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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돈황(敦煌) 막고굴(莫高窟)

‘세기의 대발견’으로 실크로드 연구의 전환점 된 역사적 공간

▲ 막고굴은 366년 낙준(樂樽) 스님이 굴을 파고 수행한 곳에서 개착이 시작됐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1000년 동안 조성불사가 이어지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춰나갔다. 사진은 96호굴.

왕원록 도사가 돈황(敦煌) 막고굴(莫高窟)의 고문서들을 어떻게 발견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길이 없다. 다만 몇 가지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어 당시 상황을 유추해볼 수 있다. 일화는 이렇다. 1900년 어느 날, 16굴을 청소하던 왕 도사는 입구 오른편의 작은 균열을 목격했다. 이후 인부들이 모래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굉음과 함께 균열이 벌어졌고, 벽면을 무너뜨리니 곁간굴인 17굴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 16굴 입구 오른편에 위치한 17굴.

혹자는 이렇게도 말한다. 왕 도사가 필사(筆寫)를 위해 고용한 사람이 담뱃재를 균열에 털었는데 한없이 밀려들어갔다. 이를 심상치 않게 여긴 왕 도사가 벽을 부수고 진흙을 제거해 17굴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다. 어떤 방식이었든 왕 도사는 17굴에서 무더기의 고문서들을 손에 거머쥐었다. 돈황의 문명사, 아니 실크로드와 중국의 문명사를 다시 써내려가야 할 만큼의 가치를 지닌 고문서들이었다. 여기까지였다면 역사는 다르게 기록됐을 것이다. 하지만 ‘세기의 대발견’은 각국의 탐험가들을 막고굴로 모여들게 했다. 탐험가들은 장시간 동안 첩보작전을 방불케 하는 계략을 발휘해 왕 도사의 고문서들을 ‘탈취’했고 자신들의 나라로 가져갔다. 중국인들은 현재까지도 탐험가들을 ‘실크로드의 악마’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당시 사건을 저주하고 있다.

500여개 불감 계곡에 들어서
총 4만5000㎡ 면적의 벽화와
2400여 점 불상·소조상 보존

1900년, 17굴서 고문서 발견
탐험가들에 의해 약탈돼 이동
실크로드를 알린 계기였지만
중국인들은 현재까지도 분노

돈황에 도착해 하룻밤을 보낸 순례단은 아침 일찍 막고굴로 향했다. 숙소에서 막고굴 입구까지는 1분 남짓 거리다. 중국정부가 얼마 전 만들었다는 입구 건물을 통과해 다시 버스를 타고 15분을 달리자 멀리서 막고굴이 보이기 시작한다. 계절의 영향으로 물이 사라진 대천하(大泉河)와 깎아지른 절벽에 들어선 수백여 개의 굴들. 법문사(法門寺), 맥적산(麥積山) 석굴, 병령사(炳靈寺) 석굴, 유림굴(楡林窟)에서도 저마다의 감동을 받았지만 가장 기대했던 막고굴인지라 각별하게 느껴진다.

▲ 순례단 스님들이 막고굴 입구에서 예불을 올리고 있다.

막고굴 앞에서 예불을 올리고 가이드를 따라 내부로 이동한다. 막고굴은 3층으로 구성돼 있는데 각 층마다 불감(佛龕)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어 얼핏 봐도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총 492개 석굴에 4만5000㎡의 벽화, 2400여 점의 불상·소조상이 보존돼 있다고 하니, 막고굴의 유물들을 꺼내 펼쳐놓으면 그대로 장엄한 불국토가 될 터다. 절벽에 늘어선 불감들을 올려보다 가이드의 손짓이 향하는 곳에 시선을 멈춘다. 3층 전각이 절벽에서 돌출돼 있다. 불감들 사이에서 홀로 전각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뭔가 특별한 것이 있겠다 싶어 다가가 입구 위 간판을 보았다. ‘16-17’이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왕원록 도사가 고문서들을 발견했던 곳, 탐험가들이 그것을 얻고자 수없이 많은 날을 기웃거렸던 곳, 바로 여기 16·17굴. 100여년을 침잠해 있던 열기가 어두컴컴한 굴 안쪽에서 자욱하게 퍼져 나온다. 흥분으로 온몸이 떨려오는 것을 느끼며 역사적 현장을 향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긴다.

진흙으로 봉해졌던 17굴에는 무려 4만 점의 고문서들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한문을 비롯해 티베트어, 산스크리트어, 소그드어, 호탄어, 쿠차어, 투르크어 등은 물론 고대 이란어인 팔라비어, 아라비아어, 서하어, 몽골어로 된 문서도 있었다.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도 이곳에 있었다. 대부분 경전이었지만 문서 뒤편에 낙서처럼 기록된 호적, 계약문서, 족보 등은 시대상을 읽어낼 수 있는 더없이 소중한 사료로 평가 받는다. 무더기의 고문서를 왜 숨겨야했는지 현재로선 알 수 없다. 다만 고문서들이 만들어진 시기를 대략적으로 계산해본 결과, 1036년 서하(西夏)의 돈황 침공 때 급하게 밀봉한 것으로 추정해볼 뿐이다.

고문서들의 엄청난 양에 놀란 왕원록 도사는 일부를 빼내 지방 유지들에게 보여줬으나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다. 사정은 관청도 마찬가지여서 포장비와 운임비를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입구를 차단하라는 지시만을 내렸다. 낙심한 왕원록 도사가 돈황을 벗어나 곳곳을 돌아다니며 고문서들을 보여줬음에도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만약 그대로 시간이 흘렀다면 고문서들은 17굴에 고스란히 보존되지 않았을까? 아니면 중국 격변기를 통과하며 훼손돼 결국 소재조차 파악하지 못하게 됐을까? 전자는 중국인들의, 후자는 일부 학자와 호사가들의 주장이지만 어쨌든 1900년 이후 역사는 두 가지 주장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16굴 안쪽으로 발을 들여놓은 직후 오른편의 17굴과 만난다. 분홍빛 벽화들이 장엄한 16굴 벽면 오른편으로 17굴의 입구, 입구 안의 당나라 고승 홍변(弘辨) 소상, 소상 주변으로 나무가 그려진 벽화가 보인다. 17굴은 높이 3m, 면적 2.8㎡에 불과하다. 4만 점의 고문서가 봉해져 있었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아담한 공간이다. 가이드가 17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고 16굴로 향했지만 도무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순례를 떠나기 전, 막고굴 관련 자료들을 섭렵하며 수도 없이 꿈꿔왔던 순간이 바로 지금인데 어찌 쉽게 지나칠 수 있겠는가. 바닥에 고여 있던 스산한 공기가 17굴 안으로 스며든다. 100여년 전 이곳을 활보했던 인물들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1907년 3월, 영국의 스타인 탐험대가 돈황에 진입했다.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을 누비던 오렐 스타인은 돈황에서 고문서의 소문을 듣고 한달음에 막고굴로 달려갔다. 그러나 노회한 왕원록 도사는 녹록치 않은 상대였다. 이 걸출한 인물 앞에서 좌절하곤 했던 스타인은 우연한 기회에 그가 현장법사의 숭배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현장법사를 존경한다는 말을 흘리자 이윽고 왕원록 도사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리고 본격적인 ‘약탈’이 시작됐다. 스타인은 은괴인 마제은(馬蹄銀)을 건넸고, 왕원록 도사는 고문서를 꺼내왔다. 고문서 1만점이 스타인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 17굴에서 고문서들을 살펴보는 폴 펠리오.

1906년 우루무치에 머물던 프랑스의 폴 펠리오는 지인이 보낸 ‘법화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뛰어난 동양학자로서 한문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던 펠리오는 막고굴에서 발견됐다는 이 책이 당대(唐代)의 사경이라는 사실을 대번에 알아챘다. 투루판 탐험을 생략한 채 돈황으로 직행한 펠리오는 왕원록 도사를 만나 유창한 중국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이미 1만점을 팔아넘긴 왕원록 도사에게 폴 펠리오의 방문은 새로운 돈벌이를 의미했다. 폴 펠리오는 17굴로 들어가 하루 10시간씩 20일 동안 고문서 판독과 가치 감별 작업을 진행했다. 펠리오는 학문적으로 무지했던 스타인과는 달랐다. 그가 걸러낸 5000권은 고문서의 정수였다.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중국 남경, 천진, 북경 등에서 고문서들을 전시하는 대담함을 보이기도 했는데 중국정부는 그때서야 남아 있는 고문서 모두를 북경으로 운반하게 했다. 그럼에도 왕원록 도사는 많은 고문서를 은닉했고 일본 오타니 탐험대, 러시아 올덴부르그 탐험대에게 또다시 팔아넘겼다. 돈황 막고굴의 고문서들은, 그렇게 짧은 시간에 세계 각지로 옮겨졌다.

▲ 96굴에 봉안돼 있는 높이 35.5m 미륵대불.

순례단이 16·17굴에 머무른 시간 역시 짧았지만 당시 상황을 상상해보기에는 충분했다. 이곳에서 옮겨진 고문서들은 ‘돈황학’을 탄생시키며 실크로드 연구의 전환점을 만들어냈다. 실크로드 사람들의 생활상이 속속들이 밝혀졌고, 문명교역로로서 의미가 확장됐다. 그 불멸의 발견이 이뤄졌던 공간을 서성이다 굴 밖으로 나가니 쪽빛 하늘에서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가이드의 안내로 328호, 332호, 63·61·62호, 259호, 249호, 96호, 130호, 148호를 차례로 둘러보았다. 96호에는 높이 35.5m의 미륵대불이 봉안돼 있다. 막고굴에서 가장 큰 규모로 전 세계에서도 4번째로 크다고 한다. 부처님 발밑에서 고개를 등 뒤까지 젖혀야 간신히 얼굴을 친견할 수 있을 정도다. 148굴에는 열반에 들고 있는 부처님이 계셨다. 부처님 뒤편으로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극히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어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도 흥미를 자아내고 있었다.

▲ 열반에 들고 있는 모습의 148굴 부처님.

96호굴 앞에서 막고굴을 마지막으로 돌아본 뒤 입구로 향했다. 길게 늘어진 나뭇잎, 화사하게 피어있는 꽃들을 지나 주차장에 도착했다. 오늘은 명사산(鳴沙山) 월아천(月牙泉)을 거쳐 고속열차를 타고 투르판으로 가야 한다. 버스가 돈황 톨게이트에 잠시 멈춘다. 손으로 턱을 괴고 무심히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모래 위로 누군가의 무덤들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사막에 제 몸을 묻은 이들은 어떤 꿈을 꾸었던 걸까. 사막의 적막에 둘러싸여 저 홀로 영원히 기억되길 바랐던 것일까. 혹, 사막에 스러짐으로써 생명의 꽃으로 윤회하겠다는 발원은 아니었는지. 그도 아니면 100여년 전 탐욕으로 얼룩졌던 영혼들의 배회가 그림자를 짙게 드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김규보 기자 kkb0202@beopbo.com


[1322호 / 2015년 12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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