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수행의 시작, 보시바라밀

기자명 원빈 스님
  • 세심청심
  • 입력 2015.12.01 12:29
  • 수정 2015.12.01 12:31
  • 댓글 0

부처님과 비구들이 웨란자 마을에서 안거를 지내던 때에 있었던 일이다. 웨란자 바라문은 그가 평소 가지고 있던 의문들을 부처님과의 문답을 통해 통쾌하게 해결하자 뛸 듯이 환희로웠다. 이후 부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재가불자가 되었다. 바라문은 부처님과 비구들을 자신의 마을에 초청하여 안거를 보내기를 원했고, 부처님은 이를 승락하셨다.

승가 보시는 법보시이지만
재가 공양 받는 것도 보시
복전에 씨앗 심을 수 있게
법답게 보시 받는 것은 공덕

부처님께 안거를 요청한다는 것은 머무실 사원, 탁발하실 수 있는 음식, 약과 옷을 공양 올리겠다는 암묵적인 약속이다. 그런데 웨란자 바라문은 정작 부처님이 마을에 도착하셨을 때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경전에서는 마라가 승가의 수행을 방해하기 위해 웨란자 바라문을 어리석게 만들었다고 하는데, 마라의 장난이든 단순히 잊어버린 것이든 상관없이 부처님과 제자들은 곤란한 상황이 되었다.

이미 웨란자 마을에서 결제를 시작했기에 우기 3개월은 꼬박 이곳에서 수행해야 하는데 음식을 구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웨란자 마을에 기근까지 들어서 탁발조차 힘들게 되니 부처님과 비구들의 체력은 빠르게 소진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신심 있는 말장수가 제공하는 거친 말 먹이로 몸을 유지하며 안거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경전 속으로 들어가 보자. 우리가 만약 부처님과 함께 안거를 지내고 있는 비구라고 생각해보자. 웨란자 바라문의 요청에 의해 수많은 안거 요청을 뒤로 하고 이 마을에 도착했는데 3개월간 제대로 된 공양을 하지 못하며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기분이 어떨까? 이러한 역경 속에서 우리 범부들은 아마도 화를 낼 것이다. 웨란자 바라문을 비난할 수도 있고, 어쩌면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한 부처님을 원망하는 마음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인생의 흐름은 엎치락뒤치락한다. 동양의 성인으로 불리는 공자도 자신의 삶 속에서 수많은 역경을 만났고, 부처님 역시 사촌이자 제자인 데바닷다로부터 목숨을 위협받기도 했다. 우리의 사업이 번창하기도 하고, 기울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누구나 인생 그래프를 그려보라고 말하면 오르락내리락 하는 그 그래프가 놀이기구처럼 아찔한 모양이다. 누구나에게 삶은 역경과 순경을 반복해서 선물한다는 것이다. 그럼 이런 상황에서 성인의 반응은 어떻게 다를까?

“훌륭한 이는 집착을 버리고, 덕 있는 이는 바라는 것을 말하지 않으며, 지혜로운 이는 행복과 불행을 만나더라도 기뻐하거나 낙담하지 않는다.”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범부와 성인의 차이는 ‘법구경’ 83번째 게송에 등장한다. 이 게송 속의 인연담에 등장하는 웨란자 마을에서 안거를 지낸 부처님과 비구들은 역시 팔풍에 휘둘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신다. 초청의 의무를 지키지 않은 웨란자 바라문을 비난하기는커녕 그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환희와 희열에 그리고 평화로운 수행의 기간을 끝마쳤으며 오히려 유행을 떠나기 전 웨란자 바라문이 올리는 공양을 받아주기까지 하신다. 생각해보라. 3개월간을 굶주림 속에서 수행하게끔 한 그가 공덕을 쌓을 수 있도록 기쁘게 공양을 받아주다니 이 얼마나 성인다운 모습인가?

금강경의 무주상보시에서 보시는 재보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무착보살은 보시에는 6바라밀이 전부 섭수된다고 말한다. 즉, 금강경의 무주상보시는 무주상 육바라밀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대승불교 수행의 시작은 보시바라밀부터다. 그럼 승가의 경우 어떻게 보시를 행할 수 있는가? 이 보시가 육바라밀인 재보시, 무외시, 법보시를 동시에 의미하기에 승가 역시 무주상보시를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승가의 보시는 법보시다. 또한 재가불자들의 공양을 받아주는 것 역시 보시이다. 받아주지 않으면 재가

▲ 원빈스님
행복명상 지도법사
불자들이 복전에 씨앗을 심을 수 없기에 공덕의 열매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법답게 보시를 받아주는 것, 그리고 인연되는 존재들에 대한 법보시를 실천하는 것이 바로 승가의 보시가 될 것이다. 여기에 웨란자 마을에서 안거를 지낸 부처님과 비구들처럼 행복과 불행을 만나더라도 기뻐하거나 낙담하지 않는 것처럼 팔풍에 휘둘리지 않는 모습이 바로 무주상의 모습이 아닐까?

자신이 경험하는 모든 상이 무상임을 알면 마음이 머무를 곳이 없어지고, 머무르지 않으면 집착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사람은 팔풍에 휘둘릴 깃발자체가 꽂혀 있지 않으니 어찌 일비일희 할 것이 있겠는가?

[1321호 / 2015년 12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