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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작자미상, ‘아미타성중내영도’

기자명 조정육

번뇌에 묶인 범부라도 무량광불 믿는다면 정토왕생 할 수 있다

▲ 작가미상, ‘아미타성중내영도’, 12세기 후반, 비단에 설채, 가운데 210×210cm, 좌우 각각 210×105cm, 와카야마(和歌山) 코야산(高野山).

울고 또 울었다. 나는 영 가망이 없는 걸까. 자꾸 체념하는 마음이 생겼다. 울음은 느닷없이 터졌고 눈물은 쉴 새 없이 흘렀다. 내가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싶은 생각에 급기야는 밥도 넘어가지 않았고 삶에 대한 의욕도 사라졌다. 사소한 외부경계를 만나도 마음은 풍랑을 만난 배처럼 흔들렸다. 내 뜻에 어긋나는 사람이 있으면 새벽기도 때의 축복의 진언이 삽시간에 저주의 진언으로 바뀌었다. 그런 나를 보면서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절망스러웠다. 평생 노력해도 나는 내 안에 도사린 업력의 작용을 거스를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다른 사람의 결점을 쉽게 비난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특별히 내가 너그러운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나 자신도 내 마음을 어쩌지 못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손가락질할 것인가.

타력수행 전념하던 신란 스님
유배지서 가난한 사람들 만나
새로운 종교관 키워가기 시작

신심만 있다면 번뇌가 있어도
무상대열반에 이를 수 있어

신란(親鸞,1173~1262) 스님은 호넨 스님의 뒤를 이어 정토종을 확립했다. 그는 출가 후 29세까지 히에이산(比叡山)에서 엄격하게 수행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수행해도 자기 안에 내재된 욕망과 사악한 본성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수많은 생을 전전하면서 뿌리 뻗은 숙세의 업은 쉽게 근절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정토세계를 강조한 호넨 스님 문하에 들어가 전통적인 자력(自力)수행을 포기하고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에 자신을 맡기는 타력(他力)수행에 전념한다. 그는 유배가기 전까지 6년 동안 호넨 스님의 지도를 받으며 신앙세계의 토대를 구축한다. 그는 ‘계율을 지키든 말든 결혼을 하든 안하든, 우리 삶의 유일한 목적은 오직 염불을 통해 생사의 세계를 벗어나는 일뿐’이라는 호넨 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결혼을 했다. 그 후 스님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비승비속(非僧非俗)으로 살았다. 그의 나이 35세 때 호넨 스님이 기존 종교 세력의 모함을 받고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그때 신란 스님도 에치코(越後)로 보내졌다. 그는 이곳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비참한 삶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이론상으로만 알던 불교교리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를 들으며 신란 스님의 새로운 종교관이 싹트기 시작했다.

‘아미타내영도’의 출현배경에 대해서는 ‘사이초와 구카이’편에서 살펴보았다. 아미타신앙은 7~8세기경부터 조금씩 알려지다 천태종의 서방정토왕생사상이 전파되면서 히에이산의 엔랴쿠지(延曆寺)를 중심으로 크게 유행했다. 특히 겐신(源信) 스님이 985년에 저술한 ‘왕생요집(往生要集)’이 유포된 후 이론적인 토대까지 확립되어 더욱 성행했다. 이런 배경에서 귀족문화가 정점에 달했던 11세기에는 가장 아름답고 예술성이 뛰어난 ‘아미타내영도’가 발달했다. 그 대표작이 ‘아미타성중내영도(阿彌陀聖衆來迎圖)’다. 와카야마(和歌山) 코야산(高野山)에 소장된 이 작품은 헤이안(平安,794~1192)시대를 넘어 일본불화를 대표하는 수작이다.

죽음을 앞둔 왕생자 앞에 아미타부처님이 내려오신다. 여러 보살들의 행렬에 둘러싸여 장엄하게 나투신다. 아미타불을 중심에 두고 수많은 보살들과 주악비천들이 본존불을 호위하듯 에워싸고 있다. 아미타불의 신체는 권속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30여명의 보살과 비천은 본존불에 비해 뒤로 물러날수록 작아진다. 인물의 중요도에 따라 크기를 달리해서 그리는 고대회화의 원칙을 적용했다. 아미타불의 배경으로 그려진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은 뒤에서 빛을 반사한 듯 테두리가 환하다. 몸에 걸친 천의의 바탕에도 금빛이 눈부시다. 끝없는 빛의 세계인 무량광(無量光)여래의 상징이다. 정중앙에 앉아 상품하생인(上品下生印)을 한 아미타불은 근엄함과 위엄을 잃지 않았다. 장식을 전혀 하지 않은 광배 때문에 아미타불의 존재가 더욱 두드러진다. 아미타불 앞에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자리했다. 모든 아미타내영도가 그러하듯 관세음보살은 왕생자가 앉을 연꽃대좌를 들고 있고, 대세지보살은 두 손을 합장한 채 앉아 있다. 나머지 권속들을 제외한다면 완전한 삼존불 형태다. 아미타불 옆으로는 다섯 명의 보살들이 협시했다. 그 중 세 명은 승복을 입었는데 표정과 자세가 아미타불 못지않게 근엄하다. 그에 비해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비천들의 표정은 밝고 환하다. 미소 띤 얼굴에 이빨이 보이도록 웃는 보살도 있다. 참 보기 좋다. 자세 또한 음악의 율동에 맞춘 듯 정면관을 탈피했다. 살아있는 사람처럼 자연스럽다. 이들이 연주한 천상의 음악이 구름처럼 허공을 떠다닌다. 왕생자가 극락세계에서 누릴 행복을 암시하는 듯하다. 보살들이 입은 녹색, 청색, 붉은색 의상은 아미타불의 금빛 신체와 대조를 이루며 그림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흰색이 뒤섞인 구름은 경전에 묘사된 상서로운 구름인 ‘자운(紫雲)’을 표현한 것이다. 원래는 자주색으로 채색되었을 것이나 현재는 갈색을 띄고 있다. 비천의 옷자락처럼 휘날리는 구름 묘사가 화면을 생동감 있게 살려낸다. 바람에 날리는 구름에 눈길을 빼앗기다보면 전체 화면이 굉장히 복잡해보이지만 어떤 질서가 느껴진다. 좌우대칭의 구도 덕분이다. 좌우대칭이지만 완벽한 좌우대칭은 아니다. 아미타불 주변에는 15명의 권속이 자연스럽게 에워싼 가운데 왼쪽에는 7명, 오른쪽에는 9명이 배치되어 있어 오른쪽으로 조금 쏠린 구도다. 왼쪽에 비중을 낮게 둔 이유는 하단에 절벽을 배경으로 그려 넣기 위해서다. 단풍나무가 심어진 절벽은 이곳이 극락세계가 아니라 사람이 사는 지상세계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극락세계의 불보살님들이 왕생자를 맞이하러 지상으로 내려왔다는 뜻이다. 이 작품은 원래 아미타 신앙의 본거지인 히에이산에서 제작되었다가 1571년 내란을 피해 코야산으로 옮겼다. 천하통일을 꿈꾸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교토를 제압하기 위해 승병의 거점이었던 엔랴쿠지를 불태우는 바람에 자칫하면 ‘아미타성중내영도’도 불에 탈 뻔 했다. 다행히 그 난리에서도 살아남아 헤이안시대의 귀족문화를 대표하는 뛰어난 작품수준을 가늠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 아름다운 작품을 보고 있으면 만감이 교차한다. 왕생자가 이승에서 얼마나 복을 많이 쌓았으면 임종 시에 시커먼 저승사자 대신 저런 고귀한 분들이 마중 나올까. 부러움과 함께 절망감이 앞선다. 내 처지에 언감생심 저런 분들의 환대를 받을 수나 있을까. 다음 생에 나는 어디서 살고 있을까. 어떤 모습으로 어떤 생각을 하며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지금도 힘든데 다음 생에서는 어떠할까. 복 지은 것이 별로 없는 나로서는 이승이나 저승이나 사는 게 별반 차이가 나지 않을 것 같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하며 사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며 살 것이다. 신란이 유배지에서 만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신란이 ‘하류(下流)’인생이라 칭한 그들은 가진 것 없고 배운 것이 없어 비참한 나날을 보내며 살았다.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냥과 낚시 등의 살생죄를 범해야 했다. 아무런 능력이 없는 그들로서는 다른 생업을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 상황이 이럴진대 어려운 불교 경전을 읽을 리 만무했다. 전생의 업으로 인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복을 짓기 위해 보시를 하거나 공덕을 쌓을 만한 형편도 아니었다. 이들은 구원받을 수 있을까.
이런 의구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신란은 단호하게 ‘그렇다’라고 대답한다. 번뇌에 묶인 범부(凡夫)들, 곧 사냥꾼과 장사꾼들과 같은 하류들이 무량광불의 불가사의한 서원, 광대지혜의 명호를 열심히 믿으면 ‘번뇌를 구족한 채 무상대열반에 이른다’라고 대답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다. 자격도 필요 없고 노력도 필요 없다. 다만 신심만 있으면 우리 모두는 번뇌가 있는 이대로 정토왕생할 수 있다. 신란 스님의 가르침은 그의 제자인 유이엔(唯圓)의 ‘탄이초(歎異抄)’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신란 스님은 ‘선인(善人)도 왕생할 수 있는데 하물며 악인(惡人)은 말할 것이 있겠는가’라면서 악인정기설(惡人正機說)을 주장했다. 어째 말이 조금 이상하다. ‘악인도 왕생하는데 하물며 선인은 말할 것이 있겠는가’가 맞을 것 같다. 혹시 문장이 뒤바뀌지 않았나 싶어 여러 차례 확인해 봐도 전자가 맞다. 신란 스님은 왜 이렇게 표현했을까. 타력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자력으로 선을 행하는 선인은 타력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마음이 없어 미타의 본원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력으로 선을 행할 수 없는 악인은 오로지 아미타불의 본원인 타력에 의지해야만 한다. 이것이 악인이야말로 아미타불이 그의 본원을 통해 구제하고자 하는 주 대상이라는 사상이다. 이것은 번뇌에 빠져 생사윤회를 되풀이해야 하는 우리 자신의 처절한 죄악성에 대한 자각에서 나온 결론이었다. 신란 스님은 왜 그토록 타력을 강조했을까. 우리가 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 비결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미타불에게 있기 때문이다. 아미타불이 법장비구였을 때 세운 48대원 중 18번째 원이 그 근거다.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세계의 중생들이 저의 나라에 태어나고자 신심과 환희심을 내어 제 이름을 다만 열 번만 불러도 제 나라에 태어날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이것이 아미타불의 본원이다. 이츠키 히로유키(五木寬之)가 ‘타력’에서 표현했듯 아미타불의 본원은 선인은 물론이고 악인까지도 구제하는 ‘무차별적인 구제’다. 재물이 넘쳐 복을 많이 쌓은 귀족이나 돈이 없어 살생을 업으로 해야 하는 하류도 예외 없이 포함되는 구제다. 그러니 우리는 단지 아미타불을 지성으로 염불하기만 하면 된다. 우리가 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 이유도 염불 때문이 아니다. 염불하는 힘, 자력이 아니라는 뜻이다. 아미타불의 본원에 나타난 무한한 자비와 지혜, 즉 타력 때문이다. 타력은 우리가 우리 힘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자력을 완전히 버리는 체념에서부터 시작된다. 하류인생은 다겁생에 걸쳐 쌓은 업장이 두터워 이렇게 살고 있는데 어떻게 자력으로 정토왕생이 가능하겠는가. 우리는 그저 아미타불의 자비심에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호넨 스님을 따르는 전통적인 정토교와 신란 스님이 세운 정토진종의 차이점이다. 자력이 아니라 타력이 정토왕생의 유일한 조건이라는 뜻이다. 신란 스님에 의한 ‘나무아미타불’ 염불은 수행으로서의 염불이 아니라 타력에 대한 신심으로의 이동을 의미한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비하할 필요가 있을까. 신란 스님의 가르침을 들으며 그런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내 마음도 어쩌지 못하는 나 자신을 보면서 그의 말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번뇌 가득한 지금 이 모습 이대로 언제 죽어도 아미타불의 환영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은 얼마나 큰 안심을 주는가. 다만 내가 나무아미타불을 잊지만 않는다면.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318호 / 2015년 11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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