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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죠세츠, ‘표점도’

기자명 조정육

누군가 허망타 여길 시간을 통과해 누에고치는 나비가 된다

▲ 죠세츠(如拙), ‘표점도(瓢鮎圖)’(부분), 종이에 수묵담채, 무로마찌(室町)시대, 111.5×75.8cm, 교토국립박물관.

“옛사람들은 이르기를, 일대사인연을 밝게 알지 못하면 어버이를 잃은 듯이 하라고 했다. 석가노인네도 일대사인연을 위해 세상에 출현하셨다. 그렇다면 말해보라. 어찌하여야 일대사인연을 밝힐 수 있겠는가?”

에이사이 스님, 임제종 수립해
무사·대중들로부터 환영 받아
선종 보급되고 200년 지난 뒤
죠세츠가 수묵화 활짝 꽃피워

에이사이(榮西,1141~1215) 스님의 목소리는 굵고 우렁찼다. 왜소한 체구에서 나오는 소리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다부졌다. 좌중을 둘러보는 눈빛에서는 푸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스승의 강한 기운에 압도된 것일까.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윽고 눈빛을 거둔 스님의 법문이 이어졌다.

“이것은 사람이 크게 깨달아 직접 한 번 이르러 스스로 입을 열고 자신의 말을 해야만 한다. 만약 깨닫지 못했다면, 설령 5048권의 경전을 자유자재로 설한 것이, 마치 가득한 물을 흘리지 않듯 한마디도 빠뜨리지 않는다 해도 다만 법신(法身)만 헤아리는 일일 뿐, 일대사와는 한참 멀고도 멀다.”

에이사이 스님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좌중을 훑어보았다. 이 즈음에서 한 명 정도는 반짝거리는 눈빛을 가진 사람이 나와야 하는데 아니었다. 모두들 아직은 자신의 설법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그는 좀 더 차분한 목소리로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시험 삼아 옛 사람들이 깨달은 바를 들려줄 테니, 스스로 생각해보라. 나산(羅山:중국 오대의 승려)화상이 하루는 석상(石霜) 스님께 ‘일어나고 사라짐이 그치지 않을 때는 어찌합니까?’라고 물으니, 석상화상은 ‘그저 싸늘한 재, 말라빠진 나무가 되어야 한다’고 대답해 주었다. 그러나 나산은 깨닫지 못해 암두(巖頭) 스님을 찾아가서 똑같이 질문했다. 이에 암두가 소리치며, ‘아니, 누가 일어나고 사라졌느냐?’라고 말했다. 그 말에 나산은 문득 크게 깨달았다. 자, 말해보라. 무엇을 깨달았느냐?”

에이사이 스님은 14세에 엔랴쿠지 계단에서 수계한 후 송나라에 두 차례나 다녀왔다. 처음에는 천태학을 배우기 위해 입송했고 두 번째는 인도에 가기 위해 입송했다. 그러나 당시 인도의 관문인 서역지역이 원나라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인도행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천태산 만년사에서 임제종(臨濟宗) 황룡파(黃龍派)의 허암회창(虛庵懷敞)선사를 만나 임제선을 전수 받았다. 그는 송나라에서 6년 동안 머물다 귀국하여 임제종 교단을 수립했다. 그의 선(禪)포교는 무사와 많은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이에 히에이잔을 비롯한 기존 종파의 방해를 받아 한때는 선종 금지 명령을 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카마쿠라막부의 존경과 후원을 받으며 도다이지(東大寺)를 재건하고 쥬후쿠지(壽福寺)와 겐닌지(建仁寺)를 세우는 등 불법홍포와 선의 전파에 주력했다. 그는 석가신앙의 입장에서 율법을 강조하고 좌선과 밀교도 겸한 회통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권력층과도 교분이 두터워 72세에는 막부의 도움으로 권승정(權僧正)의 자리에도 올랐다. 또한 ‘홍선호국론(興禪護國論)’을 지어 호국불교를 강조하는가하면 ‘끽다양생기(喫茶養生記)’를 지어 차 보급에도 힘썼다.

허름한 옷을 걸친 어부가 냇가에 서 있다. 어부는 두 손을 뻗어 호리병을 들고 몸을 약간 구부린 채 맨발로 서 있다. 그의 신경은 온통 메기에 쏠려있다.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것을 봐서 그가 얼마나 메기에 열중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어부 옆으로 뻣뻣한 대나무 가지가 뻗어있고 멀리 뒤쪽에 담묵으로 그린 산이 흐릿하게 펼쳐져있다. 이 그림은 지금까지 우리가 봤던 채색화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형식의 수묵화로 제목은 ‘표점도(瓢鮎圖)’이다. ‘호리병으로 메기를 잡다’는 뜻으로 해석되는데 서문에는 호로병(葫蘆甁)이란 한자 대신 표주박(瓢)으로 표기했다. 둘 다 같은 의미지만 불교적인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목적인 듯하다. 호리병은 호로병이라고도 부르는데 호로병박의 속을 긁어내고 만들어 술이나 단약을 담아가지고 다닐 때 사용한다. 호리병은 불교보다는 도교적인 색채가 진한 단어다. 도교에서 호리병은 세 가지 기능을 가진다. 호로병 속에는 신선이 사는 별천지가 들어있고 육체에서 분리된 혼이 담겨 있으며 수명을 늘릴 수 있는 선약이 들어있다. 반면 불교에서의 호리병은 술 대신 정수(淨水)를 담고 있어 보병(寶甁) 또는 정병(淨甁)이라 부른다. 정병의 정수는 중생들의 고통과 목마름을 해소해 주기 때문에 감로수(甘露水)라고도 한다. 정병은 관세음보살이 지닌 지물인데 미륵보살이나 제석천, 범천(梵天) 등도 들고 있다. 불교적 색채가 강한 ‘표점도’에서 표주박이란 용어 대신 정병이나 감로병을 쓰지 않은 이유는 주인공이 보살이 아니라 어부이기 때문일 것이다.

‘표점도’는 죠세츠(如拙)가 그린 작품이다. 그에 대해서는 응영(應永) 연간(1393~1427)에 활동한 소코쿠지(相國寺)의 화승(畵僧)이라는 사실 외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당시 권력의 핵심인 아시카가 요시모치(足利義持,1386~1428)장군의 명에 의해 ‘표점도’를 그렸다. 아시카가 요시모치는 9세에 막부의 쇼군(將軍)이 되었는데 문화예술 진흥에도 상당히 관심이 많았다. 그 자신이 수묵화에 일가견이 있을 정도로 실력도 뛰어났다. ‘표점도’의 서문에는 ‘대상공 요시모치가 죠세츠에게 새로운 양식을 좌우소병에 그리게 했다(大相公俾僧如拙畵新樣於座右小屛之間)’라고 되어 있다.

새로운 양식이란 남송(南宋)에서 유행하던 마하파(馬夏派)양식과 양해(梁楷)의 감필법(減筆法)을 말한다. 마원(馬遠)과 하규(夏珪)에 의해 수립된 마하파양식은 변각구도(邊角構圖)와 넓은 화면이 특징이다. ‘표점도’에서 그 영향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미국의 동양미술사학자 존 카터 코벨(1910~1996)은 이와는 전혀 다른 견해를 제시했다. 그녀는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에서 죠세츠를 조선에서 건너간 조선인 화가라고 주장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유교를 숭상한 조선에서는 불교배척운동이 일어났다. 그때 많은 화가들이 일본으로 망명했다는데 죠세츠도 그 중 한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두고 그녀는 ‘한국미술사에서 일어난 두뇌 유출’이라고 표현했다. 만약 죠세츠가 조선에서 망명한 작가라면 ‘표점도’에 나타난 새로운 양식은 남송이 아니라 조선에서 유입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경우든 죠세츠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양식을 수립하여 후대에 수묵산수화의 시조로 추앙받는다.

아시카가 요시모치는 죠세츠가 그린 ‘표점도’가 매우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그는 고승들이 모인 시회를 베풀고 31명의 선승에게 죠세츠의 ‘표점도’ 뒤에 시제를 쓰게 했다. 이런 그림을 시화축(詩畵軸)이라고 한다. 시화축은 무로마치(室町,1336~1573)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그림형식으로 상단에 선승(禪僧)들의 시가, 하단에 그림이 들어간 수묵화다. ‘표점도’ 역시 화면이 시와 그림으로 반반씩 구성되어 있다. 시화축은 귀족세력을 누르고 문화의 담당자로 부상한 무사들의 지적인 수준을 반영한다. ‘표점도’는 원래 묘신지(妙心寺) 타이조인(退藏院)에 소장된 작품인데 현재는 보관상의 어려움으로 교토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절에는 복사본이 걸려있다.

만약 죠세츠가 조선에서 망명한 화가라면 ‘표점도’는 조선회화의 어떤 양식에서 영감을 얻었을까. 조선 초기에 유행한 계회도(契會圖)와의 연관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문인관료들의 모임 장면을 그린 계회도는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단에는 모임제목을 쓰고 중단에는 모임 장면이, 하단에는 참석한 구성원의 이름과 관직명 등 좌목(座目)이 들어간다. ‘표점도’는 계회도가 아니라 시회를 그린 만큼 제목과 좌목이 생략되는 등 계회도와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구도와 형식은 계회도에서 빌려왔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죠세츠(如拙)의 이름은 ‘치졸한 대로’라는 뜻이다. 그의 이름에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하게 살기를 염원한 의지가 담겨 있다. 치졸(拙)은 서투르거나 재주가 부족할 때 쓰는 단어다. 그러나 결코 폄하하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최고의 재주를 칭찬하기 위한 역설적 표현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대교약졸(大巧若拙) 대변약눌(大辯若訥)’이라 했다. ‘큰 기교는 서투른 듯하고 큰 웅변은 더듬는 듯하다’는 뜻이다. 뛰어난 재능은 재능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러워야 진짜 재능이다. 인공적인 미나 작위적인 능력을 훌쩍 뛰어 넘는 재능이다. 잘하려는 욕심을 완전히 잊고 무심한 경지에서 나오는 재능이 졸(拙)이고 눌(訥)이다. 일본 사람들이 이름 없는 조선의 막사발을 보고 찬탄을 아끼지 않는 이유도 그 안에서 무심의 경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죠세츠는 그런 일본인들의 취향을 알아챈 걸까. 이름마저도 예사롭지 않다.

다시 그림을 보자. 아무리 봐도 호리병에 비해 메기가 너무 크다. 메기는 민물고기 중에서도 머리와 입이 큰 물고기다. 과연 어부는 저 입 큰 메기를 좁은 호리병 속에 넣을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불가능한 것을 들이밀며 해답을 요구하는 것. 이것이 선의 공안이다. 깨달음은 호리병에 메기를 집어넣는 것만큼 어렵다. 공안은 사량분별이나 지식으로는 해답을 얻을 수 없다. 언어가 끊어지고 문자가 떨어져나가는 그 지점에서만 찾을 수 있다. 이것이 선종에서 강조한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의 핵심이다.

에이사이 스님이 임제선의 시조가 된 것처럼 죠세츠 또한 수묵화의 시조가 되었다. 두 사람 모두 무사계급의 후원이 바탕이 되었다. ‘표점도’는 무사들이 선종에 얼마나 심취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에이사이가 선종을 보급한 지 200여 년이 지나서 죠세츠의 수묵화가 등장했다. 어느 분야든 사상과 종교가 예술을 통해 화려하게 꽃피우기 위해서는 이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지루하지만 꼭 필요한 시간. 그 시간은 허망하고 부질없는 것이 아니라 공부하고 물드는 시간이다. 누에고치가 나비가 되기 위해 인고의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그런데 어떻게 해야 메기를 호리병에 넣을 수 있을까. 나의 스승이 석상 스님처럼 부족한 사람일까. 암두 스님 같은 눈 밝은 선지식을 찾아가야 하나. 해답을 찾지 못해 한참 고민하고 있는데 에이사이 스님의 죽비소리가 들린다.

“저 옛사람들은 이를 생각하며 여기에 있으면서 하루 내내 빈틈없이 공부하고 오로지 깨달음을 준칙으로 삼으며 한 가지 의문을 내어 이 일을 가려냈다. 존숙(尊宿)들은 병에 따라 약을 처방하시니, 병이 없어지고 약을 쓰지 않아도 온몸이 가볍고 상쾌한 것이 그 증거이니라. 그런데도 후학들은 그 근본을 통달하지도 못했으면서 억지로 우열을 가리며 말하기를, ‘석상의 말은 죽은 것이요, 암두의 말은 산 것이라’ 하니, 이런 견해는 짚신을 사서 처음 행각에 나서는 것과 같다. 저울의 갈고리를 잘 알지 못하고 저울 받침대의 눈금만 잘못 인식하고 있으니, 이른바 사자가 사람을 물고 미친개가 똥덩어리를 쫓는 형국이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320호 / 2015년 11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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