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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12연기-⑦촉(觸)

보고 듣는 것이 본래 있다고 믿는 건 착각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귀로 듣는 소리의 실체는
귀와 소리가 따로 존재하다
만나서 들리는 게 아니라
진동이라는 조건이 고막을
울리면서 생성되는 것일뿐

신체와 정신이 분화되고 6개의 감각기관이나 감각작용이 발생했다면, 이제 그 감각작용에 의해 ‘주체’가 ‘대상’을 발견하고 포착하며 그 판단의 진위를 가리는 인식론의 영역으로 들어간다고 말할 법하다. 이것이 서구에서 참과 거짓에 대해 검토하는 기본적인 틀이다. 그러나 12연기에선 그와 아주 다른 경로를 따라간다. 6처를 조건으로 하여 접촉이 발생하고, 그 접촉을 조건으로 감수 작용이 발생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접촉이란 무엇인가? 만남이다. 무엇의 만남인가? 이렇게 물음을 던지는 순간, 우리는 다시 잘못된 길을 가게 된다. 그 물음의 방식으로 인해, 무엇과 무엇이, 가령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이, 귀와 소리가, 코와 냄새가 만난다고 대답하게 되기 때문이다. 왜 잘못된 것인가? 비록 이미 6처의 존재를 조건으로 하여 접촉이 발생한다고 해도, 만남 이전에 귀나 코, 소리나 냄새가 별개로 있고, 그것이 만나고 접촉한다고 보게 되기 때문이다. 왜 잘못된 것인가?

이렇게 보면,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조용한 방안에서 우리의 귀가 아무 소리도 못 듣고 있는 것은 아무 소리가 없기 때문인 게 된다. 정말 그럴까? 소리가 있다는 건 대체 무얼까? 소리란 공기 중의 진동과 내 귀가 만나서 고막이 울림으로써 우리가 포착하게 되는 자극이다. 그런데 진동이란 사실 없을 때가 없다고 해야 할 정도로 어디에나 있다. 대기 중에는 수많은 진동들로 가득하다. 원자나 소립자도 고유한 진동을 갖고 있고, 사물도 나름의 진동을 갖고 있다. 그 진동수가 초당 20번에서 2만번 정도의 범위(20Hz~20KHz)에 있을 때 그 진동을 우리는 들을 수 있다. 그 범위를 넘는 주파수의 진동은 있어도 들리지 않는다. 조용한 빈 방 안에도 수많은 주파수의 진동들이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그래서 FM 라디오를 켜면 ‘없던’ 소리가 ‘있게’ 된다. 이미 있던 100MHz 전후의 주파수의 진동이 라디오 스피커를 통해 가청주파수의 진동으로 바뀌어 소리가 들리게 된 것이다. 그 방안에서 핸드폰으로 전화를 한다면, 이는 1GHz 전후의 주파수의 진동이 가청주파수로 바뀌어 들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말해보라,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빈 방에는 소리가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귀가 있고, 소리가 있고, 그것이 만나 들리는 게 아니다. 어떤 주파수의 진동과 귀가 만나는 사건이 있는 것이고, 그 진동이 신경세포를 자극하여 감지할 수 있는 역치를 넘을 때, 우리가 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런데도 자꾸 여기 따로 있는 귀가 저기 따로 있는 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문법의 환상’ 때문이다. 가령 ‘비가 온다’는 말은 ‘비’라는 주어와 ‘오다’라는 동사가 결합되어 만들어진다. ‘오다’ 대신 ‘안 오다’를 쓸 수도 있다. 즉 날씨를 보며 ‘비가 온다’고 하기도 하고 ‘비가 안 온다’고 하기도 한다. 이런 문법으로 인해 ‘온다’ ‘안 온다’와 무관하게 ‘비’라는 게 어딘가 따로 있는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비가 때에 따라 오기도 하고 안 오기도 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비가 안 오는 날, 오지 않는 비는 하늘 어딘가에 따로 있는 것일까? 동화 속에 빠져 있는 아이가 아니라면 그렇지 않음을 안다. 오지 않는 비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온다’와 ‘비’는 하나의 동일한 사건을 표현한다. 그걸 주어 따로, 동사 따로 독립시켜 사용하는 문법 때문에, 비가 별개의 실체로 따로 존재하는 듯한 환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귀가 소리를 듣는 것도 비슷하다. 진동은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그걸 두고 ‘소리가 난다’거나 ‘소리가 있다’고 할 순 없다. 소리가 난다는 것은 귀와 어떤 진동이 만나는 사건이 발생했음을 표시할 뿐이다. 그런 사건이 없다면, 진동은 소리가 아니며 귀는 소리를 듣는 기관이 되지 못한다. 내 손이 ‘있다’고 해도 소리를 듣는 기관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만남이 소리가 될 수 있으려면 진동을 포착하는 지각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게 없으면 진동은 만나지 못한 채 지나쳐간다. 그렇기에 촉은 6처라는 지각능력을 조건으로 발생한다. 그런데 그 지각능력은 진동과의 접촉을 통해서, 그걸 포착하는 한에서 보거나 듣거나 한다. 소리라는 대상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접촉이라는 사건이 있고, 안과 밖을 식별하는 분별작용이 그 하나의 사건을 ‘듣다’와 ‘들리다(소리 나다)’로, 듣는 ‘귀’와 들리는 ‘소리’로 구별하는 것이다. “내가 그 소리를 들었어. 그건 동물의 울음소리였어.” 이런 분별작용 이후에, 들은 자와 들린 소리가 독자적인 것으로 존재하는 듯한 환상이 만들어진다.

보고 듣는 것, 냄새나 맛으로 포착되는 것, ‘인식’이나 ‘지각’이라는 유형의 만남만이 ‘만남’은 아니다. 변용을 야기하는 접촉은 모두 만남이다. 마크 로스코의 그림처럼 무엇을 그린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뭔가 알 수 없는 슬픔을 느끼게 하는 그림을 보는 것도,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의 앨범 ‘러블리스’처럼 소음의 흐름에 불과하여 뭘 하려는 건지 알 수 없는 음악을 듣는 것도 보는 이의 몸과 마음에 어떤 변용을 야기한다. 그런 변용은 종종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뭔가 휘말려들게 만드는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선승들처럼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정신과 신체에 강력한 충격을 가하는 변용을 탁월하게 이용한 이들도 없다. 고함을 질러 학인을 일깨운 건 임제만이 아니었고, 몽둥이를 휘두르거나 뺨따귀를 때리며 철벽 앞에 학인을 몰아세운 건 덕산만이 아니었다. 무슨 말인지, 왜 그러는지 모르기 때문에 역으로 강력한 의정의 힘을 만들어내는 그 이해 불가능한 ‘접촉’이 종종 학인들을 최고의 깨달음으로 몰고 간다는 것이 선어록들의 일관된 증언 아닌가.

사실 ‘촉’이라고 명명된 만남은 인지적인 지각이나 앎보다 더 근본적인 층위에서 발생한다. ‘생명’ 내지 ‘생존’이라고 불리는 과정과 결부된 것이 그것이다. 가령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들,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이 그렇다. 내가 먹고 있는 게 물인지 술인지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구별하는 것, 그런 게 주로 인식론에 관심 있는 철학자들의 논란거리다. 그러나 신체의 생존이란 관점에서 보면, 이게 물인지 술인지를 ‘명료하고 뚜렷하게’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마셨을 때 몸에 어떤 종류의 변용이 발생하는가 하는 것이다. 같은 물과의 접촉이라도 갈증에 목말라 하는 이에겐 더없이 좋은 만남이 되겠지만, 원하는 걸 알아내려고 윽박지르는 수사관이 먹이는 물은 더없이 끔찍한 만남이 될 것이다. 같은 술과의 접촉이라도 술에 절어 간이 망가져 버린 이에겐 아주 나쁜 만남이 되겠지만, 수줍고 우울한 이에겐 술과의 만남이 기분을 업(up)시켜주고 활달하게 해주는 좋은 만남이 될 것이다. 똑같은 술이 동일한 사람과 접촉할 때에도, 그 사람의 신체 상태나 ‘정신적인’ 조건에 따라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 근본적인 층위의 만남은 접촉 이전에, 만남의 구체적인 조건과 상관없이 저것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으론 부족함을 보여준다. 만남이 저것이 약인지 독인지를 결정한다. 만남이 만난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320호 / 2015년 11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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