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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타인의 슬픔 마주할 때 비로소 내 슬픔도 끝이 난다

기자명 이미령

레이먼드 카버의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레이먼드 카버
김연수 옮김
문학동네
살면서 깊은 슬픔에 빠져본 적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배신을 당하고, 자신이 조금도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미워하는 사람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계속 엮이고…. 슬픔의 내용과 빛깔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그 무게만큼은 누구에게나 같을 것입니다. 너무 무거워서 가슴이 짓이겨지는 것 같고, 심장이 조여오고 어깻죽지가 내려앉고, 숨이 막혀서 헉헉대지만 그 보따리를 어디에 어떻게 내려놓아야 할지 몰라 마냥 짊어지고 있습니다.

저마다 슬픔 빛깔 다르지만
무게만큼은 누구나 같은 것

아픔·고통 가득한 세상서
상대 슬픔은 살피지 못해

다른 이 슬픔 알아차린다면
고통스런 세상에 햇살 비쳐

혹은 이런 적도 있었을 텝니다. 지독한 슬픔에 사로잡혀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의 곁에 있어야 하는 경우, 게다가 그다지 친하지도 않은데 그 깊은 슬픔의 무게에 짓눌려 헉헉대는 사람의 분노를 고스란히 받아야 하는 경우입니다. 내게 닥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 슬픔의 무게와 파장이 어떠한지 전혀 짐작하지는 못하지만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미국 작가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은 느닷없이 찾아온 슬픔과, 슬픔을 겪고 있는 사람을 대하는 자세를 다룬 이야기입니다.

앤과 하워드에게는 월요일에 여덟 살 생일을 맞는 사랑스런 아들 스코티가 있습니다. 앤은 아들을 위해 케이크를 맞추려고 토요일 오후 빵집에 갑니다. 아이가 좋아하는 초콜릿 케이크에는 우주선 발사대도 설치되어 있고, 행성도 장식되어 있습니다. 엄마인 앤은 빵집 주인에게 아들과 아들의 생일케이크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구 쏟아냈습니다. 그림이 그려집니다. 분명 엄마 앤의 머릿속에는 생일날 케이크와 선물더미에 환호성을 질러댈 사랑스런 아들의 표정이 떠올랐을 테지요. 그런데 살짝 흥분해서 수다를 떨고 있는 고객을 대하는 빵집 주인의 자세는 별로입니다. 별다른 대꾸도, 맞장구도 하지 않고 묵묵히 듣고만 있었습니다. 밤새 빵을 구워야 하는데 지금은 시간에 쫓기지도 않으니 손님의 수다를 막을 필요는 없었습니다.

앤은 빵집 주인에게 자기 이름 ‘앤 와이스’와 전화번호를 적어 넣게 하고, 스코티의 생일파티는 월요일 오후에 열릴 것이라고 일러줍니다. 그러면서 앤은 빵집 주인의 모습과 태도를 평가합니다. 아버지뻘 되는 정도로 늙었고, 평생 이 보잘 것 없는 빵집에서 한 번도 풀려난 적이 없어 보이는 우울한 얼굴, 서른 세 살의 그런대로 행복한 시절을 보내고 있는 자신과는 너무나 달리, 이미 인생의 황금기를 지나와버려 죽을 때까지 밤새 빵만 구울 늙어빠진 남자…. 그런데도 빵집 주인은 어찌나 센스가 없는지 앤의 달뜬 수다와 경멸이 섞인 시선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합니다.

그렇게 주말과 일요일을 보내고 월요일 아침이 밝았습니다. 그런데 스코티는 등굣길에 뺑소니차에 치이고 그 길로 의식을 잃고 맙니다. 하루아침에 혼수상태에 빠져 병원 침상에 누워버린 어린 아들을 바라봐야 하는 부모의 심정을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말짱한데 아이는 깊은 잠에 빠져 깨어날 줄 모릅니다. 의사는 괜찮을 거라고 말합니다. 그 말에 스코티의 아버지인 하워드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갑니다. 일단 몸도 씻고 옷도 좀 갈아입고 올 작정이었지요.

밤늦어 도착한 집에 느닷없이 전화벨이 울립니다. 하워드는 불현듯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그 사이 스코티에게 뭔가 일이 생겼을까?’ 병실을 괜히 비웠다는 생각에 서둘러 수화기를 듭니다. 그런데 수화기 저편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여기 십육 달러의 케이크가 있소.”

다음날에도 장난전화는 또 걸려옵니다. 불길한 예감에 부리나케 수화기를 들자 “와이스 부인? 스코티 일은 잊어버리셨소?”라는 남자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런데 스코티는 부모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끝내 숨을 거둡니다. 그리고 부부는 장례준비를 하려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망연자실 거실을 서성입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그저 사소한 교통사고였을 뿐인데, 한 생명이 사라졌고, 그 생명이 내뿜는 기운으로 살아오던 젊은 부부는 자기 집 거실에서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주인을 잃은 아이 방의 모든 사물들도 사흘 만에 덩달아 생기를 잃어버렸습니다. 처음부터 자식이 없었다면 이런 아픔 같은 것도 없었을 테지요. 하지만 느닷없이 찾아온 자식의 부재(不在)를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숙제는 이들에게 버겁습니다.

어찌되었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아이의 죽음을 알려야 하겠기에 앤은 이곳저곳으로 전화를 겁니다. 그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습니다. 이틀 전부터 늦은 밤마다 전화를 걸어온 사내였습니다. 앤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원하는 게 뭐냐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런데 수화기 너머 그 남자는 엉뚱하게도 이렇게 대꾸합니다. “스코티를 잊어버렸소?”

불과 몇 시간 전에 아이의 사망선고를 받은 부모에게 이건 너무 잔인한 말입니다. 앤은 이 무례하기 짝이 없는 전화에 불같이 화를 내다가 문득 기억해냅니다. 그 잔인한 사내는 빵집의 늙은 주인이었던 것입니다. 스코티 생일 케이크를 주문하면서 자기 이름과 전화번호를 남겼는데 이렇게 늦은 밤마다 장난전화를 걸고 있는 겁니다. 부부는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빵집으로 차를 몰고 갑니다. 단단히 혼을 내줘야겠다는 생각이었지요.

▲ 일러스트=강병호 화백

늦은 밤, 상가 전체가 어둠에 휩싸였는데 밤샘 작업을 해야 하는 빵집에서만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영업이 끝났다는 늙은 빵집 주인의 대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부부는 막무가내로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낯선 부부의 습격에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던 빵집 주인도 그제야 이들의 정체를 알아차린 듯합니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뻔뻔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야 케이크가 필요해진 모양이군.”

케이크를 주문할 때는 세상을 다 가진 듯이 들떠서 수다를 늘어놓더니 정작 약속한 시간에는 나타나지도 않고, 사흘이나 지난 생일케이크는 이미 상해버려서 팔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밤낮없이 일하며 밤샘 작업까지 해야 겨우 수지를 맞출 수 있는 작은 빵집 주인으로서는 고스란히 시간과 돈만 날려버린 셈이지요. 작업하러 나온 시간이 한밤중이라 그 늦은 시간에 독촉전화를 걸 수밖에 없는 그의 사정도 딱한 노릇이긴 합니다. 하지만 어린 자식을 졸지에 잃은 부모의 심정에 비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아들은 죽었어요.”

간신히 이성을 되찾은 앤은 침착한 목소리로 아들의 죽음을 알립니다. 하지만 이내 격정에 휩싸여 그녀는 빵집 주인에게 거칠게 욕을 퍼붓지요. 아무리 그래도 고작 생일케이크 하나 때문에 자식 잃은 부모에게 그런 전화를 해대다니요. 빵집 주인에게 욕설을 퍼붓던 앤은 끝내 울음을 터뜨립니다. 눈앞에서 아들의 주검을 보고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집니다. 아들을 데리고 병원으로 달려간 이후 물 한 모금, 빵 한 조각 삼키지 못한 엄마입니다. 아들을 친 운전자는 애초 사라져 버리고 없습니다. 의사는 기다려보면 의식을 되찾을 거라고 말하더니 아들이 죽고 나자 ‘유감’이라는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왜 일어났고, 누구를 탓해야 하며, 진짜로 이 모든 일들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할지도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슬픔과 상실의 무게에 혼돈의 더께까지 얹혔습니다.

빵집 주인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게 됐습니다. 이제 그 앞에는 지금 막 어린 자식을 떠나보내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젊은 부모가 서 있습니다. 당신이 이 빵집 주인이라면 무슨 말을 하시겠습니까? 어떤 제스처를 취하시겠습니까? 당신이, 생사를 초탈한 수행자도 아니요, 지적인 소양도 그리 없어서 두어 마디 이상의 문장을 말하지도 못하는, 작은 빵집에서 평생을 늙어온 사내라면 지독한 슬픔에 빠져 버린 사람에게 무슨 말을 건네겠습니까?

짧은 단편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빵집 주인은 의자 세 개를 마련해서 부부에게 앉기를 권하고 자신도 나란히 앉습니다. 방금 오븐에서 꺼낸 따뜻한 빵과 커피를 내놓으며 말합니다.

“내가 만든 따뜻한 롤빵을 좀 드시지요.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

슬픔을 삼켜버려 허기를 느끼지도 못하고 있던 부부는 갓 구운 따뜻한 빵 냄새를 맡고 한 입 가득 베어 뭅니다. 그리고 이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그런데 말하는 사람은 빵집 주인입니다. 그는 부부를 위로할 줄도 모릅니다. 자신의 무신경을 사과하고, 그리고 자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상가 전체가 시커먼 어둠에 휩싸인 가운데 홀로 불을 밝힌 작은 빵집에서 이제 막 지독한 슬픔을 맛본 부부를 향해, 처음부터 슬프게 살아왔던 사내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밤새도록.

레이먼드 카버의 짧은 소설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늙은 빵집 주인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부부의 슬픔이 치유됐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새카만 어둠 속에서 홀로 불 밝힌 가게 안, 갓 구운 빵 냄새를 맡으며 게걸스레 먹어대는 슬픈 사람이 있고, 슬픈 줄도 모르고 살아왔다가 그제야 자기이야기를 쏟아내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세상에는 슬픔이 한가득 입니다. 그 속에서 어쩌면 우리는 누가 누가 더 슬픈지 경쟁이라도 하듯 슬픔의 절정을 향해 내달립니다. 상대도 슬프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내 슬픔의 레인에서 달리기에만 골몰합니다. 그러다 문득 옆을 돌아보고서 또 다른 슬픔의 주자를 발견할 때, 그때 비로소 슬픔의 달리기는 끝이 납니다. “당신도 그랬구나!”하는 진한 파동이 느껴질 때 슬픔의 세상에는 빛이 비칩니다. 희미한 햇살이 비치는 빵집처럼 말이지요.

이미령 cittalmr@naver.com

[1321호 / 2015년 12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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