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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다이호우잉의 ‘사람아 아 사람아!’

기자명 이미령

사랑도 사람을 앞서지 않는다지만, 휴머니즘은 과연 존재할까

‘사람아 아 사람아!’
다이호우잉
신영복 옮김
다섯수레
하루도 쉬지 않고 중국과 관련한 뉴스가 매스컴에 오르내립니다. 사람도 많고 땅도 넓으니 기이한 일도 많이 벌어지지만 그래도 뉴스를 통해 만나는 중국의 오늘은 그야말로 상전벽해입니다. 세계적인 경제대국으로 우뚝 서서 여느 자본주의국가 못지않게 부와 향락을 누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 과연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가 맞는지 의아할 정도입니다. 이런 중국을 보면서 불과 4, 50년 전 문화대혁명의 처참한 광풍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중국 사람들이 그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고 평가할지가 굉장히 궁금합니다.

문화대혁명 몰아친 광풍 아래
간신히 살아남은 여 지식인

사랑하던 남편조차 돌아서는 
배신의 시대 걸어온 여정 통해
인간·이상·사랑의 의미 질문

인간 존엄 중요하다 외치지만
가장 먼저 내팽겨쳐지는 가치

돈에 미쳐버린 우리의 시대는
이데올로기에 미쳤던 그 시대와
무엇이 다른가 자문하게 돼

남의 나라 사정에 왜 그리 호기심을 키우냐고요?

무엇보다도 ‘문화대혁명’이란 말이 흥미롭기 때문입니다. 문화적으로 세상을 혁명한다는 말인지, 문화를 크게 혁명한다는 것인지도 애매합니다만, 아무튼 동서고금 온 나라들마다 문화강국이 되려고 발버둥을 치는데 중국만큼은 그 찬란한 문화를 죽자고 때려 부수었습니다. 1966년부터 거의 10년에 걸쳐서 말이지요. 그 속사정을 모르는 바도 아닙니다. 마오쩌둥의 속셈은 그만두고라도 수많은 인민들이 조상 대대로 학대받고 천시 받으며 살아온 시절을 생각하면 문화라는 미명 하에 온갖 죄악을 저지른 저 지배계급들을 일거에 쳐부수고픈 마음도 들겠다 싶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구태와 악습을 부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면서 철저하게 파괴가 자행된 폐허 위에는 지독한 자괴감과 모멸감과 허무와 불신과 눈치만이 남았습니다. 몇 권의 책으로 만나본 문화대혁명의 뒤끝은 그렇게 씁쓸하고 찝찔한 맛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한 권의 소설책은 그런 씁쓸함 속에서도 사람 냄새를 풍기고 있습니다. 쑨위에(孫悅)라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다이허우잉의 장편소설 ‘사람아 아 사람아!’입니다. 쑨위에는 문화대혁명의 광풍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지식인 여성입니다. ‘간신히’라고 말한 이유는, 쑨위에가 문혁 당시 인민들 앞으로 끌려 나가 자기비판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을 때 사랑하는 남편으로부터 강제로 이혼을 당하고 농촌으로 내쳐졌다가 복권되었기 때문입니다.

소설에는 쑨위에 말고도 지식인들이 여럿 등장합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지식인들은 안간힘을 쓰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동료를 배신하고, 고발하는 일은 다반사였습니다. 그 와중에 한 자리를 용케 차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전히 이쪽저쪽 줄서려고 기웃거리는 사람이 있고, 고통을 견디다 못해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면서 살자는 쪽으로 세계관이 바뀐 사람도 있습니다.

쑨위에의 남편 자오전후안(趙振環)은 나름대로 지조 있게 버티다가 현실에 무릎을 꿇은 쪽입니다. 그는 의지가 강한 아내와의 결혼생활에 싫증을 느끼던 차였습니다. 중학 시절부터 사랑을 키워왔다가 숱한 남성들의 질투를 한 몸에 받으며 쑨위에와 결혼을 했건만 쑨위에의 처지가 인민의 비판을 받는 나락으로 떨어지자 그게 버거웠던 게 틀림없습니다. 그는 야멸차게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편지를 썼고, 그리고 이혼 승락을 받아낸 뒤 관능미가 넘치는 여성과 재혼합니다. 쑨위에는 어린 딸마저 저버린 남편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쑨위에의 마음에 남편만큼, 아니 남편보다 더 크게 자리하고 있는 남성이 한 사람 있습니다. 바로 허징후(何荊夫)입니다. 일가친척 피붙이 하나 없는 외로운 남자. 지독하게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나 관리들의 수탈에 항거하다 목숨을 잃은 삼촌과, 그 삼촌의 가족들을 거두느라 불행을 자초한 부모를 보고 자란 남자입니다. 허징후에게 사회주의 혁명은 반드시 일어나야만 했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 세상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영원히 나눠지지 않고, 서로서로 자신의 것을 양보하고 나누는 아름다운 미덕을 구현하는 체제가 사회주의라고 그는 굳게 믿었습니다.

하지만 마오쩌둥의 1960, 70년대는 모순투성이였습니다. 혁명이라는 명분 아래 온갖 부조리가 저질러지자 허징후는 결연히 일어섰고, 그 바람에 추방령이 내려지자 그는 오랜 세월 벽지로 떠돌면서 지내야했습니다. 그곳에서도 철저하게 자기를 버리고 노동자의 삶 속으로 뛰어든 그에게 본명 대신 탄부 허(何), 목수 허, 돌 나르는 허, 발파 담당 허, 수레 끄는 허, 그리고 야담가 허…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사람을 정당하게 옹호하다 받게 된 처벌을 기꺼이 견딘 이후 복권이 이뤄져서 예전의 대학교원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도 그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공산혁명과 문화대혁명의 정신을 신봉한다는 사람들이 적당히 기회주의자가 되어 현실과 타협하는 삶을 살아갔지만 그는 뼛속까지 사회주의 이상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 일러스트=강병호 화백

그런데 이런 허징후가 가장 우선으로 따르는 가치가 있으니 그게 바로 ‘사람’입니다. 사회주의도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하고, 공산주의도 그렇고, 혁명도 개혁도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입니다. 그는 휴머니스트입니다.

이런 휴머니스트 허징후에게도 말 못할 연애사가 있습니다. 쑨위에를 향한 일편단심입니다. 대학에 갓 입학한 쑨위에를 본 순간 첫눈에 반해버린 뒤로 한결같이 그녀를 향해 연정을 품어왔습니다. 하지만, 쑨위에는 그의 사랑을 받아줄 수가 없었습니다. 고향의 중학시절부터 좋아 지내온 자오전후안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쑨위에를 향한 허징후의 연정은 식지 않았습니다.

쑨위에가 그런 허징후의 마음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녀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사람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는 것보다 더 큰 배신은 없다는 것이 쑨위에의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보란 듯이 쑨위에는 배신을 당했고, 이혼녀가 된 채 딸 하나를 건사하며 늙어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 쑨위에에게 허징후가 다가가게 됩니다.

과연 허징후는 쑨위에와 맺어질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반가운 건, 쑨위에의 딸이 허징후를 아빠처럼 믿고 따른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엄마의 깊은 슬픔의 늪에 반쯤 빠져서 지내던 어린 딸은 허징후를 만날 때면 따뜻한 위로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에게서 엄마의 처지까지 이해하는 마음을 배우게 됩니다. 딸은 이런 허징후가 한시라도 빨리 아빠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지냅니다. 쑨위에 역시 그가 싫은 기색도 아니니 이만하면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맺어질 테지요. 허징후로서는 그토록 사랑하던 여인과, 그 여인을 쏙 빼닮은 소녀를 가족으로 맞이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큰 행복이겠습니까?

하지만 하필 이때 방해꾼이 등장합니다. 쑨위에를 무자비하게 버린 전남편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다시 결합하기를 간절히 원하기 때문입니다. 진심으로 뉘우치며 밤마다 눈물의 속죄편지를 쓰던 전남편은 용기를 내서 쑨위에를 찾아옵니다. 그리고 자신이 버린 딸에게 간절한 편지를 쓰며 아비로서의 정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허징후가 아빠였으면 좋겠다던 어린 딸은 눈물로 호소하는 친아버지에게 말할 수 없는 끈끈한 정을 느낍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뼛속까지 휴머니스트인 허징후는 그토록 사랑하던 여인과의 결합을 포기합니다. 사랑도 인간을 앞설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입니다. 아비를 그리워하는 어린 딸의 마음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아무리 그 아비가 가정을 저버렸다고 해도 진심으로 뉘우치고 다가오는데, 그리고 버림받았던 딸도 아비의 품을 저토록 그리워하는데 이들 가정의 화목을 막을 명분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결정은 쑨위에에게 달렸습니다. 과연 쑨위에는 누구를 향해 달려갈까요?

결코 가볍지 않고 얇지도 않은 이 소설의 마지막은 쑨위에가 전남편 자오젼후안에게 보내는 긴 편지로 마감합니다. 그 편지 내용은 보리살타 서재에서 공개하지 않으려 합니다. 책읽기를 즐기는 분이시라면 모쪼록 직접 천천히 읽어 가시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가장 높은 가치로 여긴다는 휴머니즘은 예나 지금이나 소중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런지는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할 일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늘 무엇인가에 의해 훼손당해 왔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하다면서 언제나 가장 먼저 내팽개쳐진 것이 인간의 존엄성이요, 휴머니즘입니다.

그토록 강렬하게 품었던 한 여인에 대한 사랑조차도 기꺼이 내려놓을 줄 알았던 허징후의 휴머니즘과, 뼛속 깊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밤마다 눈물의 편지를 써내려가는 전남편 자오젼후안의 애절한 사랑, 이 둘이 울림은 퍽 강하게 나를 흔들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사랑이라 여겨왔던 것이 과연 무엇을 향한, 무엇을 위한 감정이었는지를 곰곰 돌아보는 쑨위에의 자세에서 나는 깊은 공감을 얻습니다. 사랑했던 전남편에게서 배신을 받은 것은 치명적인 상처지만, 그 상처로 인해 쑨위에는 자신이 사랑이라 여겼던 것을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진짜 사랑을 더 크게 펼치겠다고 다짐합니다.

돈! 돈! 돈!

돈 앞에서 사랑도 거침없이 팔고 사며, 명예와 양심도 돈 앞에서는 낡은 부지깽이만도 못한 신세가 되어버린 세상. 이렇게 온 세상이 돈에 미쳐버린 이 세월은, 혁명이니 인간개조니 하는 이데올로기에 미쳐버린 그때의 시절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든, 어떤 체제와 이데올로기 아래에서 살아가든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오직 하나, 사람입니다.

중국작가 다이허우잉은 쑨위에와 허징후를 통해서 그걸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온 세상이 “세월 따라 가치관도 변하는 거야. 사람이란 원래 그런 거야, 사람아, 아 사람아!”라고 푸념하는 가운데 슬그머니 변절해도, 원래 그런 법이 어디 있냐며, 서로 사랑하고 사이좋게 나누는 세상을 가꿔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메시지를 작가는 책 속에 담고 있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한국은 물론이요) 중국 졸부들의 기행은 매스컴에 오르내릴 것입니다. 거침없이 돈을 뿌려대는 저들에게 “당신들의 그 허영의 밑바닥에는 문화와 인간성이 말살되는 시절이 있었고, 그 시절을 꿋꿋하게 버텨낸 휴머니스트들이 있다는 걸 알고는 있느냐”고 감히 말해주고 싶습니다. 

이미령 cittalmr@naver.com

[1319호 / 2015년 11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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