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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문명대 한국미술사연구소장

“불교미술사 집대성 이뤄가는 지금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죠”

▲ 문명대 소장은 “일 가운데 재미를 찾으면 목표가 생기고,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삶은 항상 행복하다”고 조언했다.

누구도 걷지 않았던 길을 개척하는 사람들이 있다. 새로운 세상을 향한 첫 걸음은 누구에게나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 그럼에도 그 길에 나서는 것은 희망과 꿈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변화하고 발전해왔다.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고 그 뒤를 따르는 이유다.

사학자 꿈꾸며 역사학과 입학
불법에 반해 불교학생회 조직
전공까지 ‘불교미술사’로 정해

“불교는 정신·불교미술은 표현”
반고사 찾다 선사암각화 발견
불교미술·해외발굴 활로 개척

1700여년 전 한반도에 전래된 불교가 탄압의 역사에도 끊이지 않고 이어올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선지식과 선구자들의 도전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한 이들의 노고는 한국불교가 과거에 안주하지 않고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는 토대가 됐다. 마치 멈추지 않고 구르는 법의 수레바퀴와 같이 선구자들의 발걸음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문명대(75·혜사) 동국대 명예교수 역시 법의 수레바퀴와도 같은 존재다. 한국불교의 전승과 발전을 위한 헌신, 그것은 문 교수가 일생동안 굴려온 법륜이다. 20대 청년시절 불교미술에 입문한 그는 불상 및 불화 연구, 사지 발굴 등 한국의 불교미술사는 물론 간다라 실크로드 학술조사 등을 통해 해외발굴조사의 활로를 개척한 주인공이다. 칠순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한국미술사연구소 소장으로 문화재 조사활동과 국보·보물 불화 모사, 불상 실측 등 왕성한 연구활동을 펼치고 있다.

세간은 문명대 교수를 불교미술 분야의 권위자로, 평생 한 길을 걸어온 꼿꼿한 학자로 평가한다. 하지만 지인들은 여기에 ‘지극한 신심(信心)’ 하나를 덧붙였다. “불교는 정신이고, 불교미술은 그 표현”이라는 평소 문 교수의 말처럼 불교미술의 예술적 가치뿐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의미까지 찾아내기 위해 쉼 없이 정진해 왔다.

불교문화재연구소장 정안 스님은 “오늘날 불교미술이 학문의 영역으로 자리를 잡기까지는 문명대 교수의 역할이 지대했다”고 말했다. 특히 “국내외 발굴조사에서의 놀라운 성과는 불보살님의 가피가 없다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굳은 신심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실천해온 문 교수에게 불보살님이 감응했기에 발굴성과로 나타난 것”이라고 강조했다. 권탄준 금강대 명예교수도 “지독한 학문적 탐구심에 금강 같은 신심이 더해진 분이 바로 문명대 교수”라며 존경을 표했다. 학문적으로 불교를 접근하다보면 신심이 부족할 수 있는데 문명대 교수만큼은 예외라는 것이다. “지(知)와 행(行)은 물론 말씀 하나까지도 언제나 한결같은 분이기에 학자로서, 불자로서 존경한다”고 했다.

어렸을 적 문 교수의 꿈은 역사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집안 어른들은 공학도가 돼 가업을 잇기를 바랐다. 꿈과 현실 사이의 갈등 또한 적지 않았을 터. 그의 선택은 꿈이었다. 집안의 극심한 반대에도 그는 경북대 역사학과를 택했다. 부처님과의 인연도 그렇게 시작됐다. 사학을 공부하다보니 절을 찾는 일이 잦았고, 자연스레 부처님 법도 몸과 마음으로 익히게 된 것이다.

“그냥 반한 겁니다. 부처님 말씀 하나하나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군요. 불교에 심취해 공부를 하다보니 나만 갖기에는 너무 아까운 거예요. 그래서 도반들을 모아 함께 공부하고 수행하는 모임을 결성했죠. 그게 1962년 창립된 ‘불교대학생회’입니다. 그때는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가 생기기 전이니 아마도 국내 첫 대학생 불자모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변변한 불교관련 서적도 없었던 때라 일본책을 구해 직접 번역하고 프린트한 것으로 함께 공부하고 신행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고생스럽게 모임을 가져온 만큼 당시 도반들과는 지금도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습니다.”

불교와의 인연은 그의 공부 방향에도 영향을 미쳤다. ‘불교사’ 연구가 목표가 된 것이다. 더욱이 군대를 제대하고 경북대박물관에서 일하게 되면서 그의 관심은 ‘불교미술사’로 더욱 구체화됐다. 당시 그에게 맡겨진 일은 박물관 소장품을 카드에 기록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유물을 실측하고 그 특성을 조사해 일일이 수기하는 일은 불교미술 연구와 발굴조사 분야의 기반을 쌓는 다시없을 기회였다. 여기에 행운까지 찾아왔다. 당대 최고 불교미술사학자인 황수영 동국대 교수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국내 오악(五岳)을 중심으로 진행된 유적조사에 경북대박물관 간사로 참여했다가 황 교수의 눈에 띄어 동국대박물관 연구원으로 발탈됐다. 국내 유일의 불교전문박물관인 동국대박물관에서 불교미술의 대가인 황수영 교수의 지도를 받는다는 것은 그가 발원해온 불교미술사 전문가가 되기에 더없이 좋은 조합이었다.

그의 이름 뒤 ‘최초’라는 대명사가 수식어처럼 따라붙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동국대박물관 연구원으로서 내디딘 첫 걸음은 울산지역 불적조사였다. 울산은 낭지, 원효, 자장 등 신라불교를 대표하는 스님들의 유적이 산재한 성지다. 그 중에서도 원효 스님이 주석하며 ‘초장관문(初章觀文)’,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 등을 편찬했다고 전해지는 반고사(磻高寺)를 찾고자 했다. 그리고 반고사를 찾아 떠난 그 길에서 역사적인 대발견을 하게 된다. 바로 울산 반구대 선사 암각화다.

“당시 내가 보고 있는 유적이 무엇인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탁본을 떠 문헌과 대조해보니 선사시대 유적인 거예요. 29살 나이에 국내 첫 선사시대 암각화를 발견했으니 어찌나 가슴이 두근거리던지…. 그리고 1년 후에 대곡리에서 또 다른 암각화를 찾아냈어요. 단일유적으로는 최대 규모로 세계적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한반도 선사시대 유적 최초 발견’이라는 타이틀은 그를 단숨에 학계의 중심에 서게 했다. 관련 유적에 관한 연구를 진행해 논문을 발표하고 연구보고서까지 내놓았으니 연구방향을 ‘선사미술’로 바꿔도 이상할 게 없어보였다. 그러나 그는 ‘최초’라는 말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오히려 ‘불교미술’을 더욱 단단히 붙잡았다. 원효 스님의 발자취 찾아 나선 길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이니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가 더해진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여전히 황수영 교수의 제자였고 불교미술사를 공부하는 사학도였다. 그리고 1970년 황 교수를 도와 동국대에 세계 ‘최초’의 불교미술학과가 설립되는데 일조했다.

“동국대 불교미술학과는 불화와 단청 등 불교미술 분야의 전문인재를 배출하는 창구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습니다. 현재 조계종을 비롯해 문화재청, 박물관, 대학, 연구소 등에서 불교미술 전문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50여년 간 후학을 지도해온 스승으로서, 부처님을 따르는 불제자로서 해왔던 일 가운데 가장 보람되고 의미 있는 불사라고 생각합니다.”

 
문 교수의 ‘처음’은 국내를 벗어나 해외에서도 이어졌다. 1985년 우리나라 최초로 간다라 실크로드 학술조사에 이어 1989·1991년 중국 실크로드 학술조사를 실시해 ‘세계 최초’로 컬러판 ‘실크로드’를 출판했다. 1993년에는 러시아 연해주 발해유적 조사를 ‘최초’로 실시해 발해 금동불상과 막새기와 등을 찾아내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2004~2005년 실시된 파키스탄 탁실라 발굴에서 그는 다시 한 번 ‘세계 최초 발굴’이라는 타이틀을 얻는다. 당시 문 교수가 이끄는 발굴팀이 탁실라 졸리안 사원지에서 불상과 불두, 동전 등 간다라유물 50여점을 찾아내 세계를 놀라게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꼽으라면 단연 탁실라 졸리안 사원지 발굴입니다. 실크로드와 한국불교문화의 관계성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간다라유적지 발굴은 대단히 매력적인 기회였습니다. 파키스탄으로 떠나며 ‘간다라 불상 딱 하나만 찾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죠. 그만큼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었습니다. 현지 학자들이 추천해준 곳이 있었지만,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새로 발굴지역을 선정했어요. 그리고 바닥을 파내기 시작하는데 손대는 족족 불상이 쏟아져 나오는 겁니다. 우리도 놀랐지만, 잘못된 결정이라고 단언했던 현지인들은 큰 충격을 받은 듯했습니다. 이후 우리 팀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게 됐어요. 현재 안전문제로 재입국이 불가능해 아쉽게도 발굴조사는 미완의 상태입니다.”

파키스탄 탁실라 발굴을 끝으로 그는 40여년 몸담았던 동국대를 떠났다. 정년을 맞이한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정년은 끝이 아닌, 마음속에 간직해 온 꿈을 펼치는 새로운 도전의 기회였다. 1980년 설립한 한국미술사연구소를 확대·개편하고 불교미술에 관한한 세계 최고의 연구기관을 발원했다. 그가 청년 못지않은 열정으로 오늘도 연구소 불을 밝히는 이유다.

“한국불교미술의 시대적 변천에 따른 외형적 특징과 사상적 변화까지 담아내는 ‘한국의 불교회화사 연구’와 간다라미술이 실크로드를 거쳐 우리나라까지 전해진 경로를 문화사적, 미술사적으로 해석하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과제는 지난 50여년간 공부하고 연구해온 것들을 집대성하는 과정입니다. 평생의 서원을 이뤄가는 지금, 이 순간이 나에겐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문 교수는 일 가운데 재미를 찾아보라 했다. 그러면 목표가 생기고,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삶은 항상 행복할 것이라 조언했다. 또 불자다운 삶 살기를 권했다. 매일 잠시라도 시간을 내 기도를 하거나 경전을 보거나 절을 하는 등 정진의 시간을 갖고, 하루 한 번이라도 바라밀을 실천하는 회향의 자리를 갖는 것이다. 삼라만상이 모두 인연과 인과의 법칙에 따른 결과물이기 때문이란다.

부처님께서는 ‘법구경’에서 “쉬지 않으면 마침내 이루어진다. 저 개울물이 흐르고 흘러 마침내 바다로 가듯, 항상 새벽처럼 깨어 있으라.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을 즐기라”고 당부했다. 목표를 향해 항상 깨어 있으면서 부지런히 정진하는 문명대 교수. ‘불교미술’을 화두로 시간을 거슬러 쉼 없이 여행 중인 그이기에 그의 지금은 언제나 ‘푸른 청춘’이다.

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1321호 / 2015년 12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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