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12연기-⑧ 수(受)
43. 12연기-⑧ 수(受)
  • 이진경 교수
  • 승인 2015.12.01 15: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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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정신 능력의 증감 야기하는 감수작용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만남의 양상이 만나는 것들을 규정한다. 만남이란 조건이 만나는 것들의 발생을 결정한다. 그렇기에 눈이나 귀도 어떻게 만남 속에 들어가는가에 따라 다른 ‘기관’이 된다. 예컨대 사람의 얼굴과 몸을 고기 덩어리로 돌려놓는 그림을 그렸던 프란시스 베이컨은 자신의 그림을 보면서 눈으로 피 냄새를 맡도록 촉발하며, 흙과 같은 질감의 두터운 물감으로 뭉개진 인질들의 얼굴을 그렸던 장 포트리에는 눈을 촉각기관으로 만들어버린다. 벨라스케스의 ‘교황 이노센트 10세’의 초상을 다시 그린 베이컨의 그림을 보면, 눈으로 엄청난 비명소리 내지 고함소리가 밀려들어온다. 물론 거기서 그저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만을 ‘보는’ 경우도 있지만, 그 경우 우리는 눈은 있으나 안목은 없다고 말하지 않는가.

노인에겐 시끄러운 음악도
젊은이엔 활력 주는 것처럼
감수작용은 생명력 증감위한
신체의 자연스런 분별 작용


하나의 감각기관을 다른 감각기관으로 바꾸어 놓으려는 시도, 어떤 감각작용을 다른 종류의 감각작용으로 바꾸어 놓으려는 시도는 탁월한 예술가들에 의해 반복하여 시도된 것이다. 이런 시도와 만날 때, 그 만남은 눈을 귀로, 혹은 코로 바꾸어 놓는다. 물론 글자 그대로의 귀나 코는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그림에서 냄새를 맡거나 소리를 듣는 눈을 시각기관으로서의 눈과 같다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만남은 종종 이처럼 우리의 감각기관도 다른 어떤 것으로 재규정한다. 거기서 우리는 새로운 감각기관의 탄생을 보게 된다. 연기법이라는 만남의 사유는 눈과 귀의 존재 자체마저 다른 것이 될 수 있음을 본다는 점에서 인식을 존재의 영역으로까지 밀고 내려간다.

만남(觸)은 만나는 것들을 산출하고, 그런 만남 속에서 어떤 변용을 야기한다. 만남에 의해 발생한 변용을 감수작용(受)이라고 한다. 이 감수작용은 지각이나 인지 같은 작용과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지각이나 인지작용과 동시에 발생하는 어떤 ‘느낌’ 같은 것이고, 그런 인지작용 속에 동반되는 쾌감이나 불쾌감, 기쁨이나 고통 같은 것이다. 멋진 음악은 쾌감을 주지만 아스팔트를 쪼개는 시끄러운 소음은 불쾌감을 준다. 향기로운 음식 냄새는 쾌감을 주지만 쓰레기더미의 썩어가는 냄새는 그 자체만으로 불쾌감을 준다. 트럭 한 대분의 쓰레기더미로 전시장을 채웠던 이브 클랭이라면 쓰레기더미의 냄새에서 쾌감을 느꼈을까? 그랬을 것 같지 않다. 그것은 맘먹고 결심한다고 해서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물론 시끄러운 음악도 익숙해지거나 이해하게 되면 쾌감을 준다. 그러나 그것은 이해하지 못한 쾌감의 요소가 이미 그 안에 있기에 가능한 것이고, 이전에 알아채지 못해서 그랬던 것이며, 이해나 익숙함이 만남의 양상을 다르게 만들었기에 발생한 다른 사건이다. 모호한 경계지대에 있거나 상반되는 요소가 섞여 있는 것들과의 만남은 촉발 받고 감수 받을 능력에 따라 다른 느낌을 야기하는 다른 사건이 된다.

어떤 것이 쾌감을 주고 어떤 것이 불쾌감을 주는가? 신체나 정신의 능력을 증가시켜주는 것과의 만남은 쾌감을 주고, 감소시켜주는 것과의 만남은 불쾌감을 준다. 에너지가 넘쳐흐르는 청년의 신체와 강한 비트의 하드코어 음악의 만남은, 그 신체의 에너지가 분출될 곳을 만들어준다. 공연장에서라면 다른 신체와 리듬에 맞춰 하나처럼 움직이게 해준다. 그런 신체적 확장은 신체적 능력의 증가를 야기한다. 그 경우 그 시끄러운 음악은 쾌감을 준다. 그러나 기력이 쇠약한 노인의 신체나 강한 자극을 스트레스로만 느끼는 병든 신체에게 시끄러운 하드코어 음악은 그나마 부족한 에너지를 과잉소모하게 하기에 능력을 감소시킨다. 이웃한 신체와의 리듬믹한 일체감을 주지도 못하기에 불쾌감을 줄 뿐이다. 동일한 음악도 어떤 상태의 신체와 만나는가에 따라 다른 감수작용을 동반하는 다른 사건을 야기하는 것이다.

이는 단지 신체적인 것에 대해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책을 읽거나 토론을 하다가 의기투합하는 ‘영혼’(글자로 된 것이든, 소리로 된 것이든)과 만나게 되면 쾌감이 발생하지만, 지루하고 뻔한 얘기나 짜증나는 설교를 늘어놓는 ‘영혼’과 만나게 되면 불쾌감이 발생한다. 전자가 ‘정신적인’ 능력의 증가를 야기하는 만남이라면, 후자는 그 능력의 감소를 야기하는 만남인 것이다.

스피노자는 쾌감과 불쾌감의 느낌을 ‘기쁨’과 ‘슬픔’이라는 감응(affect)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그 두 개의 기본적인 감응을 통해 다른 수많은 감정들을 분류한다. 가령 경탄이나 사랑, 환희, 만족감이 기쁨의 계열에 속한 감정이라면 분노나 공포, 미움, 연민, 질투 등은 슬픔의 계열에 속한 감정이다. 역으로 모든 감정들의 밑바닥에는 기쁨과 슬픔이라는, 일차적인 감응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 또한 이 기쁨과 슬픔을 만남으로 설명한다. 어떤 것과의 만남으로 인해 나의 신체나 정신의 능력이 증대하는 경우 기쁨의 감응이 발생하고, 반대로 그 만남으로 인해 능력이 감소하는 경우 슬픔의 감응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쾌감과 불쾌감, 혹은 기쁨과 슬픔의 감수작용은 분별의 일종이지만, 그것은 생명의 자연스런 분별작용이다. 생명이란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려 하기 마련인데, 신체적 능력이 증가한다 함은 자신의 존재를 지속할 능력이 커짐을 뜻하고, 그게 감소한다 함은 그 능력이 작아짐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쾌감·불쾌감, 기쁨?슬픔은 일단은 그 자체로 생명력의 증가?감소를 뜻하는 자연스런 반응이다. 생명이란 그런 능력의 증가를 지향한다. 물론 생명이란 ‘중생’이란 말이 뜻하는 것처럼 복합적인 층위를 갖기에, 쾌감·불쾌감의 반응 또한 실은 복합적이다. 신체에 대해 말하자면, 세포가 느끼는 쾌감·불쾌감이 있다면, ‘기관’이 느끼는 쾌감·불쾌감이 있고, 신체 전체가 느끼는 쾌감·불쾌감이 있는데, 이게 똑같지 않은 것이다. 가령 달콤한 과자나 콜라 같이 입에서는 쾌감을 느끼지만 위장이나 신체 전체로서는 불쾌감을 느끼는 것이 있고, 몽환을 야기하는 약물처럼 감각기관의 능력을 증가시켜 주지만 신체나 세포 모두에겐 능력의 감소를 야기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두들 쾌감을 주는 음식들을 먹고 즐기지만, 어느 부분의 쾌감에 따르는가에 따라 다른 신체적 결과로 귀착된다. 그렇기에 감수작용의 차원에서도 우리는 어떤 것을 먹고 어떤 것과 만나는 게 ‘좋은지’ 구별할 수 있고, 어떤 삶이 ‘좋은 삶’인지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쾌감?불쾌감이나 ‘기쁨·슬픔’의 감수작용이나, 그에 따른 판단으로서 ‘좋음·나쁨’은 그 자체로는 자연학적인 것이다. 신체나 정신의 능력 증감을 야기하는 것은, 생리적이고 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담배나 술이 주는 감각적인 ‘쾌감’도, 그것이 야기하는 건강상의 ‘나쁨’도 모두 의식이 내리는 도덕적 판단이 아니라 신체에 발생하는 자연적인 반응이다. 배고픈 이에게 음식은 ‘좋은 것’일 뿐 아니라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고, 오랫동안 먹지 못하면 신체적 능력이 저하하여 죽음에 이르게 된다. ‘좋음’이란, 능력의 증가를 추구하는 생명체를 이끄는 자연학적 힘을 갖는다. 스피노자는 이 자연학적 힘을 따라 사는 것이 ‘좋은 삶’을 위한 윤리학(ethics)이라고 말한다. 이 윤리학은 생리학이나 자연학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이다.

참고로 덧붙이면, 니체가 ‘도덕의 계보학’에서 강조한 바 있듯이, 이 ‘좋음?나쁨(good·bad)’은 ‘선?악(good·evil)’이란 개념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가령 과식은 몸에 ‘나쁘다’고 하겠지만 ‘악’이라곤 할 수 없으며, 적절한 운동은 몸에 좋다고 하겠지만 ‘선’이라고 하진 않는다. 반면 아담이 사과를 따먹은 것이 ‘악’인 것은 그게 몸이나 정신건강에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신이 명한 것을 어겼기 때문이다. 최익현에게 상투를 자르는 것은 더할 수 없는 ‘악’이지만, 그게 몸이나 정신에 ‘나쁘기’ 때문은 아니다. 그가 살던 사회의 관습이나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持父母)라, 불감훼상(不敢毁傷)이 효즉시야(孝卽始也)”라는 유교적 관념이 금한 계율을 어기는 것이기에 ‘악’이다. ‘좋음?나쁨’이 윤리학의 기본 개념을 이룬다면, ‘선·악’은 도덕(moral)의 기본 개념을 이룬다. 또 하나 다른 점은, ‘선·악’의 판단은 조건과 무관하게 행해지지만, ‘좋음?나쁨’의 판단은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가령 배고픈 이에게 우유는 ‘좋은 것’이 되겠지만, 배탈 난 이에게 우유는 ‘나쁜 것’이 된다. 따라서 ‘좋은 삶’을 위한 계율과 ‘선한 삶’을 위한 계율은 아주 다른 길로 우리는 인도한다. 연기적 사유는 어디에 속한다고 해야 할까?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321호 / 2015년 12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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