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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천등산 봉정사-영산암-개목사-천등·관음굴

20대 푸른 감성이 지은 암자에 들다

▲ 저토록 예쁜 단풍길 보이려 1년을 숨죽여 왔던 영산암. 만추의 정감 어린 길이 고즈넉하다.

“그 어디 솜씨 좋은
장인 없으신가?
작은 불감에
영산암 조각해 주면
보고 싶을 때
꺼내 볼 터인데! ”

“시작도 끝도 없어라. 나지도 죽지도 않는 이 한 물건! 마음 달이 물 밑에서 차오를 때, 나의 주인공은 어디로 가는가? 강남에서 온 제비야 고향 길은 어디로 나 있더냐. 네가 물어간 볍씨 한 알에 황금빛 수선화는 입을 열더냐?”

청년 시절,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금방 닿을 곳이었으나 남겨 두었다. 20대 푸른 감성이 그려낸 풍경 혹 아닐까봐, 하늘이 허락하면 백년, 천년 머물고 싶은 집인데, 당장 달려가 보고는 상상했던 것과 너무 달라 실망하거나 금세 실증낼까봐 남겨 두었더랬다.

▲ 봉정사 만세루 앞에 펼쳐진 천등산 전경은 일품이다.

1989년, 군 제대 직후 서울서 관람한 영화 한 편은 강렬했다. 분명 오색 빛 감도는 영화인데 흑백사진 보는 듯했다. 등장인물들이 내어 보이고 싶은 심중의 언어들은 모두 영상으로 처리됐다. 영상과 영상 사이서 간혹 터져 나온 대사는 철봉으로 내리쳐도 부서지지 않을 것처럼 꽉 응축되어 있었다. ‘한 물건’, ‘생사일여’, ‘마음 달’ 등의 낯선 언어들을 툭툭 던졌던 노승 혜곡의 일갈이 특히 그랬다. 고요가 내려앉은 강길을 달빛 홀로 걷듯, 깊은 침묵의 강 위에 명암 짙은 영상만 흐르던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이야기다.

이 작품으로 배용균 감독은 제42회 로카르노 영화제 그랑프리인 황금표범상을 수상했는데 영상에 고졸미를 더해준 건 암자였다. 노승 혜곡과 동자승 해진, 그리고 기봉 수좌 세 인물들의 촌철살인 선문답이 오갔던 곳은 안동 천등산 봉정사 부속 암자인 영산암. 26년 동안 꼭 동여매두었던 그 암자를 향해 이 길을 걷는다.

▲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 사진 정면)과 고금당(보물 제449호)에 이른 아침의 햇살이 들고 있다.

돌계단 꼭대기에 우뚝 서 있는 만세루. 저 누각 지나면 국보 대웅전과 극락전을 만날 수 있다.

의상 스님의 제자 능인 스님(의상 스님이라는 설도 있다)이 종이봉황을 접어 날렸고, 그 종이봉황 머문 자리에 산문 열고는 봉황이 머무른 절 ‘봉황사(鳳凰寺)’라 이름 했다. 전각은 각각 독립해 있지만 양 처마 끝은 거의 닿아 있어 멀리서 보면 하나의 전각처럼 보인다.

아직도 한국 현존 최고(最古) 목조 건축물이 부석사 무량수전(1376년)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 많은데, 최고(最古)의 자리는 이미 오래 전 봉정사 극락전(1363년 이전)에 물려줬다. 고려 공민왕 12년에 극락전 지붕을 수리했다는 기록이 1972년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아쉬운 건 저 극락전이 유신체제 때 고증없이 허술하게 복원되었다는 사실이다.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극락전 위엄이 다른 전각에 비해 현격히 떨어진다는 사실을 직감으로 알 수 있을 정도다. 좀 더 세밀한 고증 속에 복원했다면 봉정사는 지금보다 훨씬 더 운치를 더했을 터인데 말이다.

▲ 새벽 운무가 봉정사 대웅전(국보 제311호, 사진 정면)과 화엄강당(보물 제448호)에 내려 앉아 운치를 더하고 있다.

봉정사와 영산암 사이로 난 길이 고즈넉하다. 1년 동안 숨죽여가며 물들여 왔던 단풍이 늦가을 길을 떠난 나그네를 붉게 물들인다. 영산암은 저 단풍숲길 옆 운무 속에 자리하고 있다.

기어코 바위 뚫고 나와 생을 틔웠던 한 그루 소나무 참 많이 자랐다! 소년기 소나무였던 듯싶었는데 어엿한 청년이다. “나지도 죽지도 않는 한 물건!” 사자후 터진 곳이 저 응진전이다. 그때 노승의 일갈 듣는 이 없었지 아마. 기봉 수좌는 나무하러 갔고, 해진은 산에서 딴 열매 맛보고 있었지 않았나. 아, 도량 기웃거렸던 맹꽁이 한 마리 있었다. 사자후에 계합했는지, 아님 놀랐는지 재빨리 응진전 앞 탑 앞을 지나갔더랬다.

▲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한 영산암 전경.

운무 걷히자 노승이 차 마시던 우화루에도 황금빛 스며든다. 그러고 보니 영화 ‘동승’도 여기서 촬영됐다. ‘ㅁ’자 모양의 공간 안에 응진전과 관심당, 우화루, 송암당이 서로의 양 어깨를 맞대고 앉아있다. 영화서 본 절보다 더 정겹고 소담스런 암자다. 그 어디 솜씨 좋은 장인 없으신가?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불감처럼 저 영산암 조각해 손에 쥐어주면 주머니에 넣었다 보고 싶을 때 꺼내 볼 터인데!

능선 따라 30여분 오르니 나뭇잎 사이에 숨었던 절 제 모습 빼꼼히 드러낸다. 산사 찾아온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준다는 개목사(開目寺)다.

이 산에 흥국사(興國寺)라는 절이 있었다. 안동 땅에 유독 소경 많아 그 사찰 비보사찰 삼았는데 이후 눈 먼 사람들 점차 사라져 개목사로 그 이름 바꿨다. 조선 초기 명재상 맹사성이 안동부사로 부임해 이 땅 둘러보고는 소경 많은 이유가 천등산 산세 때문이라 보고 절 이름을 개목사라 고쳐 부르니 눈 먼 사람들 점차 없어졌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 눈을 뜨고 있어도 실상을 보지 못하면 소경이란 사실을 저 개목사는 1,000년 넘게 설파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로 좀 더 거슬러 올라가자. 봉정사 지은 능인 스님이 산 정상 바로 아래 동굴서 정진하고 있었다. 강산이 한 번 바뀔 즈음 아름다운 한 여인이 스님 앞에 나타나 그의 귓전에 속삭였다.

“스님의 지고한 덕에 감복해 찾아왔습니다. 스님과 함께 산다면 여한 없겠습니다.” “난 부처님 공덕만 사모할 뿐 세속의 환락은 바라지 않는다. 썩 물러나 네 집으로 돌아가라!” “대단하십니다. 옥황상제 명으로 스님을 시험코자 왔었습니다. 인천의 사표가 되어주시기를 비옵니다.”

여인이 떠난 자리에 청명한 기운 내려오더니 굴 주변을 환하게 비췄다. 여인 목소리 하늘서 다시 들려왔다. “수행처로 삼으신 굴이 어둡습니다. 옥황상제께서 보내신 등불 전하오니 더욱 정진하시어 도를 이루옵소서.”

하늘이 내린 등 ‘천등(天燈)’이 스님 갈 길 비췄던 것일까? 능인 스님은 깨쳤다. 애당초 ‘대망산’이었던 이 산은 그 후 천등산으로 불렸고, 도를 이룬 능인 스님은 굴 바로 아래에 99칸의 절을 지었다. 그 절이 지금의 개목사라면 당시엔 봉정사보다 더 큰 산사였을 게 분명하다.

▲ 개목사 원통전(보물 제242호) 전경. 부득이한 보수로 인해 고졸한 맛은 좀 떨어졌지만 품격 높은 전각이다.

푸른 소나무 군락지 아래 자리한 개목사는 은빛 억새와 두 그루의 노란 은행나무와 어우러져 만추의 빛을 자아내고 있었다. 잠깐 거닐기만 해도 번뇌 하나 ‘툭’ 던져 버릴만한 여유를 선사하는 정갈한 도량이다. 능인 스님이 수도해 깨친 자연석굴 ‘천등굴’ 위용은 안동 땅을 덮어버릴 기세다. 맹사성이 천등산 산세 운운했는데 그 기운은 저 천등굴서 솟았을 듯싶다. 어쩌면 능인 스님이 종이봉황을 접어 날렸던 자리가 여기 어디쯤일 수도 있겠다 싶다. 그 좋은 터 그냥 지나갈 수 있나! 털썩 앉는다. 그리고 걸어온 산길 돌아본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영화 한 장면. ‘타닥, 타닥!’ 아궁이서 붉은 불씨 붙어 있는 부지깽이 하나 들어 코앞에 갖다 대며 마냥 즐거워하던 동승 해진. 기억에도 없는 어머니 보고 싶었을까? 아련함도 아닌, 슬픔도 아닌 묘한 표정으로 사형 기봉 스님에게 묻는다.

“산을 내려가면 큰 절이 있잖아요. 큰 절 아래로 내려가면 뭐가 있지요?” “사바세계!” “사바세계? 스님은 사바세계에서 왔어요?” “그럼. 해진이도 거기서 왔지.” “큰스님두?” “응.” “왜 모두가 사바세계에서 왔죠?” “그곳에선 마음이 평화롭고 자유롭지 못했어.” “왜요?”

기봉의 답 대신 혜곡 노승의 선법문 하나 흐른다.

“그 곳의 모든 것을 하나로 담을 커다란 마음 그릇이 없는 탓이다. 실은 그릇은 있으되 아상이 그릇을 가득 채우고 있으니!”

천등굴서 5분만 오르면 정상이다. 관음굴로 난 길을 걷는 내내 산 아래의 늦가을 마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천등산은 논과 밭, 꽃과 나무, 그리고 강마저 품고 있었다.

채문기 본지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도움말]

 
길라잡이

들머리는 천등산 휴게소(주차장). 천등산 매표소에서 걷기 시작해 일주문을 지나 봉정사까지 걸리는 시간은 15분. 영산암과 지족암은 봉정사 지척(5분)에 있다. 개목사 가는 초입을 찾는 게 만만치 않다. 가능하면 봉정사 경내 문화재안내소서 길을 묻고 산행하는 게 좋다. 일단, 일주문까지 다시 내려와 왼쪽을 보면 지팡이가 꽂혀 있는 사물함이 있는데 그 곳이 초입. 큰 밭을 오른쪽으로, 봉정사를 왼쪽에 두고 산길을 오른 뒤 능선(10분 이내 거리)을 만나면 직진(왼쪽, 11시 방향)해 산길 따라 오르면 개목사에 닿는다. 개목사에서 천등굴 가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 하나는 개목사를 왼쪽에 두고 지나며 능선을 타고 올라간 후 천등산 정상을 지나 천등굴로 내려와 벤치쉼터로 향하는 길. 또 하나는 개목사로 들어간 길을 다시 나와(2분 거리) 천등굴로 오른 후 정상에서 능선을 타고 벤치쉼터로 향하는 길. 관음굴을 지난 직후(3분 거리) 작은 샘터로 내려와 천등산 휴게소로 원점회귀하면 된다. 등산시간은 3시간 30분.


이것만은 꼭!

 
대웅전 후불탱화 : 1713년 제작된 불화. 재질은 비단이며 유려한 필치에 금니의 화문 등 18세기 전반 경상북도 지역 불화의 특징이 잘 표현된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보물 제1643호)

 

 

 

 
극락전 앞 3층석탑 : 건립 연대는 고려 중기로 추정. 옥개석(屋蓋石)을 볼 때 높이에 비해 폭이 좁아 처마의 반전(反轉)이 약하다는 평가다. 그러나 이 탑에는 한국 전통의 자물쇠가 새겨져 있어 이채롭다. 탑 높이는 318㎝.

 

 

 

 

 

 
천등굴과 관음굴 : 능인 스님이 수행했다는 천등굴<사진>은 산 정상 바로 아래(3분)에 있다. 개목사서 벤치쉼터로 가는 길목에서 올라도 15분이면 충분하다. 천등굴서 관음굴로 가는 길(40분)에 펼쳐진 산 아래 풍광도 멋지다.

 

 


[1320호 / 2015년 11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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