이 공덕을 통해 중생들을 제도하는 행위는 화신이다. 삼종(三種)의 불체가 불성인 것이다. 이러한 불성은 이 우주 법계와 더불어 동체이기 때문에 삼종의 불체는 중생계를 떠나지 않고 언제나 머물러 있다. 부처님이 법계에 상주한다는 말은 여기서 나왔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아미타불은 이 셋 가운데에 어떤 부처님일까?

많은 사람들은 아미타불을 보신의 개념으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아미타불은 사십팔원이라는 대원을 성취하여 극락이라는 정토를 건립하였으므로 공덕의 측면에서 보신불의 성격을 지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아미타불의 불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견해라 할 수 있다.

아미타불은 법신이며 보신이며 화신의 성격을 띤다. 불성의 입장에서는 법신이며 법장비구의 사십팔대원의 입장에서는 보신이고 극락에 태어날 중생의 입장에서는 화신이다. 경의 말씀에 아미타부처님이 성불한지 이미 십겁이 지났다는 의미는 아미타불은 법장비구 시절 세자재왕여래를 만나 출가를 하기 전부터 이미 부처의 지위에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불성은 중생이 수행을 하건 안하건 진리를 깨닫건 못 깨닫건 부처 그 자체로서 아무런 변동이 없다는 뜻과 일치한다. 대승불교의 가르침에서 볼 때에 중생들은 이미 성불한 것이며 사바세계는 그대로 정토가 된다. 또 극락세계에는 수많은 성문과 연각과 보살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말씀은 불성에는 일체의 무루공덕이 갖추어져 있어 성문과 연각의 법을 갈무리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불교에서는 성문과 연각과 보살을 성인으로 간주한다. 성문은 스승의 가르침에 의해 수행하여 아라한과를 얻은 성인이고 연각은 홀로 연기법을 발견하고 번뇌를 소멸해 아라한과를 얻은 성인이다. 보살은 부처의 지위를 목적으로 바라밀을 닦아 불성을 깨달은 성인이다. 불성은 바로 이 같은 성인의 경지를 배출시키는 발원지이다. 불성에는 미혹하기 그지없는 범부 중생도 자리하고 성문 연각 보살 불도 자리한다. 하지만 불성은 일체의 더럽고 깨끗한 법들을 받아들이지만 미혹해지거나 생멸하지 않는다. 또한 극락정토에 일생보처(一生補處)보살들이 많다고 하였다. 여기서 일생보처 보살이란 한번만 태어나면 부처의 과를 이루게 되는 보살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 세상에 오시기 직전 호명이라는 이름을 지닌 일생보처보살이었다. 그런데 다른 경전에서는 일생보처보살은 이 세상에 오기 전 머무는 곳이 도솔천이라는 천상이라고 설한다. 모든 일생보처보살은 일단 도솔천에서 마지막 수행을 한 끝에 이 세상에 내려와 성불을 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아미타경에서는 일생보처보살이 머무는 곳을 도솔천이 아닌 극락정토로 이야기 한다. 이는 부처를 이루는 일은 불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한번 불성을 깨닫게 되면 그 중생은 이미 부처가 되게끔 정해져 있다는 의미이다. 

이제열 불교경전연구원장  yoomalee@hanmail.net


[1316호 / 2015년 10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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