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12연기-⑥처
41. 12연기-⑥처
  • 이진경 교수
  • 승인 2015.11.17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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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기관이 만들어 낸 허구의 식별작용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12연기에서 조건 짓고 조건 지어지며 연이어지는 12개의 개념을 보면서 또 하나 피할 수 없었던 의문은, 집착과 무지를 낳는 그 연쇄 가운데 ‘자아’ 내지 ‘아상’은 왜 없을까 하는 것이었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핵심 중 하나가 실체를 갖지 않는 ‘자아’의 관념이 모든 무지와 집착의 근본적인 이유라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무지와 고통이 발생하는 개념의 연쇄 가운데 자아 내지 아상이 꼭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놀랍게도 그게 없다는 것이다. 아상이라는 것 자체가 무지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서 그랬던 것일까? 그렇다면 마지막에 있는 노사의 관념 근처 어딘가에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아상을 버리는 것이 지혜에 이르는 요체라면 12연기를 역으로 거슬러가는 ‘역관’의 과정 어딘가에 아상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

신체 기관들이 작용하면서
신체 안팎의 경계 만들지만
면역계 식별작용 이상 생기면
내부 세포 파괴하는 것처럼
6처의 식별작용은 모두 허구


아상이란 관념이 복합적인 것이어서, 식이나 6처, 애착 등과 같은 분석적 개념과 위상이 다르기에 그 개념들 사이에 넣는 것이 부적절했다고 답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애착이나 집착은 ‘나’나 ‘내 것’이란 관념을 전제함을 생각하면, 그 앞의 어딘가에 ‘나’의 관념이 보이지 않게 숨어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12연기의 연이은 개념 가운데 그 ‘나’의 자리는 어디일까?

논란의 여지가 많은 주제지만, 그것은 식과 6처 사이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6처에 속하는 각각의 작용은 그 자체로는 나름대로 식을 형성하는 상대적으로 독립된 통로지만, 의식은 다양한 식을 하나로 통합하는 기능을 한다. 데카르트가 보여준 것처럼 의식은 ‘생각하는’ 기능 속에서 ‘생각하는 나’의 존재를 자명하다고 여기는 ‘환상’ 내지 오인의 구조를 포함하고 있다. 생각하는 ‘나’가 없다면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니, 그런 나의 존재는 의심할 여지가 없이 자명하다는 것이 그것이다. 따라서 의식은 ‘나’라는 관념과 떼기 힘들게 결합되어 있다고 해야 한다.

그리고 6처를 감각적 활동(혹은 기능이나 능력)이라고 한다면, 이는 그와 상관적인 감각기관을 동반함을 뜻하는데, 근대생물학의 개념을 빌어 말하자면, ‘기관(organ)’이란 그것을 ‘도구(organ)’로 사용하는 전체인 유기체(organism)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유기체라는 전체의 생존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따라 감각기관, 운동기관, 순환기관, 소화기관 등이 정의되는 것이다. 즉 6처에 함축된 감각기관의 개념은 그것을 하나로 통합하는 유기체라는 전체를 가정하고 있으며, 바로 그 점이 명색 이전에 오는 미시적인 ‘식’과 그 이후에 오는 ‘6처’를 개념적으로 구별해주는 요인이라는 것이다. 이로 인해 ‘눈이’ 본 것, ‘귀가’ 들은 것이 아니라 ‘내가’ 본 것, ‘내가’ 들은 것 등으로 인지하게 된다. 따라서 유기체라는 생물학적 ‘전체’가 신체적인 차원에서 ‘나’란 관념을 떠받치고 있다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식과 6처 사이에 있는 명색의 개념이 ‘자아’의 개념이 숨어 있는 곳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이는 앞서 식의 활동이 일차적으로 안과 밖에 대한 구별을 포함하게 된다고 하면서 언급했던 면역반응에서 이미 추측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면역세포들이 신체의 내부와 외부를 식별한다 함은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경계선이 있음을 뜻하는데, ‘나’라고 불리는 유기체의 신체적 경계가 바로 그것이 된다. 이 경계선을 기준으로 내부와 외부가, 나와 세계가 분할되고 구별되는 것이며, 안에 있던 것과 밖에서 들어온 것이 대비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면역계는 ‘나’의 신체에 속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해주는 미시적인 식의 작용이라고 해야 한다. 신체적 내지 세포적 차원에서 작동하는 이 식이 ‘자아’라는 관념의 무의식적 기반이 된다. 의식 ‘이전’에 존재하고 작동하는 이런 식이 유식학에서 말하는 7식(‘말라식’)과 매우 밀접하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식을 조건으로 하는 명색의 식별이 ‘자아’를 형성한다. 자아는 신체적 차원에서 신체의 여러 ‘기관’을 하나의 전체로 통합한 유기체와 상응하는 관념적 상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 ‘자아’라는 것이 신체적 실체를 가짐을 뜻하는 게 되지 않는가? 면역계가 바로 자아라는 관념의 신체적 토대라고 하는 것이 되지 않는가?

일단 여기서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은 자아나 아상이란 의식의 차원에서 우리가 갖거나 버릴 수도 있는 그런 ‘관념’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상이 모든 문제의 원인임을 잘 알아도, 그래서 아상을 버려야지 결심해도 실제론 버려지지 않음은 익히 잘 아는 사실 아닌가! 그것은 의식이 아니라 그 ‘이전’에 작동하는 무의식에 속하며, 생각하는 ‘나’가 아니라 신체적 층위에서 작동하는 세포적 내지 분자적인 ‘나’인 것이다. 깨달음이 ‘아는 것’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함은 필경 이 때문일 게다.

그러나 이것이 자아가 실체임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면역계가 나와 세계의 경계선을 기준으로 작동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 경계선은 어디서 오며 과연 어떻게 존재하는 것일까? 유기체의 피부가 경계선일까? 그렇기도 하다. 피부 자체도 유기체의 면역계 중 하나다. 피부만 그런 게 아니다. 생명체의 면역계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고, 그것이 구획하는 경계선은 면역계마다 다르다. 가령 입이나 코, 위나 질 등 체강 안에 있는 점액들도 중요한 면역계 중 하나다. 노말 플로라라고 불리는 면역계도 있는데, 이는 외부에서 침투해 들어온 세균들이 유기체의 신체에 적응하여 신체의 일부가 된 면역계다. 우리가 흔히 ‘면역계’라는 말로 떠올리는 ‘특이적인 면역계’는 이 여러 면역계 중 하나일 뿐이다. 이 여러 가지 면역계가 모두 내부와 외부를 구별하며 작동하지만, 이들이 구별하는 내부와 외부의 경계는 모두 다르다. 체강 안에 있는 면역계가 그은 경계선과 피부의 면역계가 그은 경계선이 다르며, 노말 플로라가 구별하는 경계선도, 특이적 면역계가 구획하는 경계선도 모두 다르다. 그렇다면 어떤 게 진정한 ‘나’의 경계일까?

진정한 나의 경계선, 실체적인 경계는 없다. 경계선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역으로 면역계의 식별작용이 경계선을 만드는 것이다. 즉 식별작용이 달라지면 경계도 달라진다. 특이적 면역반응은 역으로 이를 아주 잘 보여준다. 면역세포가 외부에서 침투한 세균을 공격한다고 했는데, 사실 모두 공격하는 것도 아니며, 반대로 자기 신체를 공격하기도 한다. 류머티즘 같은 ‘자가면역질환’은 면역세포가 자기 신체를 공격하기에 발생하는 ‘병’이다. 루푸스병은 모든 신체기관을 분자적 수준에서 면역세포가 공격한다. 또 간염이나 대상포진 등은 신체 내부에 있던 세균이 신체의 면역력이 약해지면 발생하는 병인데, 이는 신체 내부에 있지만 공격받지 않고 방치되는 세균이 있음을 뜻한다. 사실 유기체의 신체는 밖에서 들어온 수조개의 미생물로 가득 차 있다. 이들 또한 면역세포의 공격에서 면제되어 있다.

이 모두는 면역세포의 식별활동, 그것이 구획하는 경계선이 지극히 가변적임을 뜻한다. 그것은 실체가 아니라 신체나 세균, 면역세포의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경계인 것이다. 그렇기에 에이즈처럼 외부에서 온 세균의 이질성을 신체가 감당할 수도 없는데도 면역반응 없이 모두 받아들이는 일도 가능한 것이다. 면역계가 가동시키는 ‘자아’는 실체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허구’다. 그러나 그것은 신체적 능력에 따라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배제하기 위한 작용이고, 그런 점에서 ‘이유 있는 허구’다. 신체적 능력에 따라 가변화되는 허구다. 외부적인 것을 수용할 수 있는 신체적 능력에 따라 무의식적인 식별작용(‘아상’)이 만들어내는 불가피한 허구다.

정신분석학은 ‘정신’의 차원에서 자아의 관념 또한 허구임을 보여준다. 프로이트는 유아들의 ‘성생활’을 유심히 관찰하여 ‘부분대상’이란 개념을 만들어냈다. 그에 따르면 갓 태어난 아이들은 ‘자아’라는 관념이 없다. 그들도 생존하기 위해 태어난 직후 맹목적으로 보이는 양상의 행동을 한다. 젖을 찾아 엄마에게 매달리고, 소화하고 남은 찌꺼기를 배설하는 게 그것이다. 이런 아이의 행동을 추동하는 것은 ‘욕망’이다. 그런데 젖을 찾아 움직이게 하는 욕망은 ‘아이’의 욕망이 아니라 ‘입’에 속한 욕망이고, 그것이 찾는 것은 엄마가 아니라 젖이다. 즉 유기체라는 전체에 속한 게 아니라 입이라는 ‘부분’에 속한 욕망이란 점에서 ‘부분적인 욕망’이다. 이 부분적인 욕망의 대상이 부분대상이다. 젖이나 똥이 그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엄마젖이 아니라 고무 젖이나 젖병을 물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을 얻는 것이다. 배설 또한 그렇다. 배설의 쾌감을 낳는 똥이 젖 다음에 오는 부분대상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욕망은 항문에 속한 부분적인 욕망이다.

이 시기의 유아들의 ‘영혼’에는 ‘자아’가 없다.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아이들이 자아가 형성되는 것을 ‘거울’의 개념을 통해 설명한 바 있다. 생후 6개월을 지나면 유아들이 거울을 보며 놀라거나 웃고 즐기는 일이 이미 관찰된 바 있다. 라캉은 그 이유를 이전에는 단지 입이나 항문 같은 파편화된 신체들만 있다고 느끼던 아이가 거울을 통해 그것들이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음을 ‘발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즉 거울상을 통해 입이나 항문 등의 여러 부분이 하나로 결합하여 나의 신체를 이룸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 거울상이 바로 ‘나’라고 하는 동일시를 통해 자아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거울상이라는 허구적 이미지에 대한 동일시, 필경 오인을 뜻하는 이 동일시가 바로 자아라는 것이다. 이것이 정신적인 층위에서의 자아 관념 전체라곤 할 수 없겠지만, 이것이 자아의 관념이 상상에 의해 허구적으로 형성되는 하나의 양상을 보여줌은 분명하다.

6처 이전의 식이란 이처럼 유기체라는 통합적 ‘전체’가 발생하기 이전의 식이라면, 6식은 유기체의 기관이 발생한 이후의 식이고, ‘자아’라는 허구적 전체가 발생한 이후의 식이다. 6처는 이런 6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활동이고 그런 활동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명색의 구별에서 발생한 자아에 의해 작동하는 식별능력이요 식별작용이다. ‘그것’이, 즉 눈이나 귀가 보고 듣는 게 아니라 ‘내’가, ‘나의’ 눈이나 귀가 보고 듣는다는 허구적 판단, 하지만 이유 있는 허구이기도 한 그런 식별작용이 바로 6처인 것이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319호 / 2015년 11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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