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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작자미상, ‘헤이지 모노가타리 에마키’

기자명 조정육

“안락을 좇는 대신 민중 속으로 들어가 세상을 구제할 것이다”

▲ 작가미상, ‘헤이지 모노가타리 에마키(平治物語繪卷):산죠전(三條殿)의 화재’, 13세기, 카마쿠라(鎌倉)시대, 종이에 색, 높이 41.3cm, 보스턴미술관.

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의 말과 행동을 대상으로 한다. 말과 행동은 마음에 따른다. 그러나 마음이 항상 말과 행동을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몸이 생각대로 따라주지 않을 때 우리는 ‘마음 같지 않다’라고 표현한다. 마음은 생각으로 끝나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아무리 많은 이론을 마음속에 담고 있어도 말과 행동으로 전환되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이론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 우리 삶이다. 다겁생에 걸쳐 익혀 온 습관이 쉽게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말과 행동이 마음에 따르게 하려면 훈련이 필요하다. 평생 수행하는 사람이 일정 기간을 정해 놓고 용맹정진하는 이유도 몸을 조복시키기 위해서다.

일본 정토종을 개창한 호넨
아미타불 부르는 누구든지
극락왕생할 수 있다 가르쳐
위기 느낀 관승 모함에 유배

일본 정토종(淨土宗)을 개창한 호넨(法然,1133~1212) 스님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이론과 행동의 일치였다. 호넨겐쿠(法然源空) 스님은 호넨쇼닌(法然上人) 혹은 엔코대사(圓光大師)라고도 부른다. 처음에는 히에이잔의 엔랴쿠지에서 계를 받고 관승(官僧)으로 승려 생활을 시작했다. 그대로 계속 갔더라면 목에 힘주며 산 무명의 스님이 되었을지 몰라도 오늘날의 호넨은 없었을 것이다. 호넨 스님은 10~11세기경에 활동한 일본의 겐신(源信) 스님의 ‘왕생요집(往生要集)’을 읽고 큰 감명을 받는다. 특히 43세에 읽은 선도(善導,613~681)대사의 ‘관무량수경소’를 읽다가 ‘일심으로 오롯이 아미타의 명호를 염불한다’는 문장을 접하고 전수염불(專修念佛)을 결심한다. 선도대사는 중국 정토종의 스승이다. 그때부터 호넨 스님은 구원을 받는 데 있어서 필요한 유일한 것은 염불이라는 가르침을 천명한다. 아미타불은 법장비구시절에 48대원을 세워 극락정토를 만든 부처다. 전수염불은 ‘염불이야말로 절대적 존재인 아미타에 의해 선택된, 극락에 왕생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호넨 스님은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다. 염불에 대한 확신이 생기자 천황의 허가를 얻지 않고 정토종을 열어 중생교화에 뛰어들었다. 둔세승(遁世僧)의 시작이었다. 둔세승은 흰옷(白衣)을 입은 관승과 달리 ‘검은 옷(黑衣)의 스님’으로 불리었다. 그의 밑으로 수많은 제자들이 몰려 들었고 날로 세력이 커졌다. 관승들은 긴장했다. 그들의 모함으로 호넨 스님이 궁녀와 밀통했다는 혐의가 씌워졌다. 그의 포교가 여인들에게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유배지로 보내졌고 그가 가르친 전수염불은 금지되었다. 헤이안(平安,794~1192)시대가 끝나가고 가마쿠라(鎌倉,1192~1336)가 시작되는 과도기의 일이었다.

호넨 스님이 둔세승으로 중생교화에 뛰어든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일본에서 승려가 된다는 말은 관승이 되는 것을 뜻한다. 관승은 나라에서 정한 승니령(僧尼令)에 의해 공무원처럼 움직이는 수행자다. 승니령은 8세기 초엽에 제정되었는데 승(僧:비구)과 니(尼:비구니)에 관한 각종규제를 정한 법률이다. 승려에 대한 모든 사항은 정부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었다. 즉 정부의 허가 없이 출가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그 허가를 얻는 득도(得度)에 대해서도 숫자를 제한했다. 승려는 사원 이외의 장소에서 종교 활동을 할 수 없었고, 승려 중에서 선출된 승관이 관리했다. 호넨 스님이 국가의 허가 없이 중생교화에 나선 것은 승니령을 위반한 행동이었다.

둔세승이 출현하게 된 배경에는 나라(奈良)시대의 교키(行基,668~749) 스님과 헤이안 시대의 구야(空也,903~972) 스님이 좋은 선례가 되었다. 교키 스님은 관승이었으나 관승을 이탈해 민간에서 포교했다. 그는 사도승(私度僧)과 함께 강 위에 민중들을 위해 다리를 놓고 버려진 시체를 수습하는 등 가난한 사람을 구제했다. 그는 승니령을 위반한 죄로 탄압받았으나 도다이지(東大寺)의 대불을 조성할 때 교키 스님의 도움이 필요했던 쇼무(聖武)천황은 그를 대덕(大德)이라 칭송하고 대승정에 임명했다.

구야 스님은 항상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며 민중교화에 나섰기 때문에 ‘아미타히지리’라고 불렸다. 히지리는 성인(聖人)을 뜻한다. 구야 스님은 시정에 숨어 살면서 빈민과 병자들에게 봉사했기 때문에 ‘이치히지리(市聖:저자거리의 성인)’라고도 불렸다. 일본불교사에서 히지리의 등장은 귀족불교가 민중불교로 바뀌는 분수령이 되었다. 히지리에 의해 기존의 폐쇄적인 국가불교가 민중불교로 전환됐다. 히지리에 의해 시작된 민중불교의 전통은 둔세승과 묘코닌(妙好人)에게 계승되었다. 묘코닌은 스님이 아닌 재가불자로서 아미타불을 믿고 삼독심을 항복받은 사람들이다. 가마쿠라 이후의 신불교는 히지리와 묘코닌에 의해 유지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이다. 성난 바람을 타고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꽃은 폭발할 듯한 기세로 전각을 집어삼킨다. 무너져 내리는 기둥, 사방으로 튀는 기왓장, 타닥거리는 문짝이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스럽다. 아수라장이다. 잿더미가 되어 쓰러지는 건물 잔해 속으로 군사들의 함성소리가 쏟아진다. 창칼을 휘두르는 군사들의 잔악상은 불길보다 더 공포스럽다. 칼날이 부딪치는가 싶더니 단말마적인 비명소리가 하늘로 치솟는다. 황궁수비대는 목이 달아났다. 도망가던 시녀들은 우물에 떨어졌다. 저항하던 남자는 사납게 내리치는 무사의 칼을 맞아 몸이 두 동강이 났다. 목이 반쯤 잘린 남자의 시신에서 피가 솟구친다. 피가 튀고 팔 다리가 굴러다닌다. 같은 붉은색인데 불꽃과 시신의 피는 전혀 다르다. 말 탄 병사가 젖가슴을 드러낸 여인의 시신을 짓밟고 달려간다. 여인의 신음소리는 시커먼 연기에 묻혀 잦아든다. 지옥 같은데 지옥이 아니다. 현실이다. 호넨 스님이 살았던 현실이다.

‘헤이지 모노가타리 에마키(平治物語繪卷)’는 지옥 같은 현실을 그린 작품이다. 카마쿠라(鎌倉)시대를 대표하는 명작인데 내란으로 칼과 창이 난무하는 잔인무도한 참상을 파노라마처럼 펼쳤다. 모노가타리(物語)는 이야기라는 뜻이다. 협의적인 의미로는 헤이안시대부터 카마쿠라시대에 걸쳐 만들어진 산문 형식의 문학 작품을 지칭한다. 에마키(繪卷)는 이야기를 그린 두루마리로 에마키모노(繪卷物)라고도 한다. ‘헤이지 모노가타리’는 1159년에 실제로 발생한 ‘헤이지의 난’을 소재로 한 서사적인 장편소설로 1220년경에 발표되었다. ‘헤이지의 난’은 당시에 권력을 쥐고 있던 미나모토(源)가문과 타이라(平)가문이 벌인 내전이었다. 권력쟁취를 위해 끊임없이 죽고 죽이는 잔악무도한 싸움이었다. ‘헤이지 모노가타리 에마키’는 이 장편소설을 그림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그 중에서 오늘 소개한 장면은 ‘산죠전(三條殿)의 화재(火災)’부분이다. 소설로 묘사되었던 ‘헤이지 모노가타리’가 에마키의 형태로 그려진 것은 13세기 후반이었다. 이 두루마리그림은 당초에 15권 정도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단편적인 장면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유난히 재난사고가 많았다. 큰불, 회오리바람, 기근, 대지진 등의 자연 재해가 계속되었고 여기에 후쿠와라(福原)로 수도를 천도(遷都)하는 인재(人災)까지 겹쳤다. 오죽했으면 이런 재해를 합해 오대재해(五大災害)라 했을까. 수도 천도를 재해로 규정한 것은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정책을 밀어붙인 정부에 대한 원망이 담겨있다. 호넨 스님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가모노 초메이(鴨長明)의 수필집 ‘호조키(方丈記)’를 보면 오대재해를 당한 사람의 심정이 적나라하게 적혀 있다. 그는 오대재해 중 큰불을 겪은 심정을 이렇게 적고 있다.

“안겐 3년(1177) 4월28일이었으리라. 바람이 몹시 불어서 너무나 시끄럽던 저녁 술시(戌時) 무렵의 일이다. 교토의 남동쪽에서 불이 일어나서 북서쪽으로 번져 갔다. 결국에는 주작문, 대극전, 대학건물, 민부성(民部省)으로까지 불길이 번져 하룻밤 사이에 모두 한 줌의 재로 변해버렸다.”

그의 글과 ‘헤이지 모노가타리 에마키’의 장면이 겹쳐진다. 오대재해가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일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가모노 초메이는 이런 현실을 겪으면서 ‘물거품 같은 세상’을 버리고 출가해 조용한 삶을 누린다. 가모노 쵸메이와 호넨 스님은 같은 시대를 살았고 같은 문제를 고민한 출가사문이다. 그런데 그들이 선택한 길은 전혀 달랐다. 가모노 쵸메이가 은둔형 삶을 택했다면 호넨 스님은 한시도 민중을 떠나지 않았다. 호넨 스님은 지옥 같은 현실이었지만 그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실천했다. 이론과 행동의 일치였다. 편안한 관승의 자리를 포기하고 둔세승이 되어 민중을 구제하려는 자비보살의 행동이다. 그를 역사가 기억하고 수행자들이 선지식으로 추앙하는 이유다.

호넨 스님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말법시대(末法時代)로 규정하고 실천가능한 수행법을 제시했다. 그것이 바로 전수염불이다.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에는 성도문(聖道門)과 정토문(淨土門)이 있다. 호넨 스님은 죄악으로 가득 찬 말법시대에는 불퇴전의 경지를 구하는 성도문을 따르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성도문을 난행도(難行道)라 부른 이유다. 그러나 오직 아미타부처님을 깊이 믿고 서방정토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발원한다면 아미타부처님의 서원에 힘입어 누구나 청정한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다. 말법시대에 전수염불이 필요한 까닭이다. 오로지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면 들어갈 수 있는 정토문은 누구나 예외 없이 실천할 수 있는 이행도(易行道)다. 그의 가르침은 주효했다.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교학이나 참선 대신 나무아미타불만 염불하면 된다는 간단하고 소박한 가르침은 당시 일본 사회 각계각층 사람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그의 사상은 신란 스님에게 전해져 더욱 깊어졌다. 청출어람이다. 지금도 정토문에 귀의한 사람들은 기도가 끝날 때 다음과 같이 회향한다.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동견무량수 개공성불도!(나와 모든 중생들이 다음 생에 반드시 극락세계에 태어나 다함께 아미타불을 뵙고 성불하게 하소서)”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317호 / 2015년 11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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