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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독립10주년 특별대담] 최중홍 문화일보 편집부국장

“불교 넘어 국민들 관심 끄는 미디어로 발돋움해야”

▲ 법보신문 창간 멤버였던 최중홍 문화일보 편집부국장은 “불교계 밖의 사람들도 찾을 수 밖에 없는 신문을 꿈꿨다”며 후배들이 그 꿈을 이뤄 나갈 것을 당부했다.

법보신문 창간 멤버였던 최중홍 문화일보 편집부국장은 “불교계 밖의 사람들도 찾을 수 밖에 없는 신문을 꿈꿨다”며 후배들이 그 꿈을 이뤄 나갈 것을 당부했다. 법보신문 독립언론 10주년을 맞아 중진 언론인이며 법보신문 창간 멤버였던 최중홍 문화일보 편집부국장을 만났다. 최 부국장은 동국대 국어국문과를 졸업한 뒤 법보신문에서 첫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스포츠서울 기자, 중앙일보 기자, 불교방송 기자, 문화일보 기자를 거쳐 현재 문화일보 편집부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최 부국장은 일간지에 근무하면서도 틈틈이 법보신문을 찾아 후배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최 부국장은 법보신문과의 대담을 통해 신문사 창간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독립언론의 의미, 앞으로 나아갈 방향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심도 깊은 의견을 제시했다. 편집자

법보신문 창간은 막아 놓은
언론계 둑 무너진 일대 사건

종이신문 독립은 편집권이
자본과 권력에서 벗어난 것

10년 동안 흔들림 없는 운영
새 사옥 마련한 후배들 대단

다양한 경영기법 도입으로
새 시대의 변화도 주도하길

▲1988년 법보신문 창간 당시 창간멤버로 입사했습니다. 법보신문을 창간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상황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1988년은 시공간이 활화산처럼 꿈틀대는 질풍노도의 격동기였습니다. 전두환·노태우 임무교체의 해로 전년인 87년에 이어 민주화 열기가 고조되는 시기였습니다. 또 국가적으로는 88올림픽을 치르는 국운융성기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사회문화적으로 민중들의 열망이 뿜어져 나오는 대 변혁기였습니다. 그 단면의 하나로 언론사(史)의 일대사건이었던 한겨레신문이 창간됐고, 가톨릭계에서도 큰 기대를 안고 평화신문이 태어났습니다. 그런 흐름 속에서 법보신문이 태어났습니다. 언론계에서는 법보신문 창간을 ‘불교계의 한겨레신문’ 탄생으로 보고 주목하는 시각들이 많았습니다. 한겨레, 법보신문, 평화신문 세 매체의 탄생은 1980년 언론통합 이후 인위적으로 막아놓은 언론계의 둑이 무너진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그 흐름 속에서 국민일보와 세계일보, 문화일보가 어렵지 않게 생겨날 수 있었습니다.

▲법보신문 창간 멤버로 동참하게 된 특별한 계기나 인연이 있습니까.
동국대 재학시절 동대신문사에 근무했던 인연이 법보신문으로 이어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1988년 2월25일 대통령이 교체되던 날 육군 만기 제대를 했습니다. 제대를 하고 학교 도서관에서 언론사 시험을 준비하던 중 당시 동대신문사 김용철 편집국장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한겨레신문 같은 불교계신문이 창간되는데 시험을 보라고 하더군요. 당시 동대신문 선후배 관계는 ‘시험을 보지 않겠느냐’식의 권유가 아니라 ‘명령’이었던 것으로 해석하셔도 좋습니다. 그래서 공채시험을 보고 입사를 했습니다. 당시 초대 편집국장이 선원빈 국장님이셨는데 끈끈한 인연의 시작이었습니다.

▲법보신문 재직 당시 법보신문에 대한 교계 안팎의 평가는 어떠했습니까.
창간초기 저는 불교계 야당을 출입했습니다. 주요 출입처가 당시 태동되던 실천불교승가회, 대승승가회, 불교사회연구원 같은 곳이었고 주로 ‘불교계에도 인권기구 만든다’ ‘10.27법난 재조사 촉구’ 같은 기사를 썼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청화 스님, 명진 스님, 지선 스님 등이 주요 취재원이었습니다. 조계종 총무원이나 핵심 쪽의 기류는 잘 알지 못했지만 재야 쪽에선 법보신문에 상당히 좋은 반응을 보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보다 선배였던 한겨레신문 종교담당 기자가 주로 저하고 같이 다녔습니다. 당시엔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 사장님이셨던 종상 스님이나 논설을 맡으셨던 오현 스님, 정휴 스님, 선원빈 국장님 모두 최고의 멤버이셨던 것 같습니다. 당시 교계 내부에선 법보신문의 내용과 논조에 많이들 신경을 곤두세웠다고 하더군요.

▲법보신문이 2005년 11월 불국사로부터 독립한 지 10년이 됐습니다. 창간 멤버로서 느낌이 남다를 것으로 생각됩니다.
창간 당시 찾아뵈었던 월산 큰스님의 인자하신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세파에 시달릴 때마다 큰스님 생각이 많이 났지만 법보신문을 너무 빨리 그만둔 죄도 있고 해서 떳떳하게 찾아뵙질 못했습니다. 법보신문의 경영이나 독립 전후 속사정에 대해선 그때나 지금이나 제대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 역시 독립언론인 문화일보의 사주조합장을 맡고 있는 상황이어서 독립언론 경영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10년간 흔들림 없이 신문사를 잘 운영하면서 새사옥까지 마련한 후배들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생각해보면 법보신문의 독립이 창업주이신 월산 큰스님의 깊은 뜻이 아니셨나 생각합니다. 부처님이 출가와 고행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신 것과 같이 법보신문에게도 더 큰 스케줄이 준비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법보신문을 떠난 뒤에도 틈틈이 신문사에 들러 후배들을 지도했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어떤 마음이셨습니까.
법보신문에 적을 뒀던 기간은 길지 못합니다. 창간 준비기간까지 합쳐도 8개월이 채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당시엔 인원도 부족하고 일도 익숙치 않아서 일주일에 사흘은 회사에서 밤을 새웠습니다. 그런 상황에 식구처럼 정이 들었던 법보신문을 떠나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일간지에 출근하면서도 마감 날엔 법보신문으로 와 편집을 도왔습니다. 2년 정도 유지한 것 같습니다. 당시엔 나이가 20대여서 일간지 일이 힘들긴 해도 일주일에 하루 정도 주간지에 와서 밤을 새우는 것은 크게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서울신문을 그만두고 중앙일보로 옮긴 뒤에는 일이 바빠서 마감 날 지원이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엔 드문드문 중요한 상황이 있을 때마다 일을 돕곤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편집국장이셨던 선 국장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이학종 부장이 입사 동기라 제게 지원요청을  하곤 해서 지면개편 등에 힘을 보태곤 했습니다. 지금은 제게 남아있지 않지만 2000년대 초반쯤에 ‘헤드라인(headline, 제목), 데드라인(deadline, 마감), 리드라인(readline, 행간)’이라는 편집 가이드 자료도 만들어 사용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법보신문과의 인연을 각별하게 생각해 온 것 같습니다.

▲독립 10년 동안 시련과 역경이 많았습니다. 그런 과정들을 쭉 지켜봐 왔던 소회가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고생 많았다는 말씀을 전해야 하겠지요. 아무리 치하를 하고 위로해도 부족하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모든 속사정을 알기는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지면에 관한 관심은 많지만 살림에 대해서는 여전히 ‘꽝’ 입니다. 그러나 10여 년 전 있었던 입사동기들의 잇단 퇴사와 그 과정에 있었던 파열음은 참 안타까웠습니다. 내년 독립 11주년 기념 땐 종상 스님과 오현 스님, 정휴 스님 세분이 펼치는 고준담론을 법보신문 지상에서 다시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가능할지 모르지만 법보신문 1기들이 함께 법보신문의 독립을 축하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법보신문 독립이 불교계 언론환경에서 갖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불교계 언론 환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법보신문 독립은 상당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독립의 뜻을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법보신문의 독립은 ‘편집권이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종이신문은 소유구조의 뿌리가 어디냐에 따라 제작방향이 달라지는 단순한 미디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사주가 대주주로 구성된 법보신문은 그 어느 매체보다 더 독자 곁으로 다가간 신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계와 같이 광고시장이 제한적이고 종단에서 기관지를 발행하는 언론환경에서 법보신문은 독립언론 10년을 버텨왔고, 또 흑자를 내고 있다는 것은 불교계 독자들도 많이 변화했다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법보신문 창간멤버로서 창간 당시와 현재의 법보신문에 대해 평가한다면.
 오늘의 청년 법보신문과 창간 당시의 법보신문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질은 변하지 않았으나 키가 많이 컸고 생각도 깊어졌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창간초기 몇몇 기자들은 법보신문이라는 이름이 어렵다고 생각해서 ‘정토신문’, 또는 ‘팔정도 신문’으로 하면 어떠냐고 건의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정신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개선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편집, 기사작성 등 신문 만드는 기술은 노력을 하면 얼마든지 좋아질 수 있습니다. 다만 종이신문의 미래와 관련된 법보신문의 플랜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미국의 뉴욕타임스가 ‘디지털퍼스트’ 선언을 하고 나서 많은 올드미디어들이 종이인쇄를 포기하고 온라인을 택하고 있습니다. 불교계 언론들도 그 소용돌이 속에서 미래를 모색하고 변화해 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고민을 입체적이고 심층적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투자와 효율, 독자들의 경향성, 광고시장의 변화, 시대적 요구 등등 고민해야 할 점들이 많습니다. 최근 출판분야를 강화한 것은 당연한 것이긴 하나 바둑으로 치면 평범한 수라는 생각도 듭니다. 연예기획사의 프로듀서 시스템 등과 같은 새로운 경영기법을 벤치마킹할 대상을 찾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법보신문 창간멤버로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을 것 같습니다.
법보신문의 좌표는 처음부터 ‘불교계 최고’가 아니었습니다. 창간 당시 20대 후반의 햇병아리 기자들은 늘 ‘우리는 불교 밖의 사람들이 사보는 신문을 만들겠다’고 공언했습니다. 불교 콘텐츠 신문인데도 기독교인들이 사볼 수밖에 없는 그런 미디어를 꿈꿨습니다. 아직 이루진 못했지만 그 꿈은 실현 가능한 꿈입니다. 반드시 그 꿈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대담·정리=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1317호 / 2015년 11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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