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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에니찌보 죠오닌, ‘묘에쇼닌상’

기자명 조정육

사랑하는 것도, 보살행의 실천도 바로 지금 이 순간

▲ 에니찌보 죠오닌(惠日坊成忍), ‘묘에쇼닌(明惠上人)상’(부분), 13세기 후반, 종이에 색, 145×59cm, 교토 고잔지(高山寺).

사진을 정리하며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았다. 여기저기서 찍은 사진을 보니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도에서부터 동남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일본까지 불교유적지가 있는 곳이면 거의 다 가보았다. 그런 나를 보고 누군가는 ‘그 작은 체구로 안 다닌 곳이 없군요’라며 놀렸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보폭이 짧아서 그렇지 걷는 데는 긴 다리와 별 차이가 없습니다.’ 4년 전에도 인도성지순례를 다녀왔다. 인도여행은 어지간해서는 마음내기 힘든 여정이다. 거리도 멀고 기후도 다르고 잠자리도 불편하고 음식도 입에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행을 택한 것은 순전히 부처님에 대한 흠모 때문이었다. 부처님은 내 삶을 바꿔놓으신 분이다. 비록 지금 내가 부처님 가르침을 온전히 실천하면서 살고 있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알게 되었다. 그런 가르침을 준 스승님이 부처님이다. 캄캄한 어둠 속 같은 삶에 등불을 켜주신 스승님인데 부처님의 자취를 찾고 싶은 마음은 당연하다. 이런 생각을 어찌 나만 하겠는가. 묘에(明惠,1173~1232) 스님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묘에 스님은 두 차례나 인도행을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실패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아주 운이 좋은 편이다. 비 맞으며 걷거나 위험한 배를 탈 필요 없이 그저 비행기 한 번만 타면 몇 시간 안에 인도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좋은 시대에 태어나 많은 것을 누리고 살고 있으니 그만큼 더 깊은 신심으로 감사해야 하는데 그게 참 잘 안된다.

묘에, 무사집안에서 태어나
16세 때 부모를 잃고 출가
구태의연한 종파 혁신코자
1212년 교토 고잔지 개창

묘에 스님에 대해서는 의상대사편에서 잠깐 살펴보았다. 그는 무사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잃고 16세 때 숙부를 은사로 출가했다. 처음에는 밀교에 입문하고 이후 도다이지(東大寺)에서 화엄학을 공부했다. 그는 화엄학을 교학적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실제수행의 길잡이로 수용했다. 그가 도다이지에서 화엄학을 공부할 때 원효와 의상의 가르침에 깊이 경도되었다. 특히 그는 의상대사를 향한 선묘낭자의 숭고한 사랑에 크게 감동받았다. 그는 자신의 꿈을 해석하고 수행에 참고한 ‘나의 꿈(夢記)’을 남겼는데 꿈속에서 자신이 의상대사가 되어 선묘 낭자 앞에 서 있었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그는 구태의연한 종파를 혁신할 목적으로 10여 년 동안 산속 암자에서 참선을 하다 1212년에 교토의 고잔지(高山寺)를 개창하였다. 그는 고잔지를 부흥시킬 목적으로 ‘화엄종조사회전(華嚴宗祖師繪傳)’을 기획했다. ‘화엄종조사회전’은 ‘송고승전(宋高僧傳)’을 바탕으로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의 구도행을 글과 그림으로 묘사한 두루마리다. 전체그림은 의상대사와 관련된 ‘의상회(義相繪)’4권과 원효대사의 ‘원효회(元曉繪)’3권 등 총 7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30m가 넘는 대작이다. 의상대사편에서 살펴본 선묘낭자이야기도 이 두루마리 그림에 포함되어 있다. 그가 원효대사와 의상대사를 얼마나 깊이 그리워하고 우러러 보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원래 호넨 스님의 인품을 존경했다. 그러나 호넨 스님의 사후에 간행된 ‘선택본원염불집’을 읽고서 그 가르침이 부처님의 본래 의도를 왜곡했다고 분노했다. 그는 ‘최사륜(?邪輪)’을 저술하여 호넨 스님의 전수염불의 잘못을 두 가지로 비판했다. 즉 ‘보리심이 필요하지 않다’고 한 것과 ‘성도문(聖道門)을 도적 무리에 비유’한 것은 잘못이라는 얘기다. 호넨 스님은 보리심이 없어도 아미타불을 믿고 염불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묘에 스님은 깨달음을 구하는 보리심이야말로 불도수행의 근본이라고 생각했다. 호넨 스님이 아미타신앙의 입장이었다면 묘에 스님은 석가모니신앙의 입장에서 불교 본래의 깨달음과 실천을 강조했다. 그는 평생을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엄격하게 계율을 지키며 살았다.

그는 석가모니신앙을 실천하기 위해 인도에 갈 계획을 세웠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뜻을 이룰 수는 없었으나 석가모니를 따라 이생에서 보살도를 행하고 중생을 교화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실천했다. 그는 중생구제 대상에 예외를 두지 않았다. 1221년에 황실과 막부가 싸운 죠쿠(承久)의 난이 발생했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도망자들을 숨겨주었다. 특히 전란으로 남편을 잃은 미망인들을 위해 젠묘지(善妙寺)라는 비구니 사찰을 세웠다. 젠묘지에는 아름다운 채색을 입힌 목조선묘낭자상이 모셔져 있다. 법당에 관세음보살이나 대세지보살이 아닌 선묘낭자상이 모셔진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선묘낭자가 의상대사를 통해 불도에 귀의한 후 화엄옹호를 맹세했기 때문에 모셨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비구니가 된 전쟁미망인들이 선묘처럼 수행에 힘쓰라는 묘에 스님의 격려와 법문이 담겨 있을 것이다.

묘에 스님이 숲 속에 앉아 참선을 하고 있다. 검은 승복을 입고 선정인(禪定印)을 한 스님은 고요한 삼매에 잠긴 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둥그렇게 원을 그리며 휘어진 두 그루 소나무가 스님을 보호하듯 아늑한 공간을 만들었다. 스님 주변에는 아무렇게나 자란 나무와 그 나무를 휘감은 넝쿨이 무성하다. 스님은 나무 위에 앉아 있는 걸까. 화가는 전문가가 아닌 아마추어가 그린 듯 정확하지 않다. 먹을 연하게 풀어 되풀이하듯 칠한 바위묘사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곳은 스님이 평소에 자주 와서 수행하는 곳인 듯 편안하고 익숙해 보인다. 짙은 눈썹에 검게 자란 수염과 단정한 얼굴표정은 가까이에서 지켜 본 사람이 아니면 잡아내기 힘든 깊은 통찰력이 들어있다. 전문가는 아닐지 몰라도 스님에 대해 잘 아는 사람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이다. 묘에 스님은 어렸을 때부터 미남이었다. 아버지는 잘생긴 아들을 보고 ‘장차 대신(大臣)을 섬기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러자 묘에 스님은 ‘용모가 수려해서 법사가 되지 못한다면, 차라리 용모를 추하게 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얼굴을 망가뜨리기 위해 마루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부젓가락으로 얼굴에 상처를 내려고 하다가 저지당하기도 했다. 그림 속에 묘사된 밤톨처럼 단단한 얼굴을 보니 그 일화가 이해된다. 수려한 용모의 스님이 지금 나무 둥치 아래 나막신을 벗어놓고 향로와 염주는 나뭇가지에 걸어놓았다. 고요에 잠긴 스님의 머리 위로 새들이 날아다닌다. 솔숲에 부는 바람처럼 스님의 가슴에도 부처님의 가르침이 그윽하게 내려앉는다. 여기서 받은 기운과 깨달음은 산 아래 있는 모든 중생들에게 아낌없이 회향할 것이다.

이 그림의 제목은 ‘묘에쇼닌상(明惠上人像)’이다. 그의 제자인 에니찌보 죠오닌(惠日坊成忍)이 그렸다. 전문적인 화가의 솜씨는 아니지만 묘에 스님과 주변 자연환경을 친근감 있게 그린 이유가 설명되는 부분이다. 쇼닌(上人)은 고승(高僧)을 높여서 부른 말이다. 에니찌보 죠오닌은 그림을 그린 화승(畵僧)이다. 작가미상으로 알져진 ‘화엄종조사회전’도 그의 작품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에니찌보 죠오닌은 왜 스승의 모습을 그렸을까.

카마쿠라시대에는 세속적이거나 종교적인 초상화가 많이 제작되었다. 세속적인 초상화는 혜성처럼 등장한 후지와라노 타카노부(藤原隆信,1142~1205)에 의해 확립되었다. 그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 타이라노 시게모리(平重盛) 등 당시 정계를 휘어잡던 실력자들의 모습을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이상적으로 표현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검은 정장을 입고 관모를 쓰고 손에는 홀을 든 모습으로 엄숙하게 앉아 있다. 조선시대 공신상(功臣像)이 그러하듯 후지와라노 타카노부가 그린 귀족들은 일정한 패턴이 정해져 있었다. 귀족의 위엄과 권위를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일정한 공식을 만들어 그에 따라 인물을 그렸다.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할 정도로 양식적이다. 그런데 그의 초상화가 빛을 발하는 이유는 얼굴 묘사의 섬세함 때문이다. 그는 인물의 심리상태를 예리하게 관찰하여 얼굴에 표현했다. 얼굴을 통해 인물의 개성을 얼마나 정확하게 드러냈던지 비슷한 관복을 입고 있어도 그가 누구인지 어떤 성격의 소유자인지 금새 느낄 수 있을 정도다. 그가 그린 초상화는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초상화를 받은 대신들은 충격을 받을 정도였다. 그가 도달한 초상화의 사실성은 특별히 니세에(似繪)라는 명칭으로 불리며 독자성을 인정받았다. 니세에는 그의 아들 후지와라 노부자네(藤原信實,1176~1265년경)와 손자인 젠아(專阿)에 의해 가예(家藝)로 전해졌다.

종교적인 초상화의 제작은 불교계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사승관계를 중요시하는 선종에서는 인가를 받은 제자가 스승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 유행이었다. 선종뿐만 아니라 다른 종파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신란 스님이 호넨 스님에게 귀의한 후 가르침이 끝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호넨 스님은 몇몇 제자들 사이에만 비밀리에 유통되고 있던 ‘선택본원염불집’을 신란 스님에게 서사하게 했고 자신의 초상화도 그리게 했다. 그림이 완성되자 호넨 스님은 친필로 ‘나무아미타불’을 써주었고 염불의 참뜻을 나타내는 글도 함께 써주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묘에쇼닌상’도 제작되었다. 묘에 스님이 가장 아끼던 제자 에니찌보 죠오닌은 스승의 평소 모습을 잘 관찰한 뒤에 붓을 들었다. ‘묘에쇼닌상’은 작가가 자신의 재주를 자랑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 아니라 제자가 스승을 흠모하는 마음으로 그린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부족한 실력을 무릅쓰고서라도 그가 스승의 초상화를 그린 이유는 명백하다. 스승이야말로 그가 닮고 싶은 모델이자 흠모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 마음은 묘에 스님이 부처님의 땅인 인도에 가서 존경하는 스승의 발자취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묘에 스님은 인도에 가지 못했다. 두 차례나 시도했지만 결국 가지 못했다. 갈 수 없었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애달팠을까. 그는 인도로 떠나려고 했던 바닷가의 돌을 가져와 석가모니의 진영을 대하듯 예배하였다. 그는 석가모니를 자부(慈父)로 여겼으며 자신을 ‘여래멸후유법어애자(如來滅後遺法御愛子)’라 칭했다. 진실로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뜻이다. 묘에 스님이 시공간을 뛰어넘어 자신을 석가모니의 아들이라 확신한 근거는 ‘대보적경’의 다음 구절에서 찾았다.

“말법 세상에는 선을 쌓지 않는 승려가 늘어나겠지만, 그런 가운데 바른 수행을 행하고 석가의 유적을 보고 자신을 연모한 나머지 목메어 우는 자가 있다면, 그야말로 내가 사랑하는 곳의 아들이다.”

사진으로 보는 이미지는 이미지일 뿐이다. 직접 봐야 한다. 현장에 직접 가서 느껴야 한다. 가능한 한 자주 그리고 많이 떠나야겠다. 갈 수 있을 때 가고 볼 수 있을 때 봐야겠다. 언젠가는 가고 싶어도 갈 수 없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때가 올 것이다. 그러니 그때 가서 후회하지 말고 지금 할 수 있을 때 해야겠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쏟아주는 것도 지금. 죽음의 공포와 맞서 싸우는 연습도 지금. 모든 것은 지금 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성지순례를 떠나는 이유가 아닐까. 가능하면 자주 가면 좋을 것이다. 한 번 먹는 밥으로 영원히 배가 부르지 않듯 성지순례를 한 번 다녀온 것으로 신심이 오래 지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내년에는 한 달에 한 번씩 국내 사찰순례를 떠날 예정이다. 원효대사가 걸었던 길을 따라, 의상대사가 침잠했던 기도터를 찾아 떠날 참이다. 그리고 나도 그분들의 행동을 따라서 실천해 봐야겠다. 생로병사를 해결하고 보살행을 실천할 때까지 멈추지 않고 따라해 봐야겠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319호 / 2015년 11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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