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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독립10주년 특집-불교와 언론][br]1. 근대불교 언론의 역할

주권 강탈시기, 불교사상·문화사 정립으로 ‘근대불교’ 실현

▲ 왼쪽 위부터 순서대로 조선불교월보, 조선불교총보, 불교진흥회월보, 불교, 신불교, 조선불교, 금강산, 금강저.

미당 서정주는 ‘자화상’에서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라고 하였다. 이 땅에 불교 언론이 태동한 1910년부터 40년대 암흑기 이전까지 약 30년 동안 근대불교를 기획하고 실현해 간 동력은 ‘팔 할이 불교잡지’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근대불교’ 기획 동력 8할이 불교잡지
불교언론사와 잡지 역사는 거의 동일

사적비·고승비문·행장 수습해 소개
불교역사 찾기로 사상·문화사 정립
포교매개로 한글 사용 불교문화 확장
‘시단’란 할애해 불교문학 토대 구축

소년과 여성 주체세력으로 부상 유도
젊은 학인·청년들 성장·독립 견인
일본·독일 등 해외불교 소식도 전해

현대의 문화들도 불교적인 해석 필요
현 시대와 가까이 다가가는 계기될 것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먼저 불교 언론은 불교계에서 간행한 잡지를 제외하면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불교 언론의 역사는 불교 잡지의 역사와 함께 하며 이 둘은 이 시기에는 거의 동일시될 수밖에 없다. 다른 하나는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던 ‘근대불교’가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어떤 형태로 만들어진 것은 ‘팔 할’이 불교잡지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를 살아간 불교계 구성원들이 의욕적으로 추구했던 ‘근대불교’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 확언할 수 없으나, 우리는 잡지를 통해 ‘근대불교’의 현상에 대해 파악할 수 있다.

최초의 근대불교 잡지는 1910년 간행된 ‘원종’이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현전하는 잡지로는 1912년 2월에 간행된 ‘조선불교월보’가 효시이며, 이어 ‘해동불보’ ‘불교진흥회월보’ ‘불교계’ ‘조선불교총보’ ‘유심’이 간행되었다. 1920년대에는 ‘불교’ ‘금강저’ ‘일광’ ‘회광’, 1930년대는 ‘불청운동’ 선원’ ‘불교시보’ ‘금강산’ ‘신불교’ ‘람비니’ ‘홍법우’ 등이 간행되었다. 이들 잡지에 담겨있는 수십 년 동안의 다양한 목소리는 곧 근대불교의 구체적 실상이 되기에 부족하지 않다.

이글에서는 이 시기 불교잡지가 우리 문화의 발전에 기여한 바를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주권강탈의 시기에 불교와 관련된 역사 자료를 새롭게 발굴하고 소개함으로써 이 시기 국학 연구에 크게 기여하였다. 초기 불교잡지의 편집자인 권상로, 박한영, 이능화 등은 우리 역사의 기술에 꼭 필요한 여러 사찰의 사적비, 고승의 비문과 행장을 직접 수습하였고, 때로는 독자들의 자료 발굴과 소개를 유도하였다. ‘사산비명’ ‘해동고승전’ ‘삼국유사’ 소재 불교사 자료에서부터 20세기 초입에 입적한 고승의 행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자료가 수록되어 있다. 이들은 한국의 사상사, 문화사를 정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들 잡지에서 비로소 우리 불교의 역사를 객관화하고 우리 전통 문화를 형성하는 사상적 기저로서 평가하는 자기인식이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1920년대 전후에 민족의 정체성에 대해 사명감을 가지고 탐구한 국학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는데, 국학자 가운데 불교계와 상호 의존적인 관련을 맺은 인물이 많다. 이능화 최남선 정인보 등이 대표적이다. 사실 이 시기 불교잡지를 통한 불교계의 역사 찾기 노력은 국학연구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국학운동의 일환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앞으로는 이 시기 국학연구와 불교의 관계를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둘째, 한글을 포교의 매개로 사용하여 불교문화의 편폭을 넓혔으며 한글문화의 다변화에 기여하였다. 이미 1912년 간행된 ‘조선불교월보’에서부터 ‘언문란’을 신설하여 ‘부녀자’를 위한 불교를 기획했으며, 1920년대에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불교 소년회 소식을 상세히 전하면서 창작 동요와 동화, 희곡 등을 소개하였다. 이들과 함께 꾸준히 연재된 소설과 희곡 작품도 순 한글로 표기되어 있다. 이들 한글 기사와 작품은 독자의 저변을 넓히는데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불교문화의 편폭을 확장하는데 기여했다.

더 나아가 불교용어를 우리말로 풀이하는 시도도 있었는데, 이는 ‘한글 불교’의 근대적 현상으로 의미가 있다. ‘팔정도’ ‘육바라밀’ 등 단순한 용어 풀이에서부터 ‘교의문답’에 이르기까지 불교개념을 순 한글로 표기하는 1910년대의 노력은 1920년대에는 더욱 확장되어 ‘화엄경’과 ‘석가일대기’를 순 한글로 연재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러한 한글의 전면적 사용은 백용성 등 경전을 한글화한 선지식이 이루어낸 성과와 길항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앞으로는 잡지 기획자들의 ‘한글 불교’에 대한 지속적 노력도 함께 평가해야 할 것이다.

셋째, 한글에 대한 학문적 관심을 환기하였다. 우리 학계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굴된 시기는 1940년경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훈민정음의 제자 원리 등이 명확하게 소개되어 있다. 해례본이 발굴되기 전까지 불교잡지에는 한글과 불교, 한글과 범어의 관련성에 대해 집요하게 탐구한 논문이 소개되었다. 이능화, 권상로, 안확, 허영호 등이 전개한 한글의 범어기원설은, 비록 현재에는 정설로 인정되지 않지만, 당시의 언어학적 수준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국학 탐구의 일환으로 평가 받아야 마땅하다.

1920년대 ‘불교’의 편집자인 권상로는 우리말 찬불가를 지어 권두언에 실었고, 조학유의 찬불가를 악보와 함께 실어 근대불교 의식을 정립하는데 기여하였다. 1930년대 ‘불교’의 편집자인 한용운은 권두언에 우리말 산문시와 창작 시조를 게재하고, ‘불교시단’란을 마련하여 젊은 시인들이 참여한 불교문학의 향연을 마련하였다. 특히 한용운은 1931년 안심사에서 조선 초의 언해불서 목판 658판목을 발굴하여 잡지에 소개하고 회원을 모아 영인본으로 제작, 배포하였다. 언해 경판으로는 “월인천강지곡 4권의 판목만 전해지던” 당시에 이루어낸 한용운의 발굴 성과는 당시는 물론 현재 우리 학계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외에 근대불교 잡지를 읽을 때 인상 깊었던 두 가지 경향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 1930년 7월 ‘불교’지 7호에 실린 청년 도진호의 범태평양 불교청년대회 참관기. 당시 불교잡지에는 불교청년들의 활동과 목소리가 거의 매호 반영됐다.

하나는 이 시기가 청년의 시대였다는 점이다. 초창기에는 박한영, 권상로가 좌장이 되어 후학을 이끌었다. 특히 ‘불교’를 중심으로 놓고 볼 때 백성욱, 이영재, 김태흡 등 초기의 주요 필진은 유학생 신분으로 종교와 학문에 대한 열정에 가득 찬 인물이었는데, 이들의 글에서 불교개혁에 대한 의지와 열망을 엿볼 수 있다. 동경 유학생 기관지인 ‘금강저’에 수록된 국내 불교계에 대한 비판적 제언은 실시간으로 국내에 전해져 ‘불교’의 편집과 내용에 영향을 끼쳤다. 이와 함께 ‘불교’의 ‘휘보’란에는 국내 고보와 전문학교, 일본 대학의 입학생, 졸업생 소식이 상세히 전해지고 있고, 각 사찰에서 세운 강원의 입학생과 수료생 명단이 상세히 소개되었다. 이와 함께 전국 각 사찰에서 속속들이 결성된 불교청년회 소식도 거의 매 호마다 실려 있다. 결국 불교 언론의 이러한 관심과 소개에 동력을 받아 강원의 학인들은 1929년에 ‘회광’을, 불교청년회는 1931년에 조선불교청년총동맹 기관지로 ‘불청운동’을 발간하기에 이른다. 불교잡지에는 다양한 불교청년들의 목소리가 켜켜이 쌓여있고, 이들 목소리의 성격은 근대불교 언론의 주요한 특징이 될 것이다. 근대 불교청년들의 성장과 독립을 추동한 것, 즉 ‘키운 것’은 역시 ‘팔 할’이 불교잡지 아니었을까 한다.

다른 하나는 해외 불교계 소식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1920년대 ‘불교’에는 일본과 중국의 불교계 소식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항주 고려사 중건을 위한 국내와 중국 불교인들의 활동 소식을 상세히 전하고 있고, 홍콩 대만을 포함한 범중국계 불교소식, 장종재 등 중국계 인맥과 한국, 일본 간의 상호 방문 교류 등이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아울러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의 불교관련 소식,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유럽의 반종교운동 관련 소식 등도 거의 실시간으로 소개되어 있다. 해외 불교잡지와의 실시간적인 교류가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근대불교 잡지, 근대불교 언론은 우리의 불교역사와 문화를 자각하게 하고, 당대의 문화 창조에 기여했으며, 미래의 발전 방향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던 지식인들의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담겨있다. 그리고 소년과 여성을 하나의 주체세력으로 부상하도록 유도했으며, 강원이나 청년회의 젊은 학인, 청년을 호명하여 근대불교의 주체로 우뚝 서도록 하였다는 점에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또 해외 불교계와 종교 소식을 실시간으로 전함으로써 당시 독자들의 시야를 넓히는데 기여하였다.

▲ 김종진 교수
현대의 불교 언론에 대한 제언을 대신하여 이상 소개한 근대불교 언론의 역할을 현재의 관점에서 복기해 볼 필요가 있다. 한 예로 현대의 모든 불교 언론 매체에 담긴 모든 기록은 우리 미래세대에게 물려줄 유산의 가치를 지닌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문화를 불교계 내외의 필진을 동원하여 좀 더 열린 자세로 담아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포교목적이 아니라도 불교적 해석의 여지가 있는 다양한 문화를 소개한다면 어떨까 한다. 현재 공연 중인 영화, 오페라, 미술 작품은 물론이고 대중가요까지도 소개하고 재해석하는 방식도 우리시대의 독자, 시청자들과 더 가까이 다가가는 하나의 계기가 될 것으로 본다. 가끔 필자처럼 이선희의 노래 ‘인연’에 대해, 백남준의 ‘TV부처’, 영화 ‘인터스텔라’에 대해 그 불교적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독자들도 있을 테니까. 물론 해외의 불교도들은 어떤 현대 예술을 음미하는지를 실시간으로 소개하는 것도 좋겠지만 말이다.

김종진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1317호 / 2015년 11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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