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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왕생의 조건

기자명 이제열

“불교는 오로지 자력문만 있을 뿐 타력문은 없다”

▲ 양산 통도사 아미타여래설법도. 보물 제1472호.

“이 말을 들은 중생들은 마땅히 서원을 세워 저 세계에 가서 나기를 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가면 그와 같이 으뜸가는 사람들과 한데 모여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사리불이여, 조그마한 선근이나 복덕의 인연으로는 저 세계에 가서 날 수 없느니라. 선남자선여인이 아미타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하루나 이틀 혹은 사흘 나흘 닷새 엿새 이레 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아미타불의 이름을 외우되 조금도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으면 그가 임종할 때에 아미타불이 여러 거룩한 분들과 함께 그 사람 앞에 나타나실 것이다. 그가 목숨을 마칠 때에 생각이 뒤바뀌지 않고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될 것이다. 사리불이여, 나는 이러한 도리를 알고 그와 같은 말을 한 것이니, 어떤 중생이든지 이 말을 들으면 마땅히 저 국토에 가서 나기를 원하라.”

서방 아미타불 의지해도
스스로 불성의 발현일 뿐

죽음 순간의 오롯한 염불
생사양변 여읜 성불의 길

아미타경은 제자들 물음에 대한 답변이 아니라 부처님 스스로 설한 무문자설의 설법이다. 부처님은 먼저 의보인 극락세계의 광경과 구조를 설하고 이어서 정보인 극락세계의 성현들과 대중들에 대해 설하였다. 의보와 정보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중생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들이고 다른 하나는 부처님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들이다. 먼저 중생에 의해 만들어지는 의보와 정보는 무명과 번뇌와 업보에 의지한다. 생로병사의 오온과 온갖 괴로움이 득실대는 이 세계는 모두 중생들이 지어낸 무명과 번뇌와 업보에 의한 결과들이다. 반면 부처님에 의해 만들어지는 의보와 정보는 지혜와 자비와 원력에 의지한다. 모든 부처님들의 법신·보신·화신과 대광명 정토세계는 모두 지혜와 자비와 원력에 의한 결과들이다. 이로써 아미타불이 세운 극락세계의 의보와 정보 역시 모두 아미타불의 권화의 모습들이라고 이해해야한다. 극락세계의 아름다운 광경과 그 곳에 살고 있는 생명들, 그리고 무수한 성현들은 아미타불과 분리된 존재들이 아니라 모두 아미타불의 권화신들이다. 하지만 좀 더 깊은 안목을 지니고 이들 의보와 정보를 논한다면 중생과 부처님의 의보, 정보는 모두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국토와 현실을 떠나 중생과 부처님의 의보, 정보가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차원에 의해 갈라진다. 무명으로 보면 이 세계는 중생계의 의보와 정보가 되지만 불성으로 보면 이 세계 그대로가 아미타불의 의보와 정보가 된다.

부처님의 안목에서 보면 불성이 곧 아미타이며 중생계가 그대로 극락세계이고 온갖 중생들이 본래 불보살들이다. 누구나 불성을 깨닫게 되면 자신의 마음에서 아미타불이 출현하여 광명을 쏟아 이 세상을 두루 비추게 된다. 나옹화상이 전했다는 유명한 아미타불 염불 게송을 보면 더욱 그 의미는 명확해진다. “아미타불 계신 곳 그 어디인가(阿彌陀佛在何方) 마음속에 깊이깊이 잊지 말아라(着得心頭切莫忘) 모든 생각 다하고 분별들이 끊어지면(念到念窮無念處) 그대들의 눈코입에서 금색 광명 쏟으리라(六門常放紫金光)."

이는 아미타불과 극락이 곧 중생의 마음이며 그 광명이 이 세상을 비추면 곧 극락정토라는 의미로 정토가 반드시 서방에 있다거나 십만억 불토를 지나야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불교의 신앙형태를 구분할 때 참선은 자력문이고 염불은 타력문이라고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미혹하고 나약한 중생은 스스로 성불하기 힘들기 때문에 아미타불 같은 타력에 의존하여 성불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불교는 어디까지나 자력문이 있을 뿐 타력문은 없다. 혹 어떤 사람이 아미타불과 정토를 단순히 서방에 있다고 믿고 아미타불을 대상으로 믿고 불렀다 해도 결과는 자신의 불성이며 중생계와 차별이 없는 일진법계의 정토임을 깨닫게 된다. 아미타불을 밖을 향해 불렀어도 결과는 자신의 마음에서 아미타불을 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극락세계의 원래 위치가 어디인지를 일깨워주는 유명한 게송을 봐도 이 말은 틀림이 없다. “겹겹의 푸른 산이 아미타의 법당이요(靑山疊疊彌陀窟) 아득하게 넓은 바다 극락정토 궁전이라(滄海茫茫寂滅宮), 세상의 모든 만물 마음 따라 자재한데(物物拈來無碍) 소나무 위 학 머리 몇 사람이나 보았을꼬(幾看松亭鶴頭紅).”

이처럼 왕생정토의 본질은 죽어서 가는 저 세상이 아닌 살아서 이루어야 할 이 세상임을 밝혀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 같은 극락의 왕생은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부처님은 그 방법으로 아미타불에 대한 염불을 절대방편으로 세우고 있다. 아미타경을 비롯한 정토경들의 주된 수행법은 나무아미타불 명호를 지극 정성으로 끊임없이 부르는 것으로 정토왕생법 즉 성불의 길을 밝힌다. 부처님은 위 본문에서 적은 선근이나 복덕으로 저 국토에 왕생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적은 선근이나 복덕은 세상에서 실천하는 선행과 복행들이다. 극락세계는 누구나 갈수 있는 곳이지만 세상에서 엄청나게 많은 선근공덕을 쌓았어도 그 선근만을 가지고는 극락세계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치 기독교에서 예수를 믿지 않으면 아무리 착한 사람도 구원 받을 수 없듯 정토경에서도 세상의 선행은 칭찬받을 일이지만 정토에 들어가는 데에는 불충분하다. 정토왕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길은 아미타불을 절대적으로 신앙하고 그 나라에 태어나가를 발원하며 끊임없는 염불정진을 해야 한다. 사실 염불수행은 비단 정토경에서만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초기경전에서도 염불수행은 삼매를 얻는데 수승한 방편으로 취급되어 왔고 대승경전에서는 염불법이 더욱 강조, 권장돼 왔다. 대승불교권의 주된 수행법은 좌선이기보다는 염불이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노는 입에 염불하고 까마귀도 염불한다는 말이 나왔을까.

아미타경의 특징은 임종신앙과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점이다. 어떠한 경전들보다도 정토경에서는 중생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방법을 제시한다. 죽음은 중생에게 있어 가장 큰 공포이며 절망이고 비통이다. 여기에 정토경은 능력과 희망과 안심을 제공한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몸을 버릴 때에도 아미타불을 놓치지 않는 이는 이미 선정을 성취하여 죽음을 벗어난 자이며 불성과 계합한 자이다. 임종 시에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살아있는 동안의 선행과 악행을 생각하지 않으며 오로지 나무아미타불 명호를 잊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필경 정토에 왕생하여 무량광 무량수의 불성인 아미타불을 친견하고 문득 생사의 양변을 초월하여 성불의 대열에 들게 되는 것이다.

이제열 불교경전연구원장 yoomalee@hanmail.net

[1318호 / 2015년 11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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