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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석남암 비로자나불좌상

기자명 신대현

폐사지 방치됐던 최고 비로자나불…가치 인정받아 ‘국보’로

▲ 최근 국보로 승격된 산청 석남암 비로자나불좌상. 가장 오래된 시기의 지권인 불상으로 그 가치가 크지만 오랜세월 폐사지에 방치돼 있었다.

오늘날 드넓은 터에 기와조각 뒹굴고 주춧돌만 남았어도 옛날에는 굴지의 사찰이었던 곳이 한둘이 아니다. 백제와 신라의 최대 사찰이었던 미륵사지와 황룡사지는 말할 것도 없고, 통일신라시대 선종 사찰의 대표 격이었던 양양 선림원지와 진전사지, 고려시대 최고의 왕사들이 머물렀던 양주 회암사지 등이 그런 곳들이다. 비록 그 옛날 화려했던 전각은 다 사라지고 역사기록 마저 변변히 전하지 않아도, 절터에 남은 불상이나 탑을 보면 옛날의 성관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청 석남암도 그런 고찰 중 하나다.

766년 조성된 통일신라 불상
명확한 연대로 양식 구분 기준
1990년 보물 지정 후 국보 승격

대좌 중대석 봉안된 사리호서
발원자·발원문 등 기록 확인

기존 저평가 원인된 작은 손은
지권인 시작된 초기 시대상 반영
전체적인 조화 염두에 둔 기법과
유연한 아름다움 뒤늦게 인정돼

지리산 중턱 해발 약 900m 되는 자리에 그다지 넓지는 않지만 세월의 이끼가 가득 묻어나는 오래된 절터가 있다. 근처에 지리산 동쪽 자락의 장당골·내원골 같은 수려한 계곡이 펼쳐져 있다. 나중에 이 절터의 이름이 ‘석남암수(石南巖藪, 藪는 寺와 같은 의미)’, 곧 석남암사임을 알게 되었는데, 예전에는 ‘보선암’ 터로 불렀다고도 한다. 비록 절터만 남았지만 명산에는 늘 명찰이 있듯이 이 곳 역시 통일신라 이전에 창건된 역사 오랜 대찰이 있었다. 창건이후 오랫동안 법등을 이어갔을 텐데, 아쉽게도 조선시대 무렵 언젠가 폐사된 이래로 지금껏 빈터로 내려왔다. 절터의 커다란 절벽 근처에 고불(古佛) 하나가 있었는데 격에 맞는 예불이 이루어지기는커녕 야외에서 비바람만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 1959년 이곳서 30리 쯤 되는 곳에 지금의 내원사(內院寺)가 창건되었다. 신라 후기의 고승 무염(無染, 801∼888) 국사가 지리산 기슭에 덕산사(德山寺)를 창건했는데 17세기 초반에 불타 없어졌다가 내원사가 중창되면서 그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석남암 절터의 고불은 60여 년 전 개인이 집으로 반출했다가 석남사가 창건되면서 제대로 된 관리와 예불을 위해 내원사로 옮겨지게 되었다. 처음 반출 될 때 불상과 떨어져 절터에 남겨졌던 대좌와 광배도 근래 모두 이운해 지금은 불상과 광배, 대좌가 온전하게 내원사에 잘 봉안되고 있다. 이 고불이 바로 얼마 전 국보로 지정된 비로자나불상이다.

▲ 비로자나불좌상의 수인.

‘비로자나’라는 말은 ‘태양’이라는 뜻의 범어 ‘vairocana’를 발음 나는 대로 적은 것이다. 경전에는 지혜의 광명으로 모든 세계를 두루 살핀다는 광명변조(光明遍照), 언제 어디서든 모든 중생으로부터 멀어지지 않는다는 변일체처(遍一切處), 허공과 같이 드넓은 세계에 거처하며 그 공덕과 지혜가 청정하다는 광박엄정(廣博嚴淨) 등의 말로 비로자나불을 묘사했다. 비로자나불은 석가불의 진신(眞身)이지만 그렇다고 본래 육신이 있었던 존재가 아니라 불법의 이상이 형상화 된 것이다. 대승 경전인 ‘화엄경’에 나오는 법신관(法身觀) 개념을 바탕으로 해서 이를 시각적으로 나타낸 것인데, 법신관이란 사람들이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법(法)의 진리(眞理)를 부처님의 몸으로 표현한다는 관념이다. 따라서 비로자나불상은 처음 나올 때부터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 않았고 시대에 따라 다소 변화되었다. 지금은 비로자나불상의 고유한 손 모습으로 여기는 지권인(智拳印)의 수인(手印, mudra)도 ‘화엄경’을 기본으로 해서 후대에 밀교계 경전인 ‘금강정경’의 이론이 더해져 나왔다고 한다. 중국도 6세기 이후에야 비로자나불상이 지권인을 한 모습으로 정착되었다.

▲ 비로자나불좌상의 대좌.

우리나라에서 지권인 비로자나불상은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걸쳐 꽤 유행해 지금 40점 가까운 작품이 전한다. 그 중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이 바로 766년에 만든 석남암 비로자나불상이다. 연대가 확실해서 통일신라 불상의 시대 양식을 구분하는 기준작이 된다는 점이 높이 평가되어 최근 국보로 승격까지 되었다. 이렇게 제작연대가 확실한 것은, 불상 자체에 명문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신 이 불상의 대좌 중대석에서 나온 사리호(사리를 담은 단지)에 새겨진 글자들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이 글에는 한자의 음훈(音訓, 발음과 새김)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던 신라만의 고유한 표기방식인 이두(吏讀)가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난해한 문장도 있어 아직 완벽하게 이해되지 않지만, 그래도 몇 가지 확실하고도 의미 있는 사실을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 불상의 대좌 중대석에서 발견된 영태 2년명의 납석제 사리호.

우선 766년에 해당하는 ‘영태(永泰) 2년’이라는 중국 당나라 연호가 있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 비로자나불상의 시원이 적어도 8세기 이전임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이 불상에 앞서서 지권인 비로자나불상이 만들어졌을 가능성은 있지만, 여하튼 현재 전하는 작품 가운데 시기가 가장 앞선다는 점에서 작품으로서의 가치가 높다. 또 이 불상 봉안을 발원한 인연에 대해, 법승(法勝)과 법연(法緣) 두 스님이 ‘두온(豆溫)’을 천도하기 위해(爲豆溫哀郞…靈神)’라고 적었다. 두온이라는 이름 뒤에 ‘애랑(哀郞)’이라는 말이 붙은 점으로 볼 때 그를 화랑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어서 발원자는 ‘이 불상을 보는 사람일랑 부디 불상에 엎드려 절하며 수희(若見內人那 向頂禮爲那 遙聞內那 隨喜)’하고, 이로써 ‘세상 곳곳의 일체중생이 모두 삼악도의 업장을 바람에 날리듯 소멸하기를(吹風所方處 一切衆生那 一切皆三惡道業滅)’ 기원했다. 단순히 화랑 애온 한 사람만의 천도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업장이 녹아 없어지기를 바랐으니 그 뜻이 참 고맙고 갸륵하게 느껴진다. 그리고는 ‘이 비로자나불로 인해 모두들 등각하여 극락에 가기를 서원하노라(自毗盧遮那 是等覺去世爲誓)’고 끝을 맺었다.

이 글에는 또 불상을 봉안한 곳이 석남암의 관음암(觀音巖)이라고 되어 있어 절 이름과 지명을 알 수 있다. 석남암 비로자나불상처럼 봉안 시기, 봉안 목적, 봉안 장소 등을 다 함께 알 수 있는 작품은 생각만큼 많이 전하지 않는다. 또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을 함께 봉안했다고 나온 점도 흥미롭다. 8세기와 9세기에 걸쳐 탑에 법사리(法舍利)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봉안한 예는 많지만, 이렇게 불상 대좌에 넣은 경우는 이것이 첫 예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연구해 본다면 당시의 사리신앙 경향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 밖에 눈여겨 볼 부분은 비로자나불의 명칭이다. 미술사학계에서는 지금 대부분 ‘毘盧舍那’로 쓰고 ‘비로자나’로 발음하지만 통일된 용어는 아니다. 처음 경전을 번역할 때 범어 vairocana를 한자음으로 표현하면서 비로사나·비로차나·비로절나(鞞嚧折那)·폐로자나(吠嚧遮那) 등 번역자마다 서로 다르게 써왔다. 그런데 이 사리호에는 ‘毗盧遮那’로 나오니, 비로자나불 명칭 표기와 관련해서 음미해 볼만한 대목인 것 같다.

통일신라 불상의 걸작들은 나름의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예를 들어 석굴암 불상에서 감도는 내면의 그윽한 깊이와 건실함, 감산사 아미타불상 및 미륵보살상을 장엄하는 섬세하고 화려함, 장항리사지 불입상의 얼굴에서 풍기는 근엄함 등이 그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요소로 다른 불상들을 비교하는 기준으로 삼을 필요는 없다. 각 불상만의 고유한 개성과 특징을 보려는 노력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동안 이 불상은 상대적으로 저평가되어 왔다. 그 중에서도 특히 수인이 약점으로 지적되어 왔다. 지권인을 지은 두 손의 모습이 뚜렷하지 못하고 섬세함이 부족하며 신체 비례에 비해 지나치게 작다는 것이 비판의 핵심이었다. 손에 대한 묘사는 맞지만, 그렇다면 그 원인이 무엇 때문인지 알아야 올바른 평가가 된다. 이 불상은 신라에 지권인을 한 비로자나불상이 소개된 초기에 조성되었다. 다시 말해서 지권인이라는 모양이 신라 사람들에게 아직 낯설었고 때문에 신라의 조각가들은 이것을 어떻게 표현할지 무척 고심했을 것 같다. 이 작품의 수인을 보면 어떻게 해야 지권인의 시각적 효과가 잘 살아날지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했던 조각가들의 고민을 읽을 수 있다. 지권인을 이렇게 자그맣고 비교적 뚜렷하지 못하게 한 점도 그 때문 아닐까? 그렇다면 이런 시대적 상황이 반영된 작품으로서 그 가치가 오히려 더욱 뚜렷해진다고 할 수 있다. 이 석남암 불상을 앞서 든 여러 풍조들과는 다른 새로운 기법이 처음 선보인 작품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후 800년의 경주 불국사, 859년의 장흥 보림사, 865년의 철원 도피안사 등 점차 지권인이 훨씬 크고 강조된 비로자나불상이 잇달아 나타났다. 석남암 상에서 보이는 고심과 실험이 바탕이 되어 우리만의 지권인이 정립되고 완성된 것이다.

또 수인 외에 전체적 작풍을 보더라도 석남암 비로자나불상에는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 그리고 신체의 어느 한 부분이 강조되기보다는 전체적인 조화를 염두에 둔 기법 등이 눈에 들어온다. 이 작품에 들어와서 새롭게 완성된 작풍(作風)으로 보인다. 작품성을 논할 때 다른 작품과의 비교가 지나치면 이런 개별 작풍이 묻힐 수도 있다. 손의 모습만 갖고 이를 작품 전체에 확대해서 말한 것은 좀 문제였던 것 같다.  ‘다름’은 작품의 우열을 가리는 기준으로 삼기에는 그렇게 정확한 잣대라고 볼 수 없다.

이 불상은 처음 1980년 경상남도유형문화재 76호로 지정되었다가 1990년 보물 1021호로, 그리고 최근 다시 국보로 승격 지정되었다. 이렇게 유형문화재에서 보물로 되었다가 마침내 국보로까지 승격되는 경우는 2011년 완주 화암사 극락전 이후 4년 만이다. 그만큼 이 불상의 가치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커져왔다고 볼 수 있다. 수인에 대한 선입견을 씻어내자 이 불상에 보이는 섬세함과 유연함, 풍부한 양감 등이 드러나 그 아름다움을 새삼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통일신라의 우수한 다른 불상들에 비견될 만한 새로운 경향의 작풍을 확인하게 되었고, 우리는 새로운 국보 불상 하나를 얻게 되었다.

신대현 사찰문화연구원  연구위원  buam0915@hanmail.net

[1320호 / 2015년 11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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