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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투르판 고창고성(高昌古城)

현장 스님 한 달간 설법했던 사막 속 불심 도시

▲ 7세기 무렵 화려한 전성기를 누렸던 고창고성은 현재는 폐허로만 남아있다. 성 서쪽에 위치한 대불사 터는 복원으로 그나마 예전의 형태를 가늠해볼 수 있었다.

열차는 낙조를 이고 사막을 질주한다. 붉은 숨을 토해내고 있는 태양이 서서히 사막의 지평선 아래로 떨어진다. 누런 모래는 제 빛을 잃어가며 어둠 속에 빨려 들어간다. 곧 별들이 떠오르면 황막했던 사막의 풍경은 영롱한 빛이 되어 반짝일 것이다. 투르판(토로번, 吐魯番)을 향해 달리는 고속열차 안. 돈황(敦煌) 막고굴(莫高窟)에서의 순간들이 태양과 함께 사막 저편으로 사라진다. 이제는 새로운 현재와 만나야 한다. 순례는 늘 현재와의 조우였기에 물과 바람이 길러낸 생명들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숱한 유적지에서 엿본 찬연했던 역사의 흔적들보다 감명 깊었던 것은 그 안에 깃들어 있던 생명의 숨결이었다. 바로 지금, 이곳에서 충실하다면 삶은 늘 생명의 감동을 선사할 것이라 믿는다.

투르판에서 동쪽으로 46km
91년, 한나라의 요새가 시초
5세기 무렵 고창국 세워지며
동서문명 접점의 전성기 구가

천축으로 향하던 현장 스님
국문태왕의 간청으로 법문
다시 찾아오겠다 약속했지만
고창국 멸망으로 성사 못해

▲ 고속열차에서 바라본 사막과 낙조.

밤 10시10분, 투르판역에 도착했다. 투르판이라는 이름은 명대(明代)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위구르어로 ‘움푹 들어간 땅’을 의미하며 ‘서역번국지(西域番國志)’에 따르면 15세기 초 명나라 영락제의 명을 받은 진성(陳誠)이 이곳을 방문해 토이번(土爾番)이라고 기록했다. 투르판은 무엇보다 1000개의 카레즈(인공수로)가 만든 도시로 널리 알려져 있다. ‘들어가면 살아나올 수 없는 땅’ 타클라마칸 사막 최북단에 자리 잡은 투르판의 여름 평균 기온은 50℃에 육박하고 연평균 강수량은 16.6mm 불과하다. 이처럼 혹독한 환경을 극복하고자 고대 투르판 사람들은 천산산맥(天山山脈) 기슭부터 물길을 파 만년설을 끌어왔다. 어두컴컴한 지하에서 곡괭이로 흙을 긁고 도르래로 올리는 원시적인 작업을 통해 도시를 만들어낸 것이다. 카레즈는 단순한 수로가 아니라 사막에 생명력을 감돌게 하는 핏줄일 터다.

▲ 지하 인공수로인 카레즈의 모형.

이튿날 아침, 부슬비가 떨어지고 있었다. 비는 난주(蘭州) 가욕관(嘉峪關)에서부터 순례단과 함께해왔다. 순례지의 연평균 강수량이 점점 낮아지고 있지만 어찌된 일인지 빗방울은 점점 굵어지고 있다. 현지인과 대화를 나눈 가이드는 이것이 올해 첫비라고 말한다. 가욕관에서, 유림굴(楡林窟)에서, 막고굴에서 부슬비와 화창한 하늘이 번갈아 모습을 드러냈던 저마다의 오늘들은 그대로가 부처님 가피였다. 촉촉이 젖은 도시가 기지개를 켜는 모습을 바라본다. 순례단 지도법사 혜총 스님이 축원을 올린다. 기쁜 마음으로 모든 존재들의 평화를 함께 기원한다.

오전 9시, 고창고성(高昌古城)에 도착했다. 이른 시각인 탓에 입구는 굳게 닫혀있었다. 가이드가 관리인을 불러 입장시간을 조율하는 동안 주변 풍광을 둘러보았다. 멀리 화염산(火焰山)이 불타오르는 형상으로 치솟아있다. 자욱한 먹구름은 일렁이는 물결 같았고 붉은 땅과 산은 그것에 내려앉은 노을 같았다. 위아래가 뒤바뀐 풍경은 광활한 대지의 아득한 거리감과 겹쳐, 텅 빈 하늘을 유영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나아가려 해도 제자리를 맴돌고만 있는 것 같아 무기력함이 느껴졌다. 불현듯 현장(玄奘) 스님의 숭고했던 발원이 떠오른다. 고창고성에 짙은 자국을 남겼던 현장 스님도 마찬가지의 풍경과 대면했을 것이다. 1500년 전, 스님의 형형한 눈빛이 설산을 꿰뚫고 천축까지 뻗어나가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602년에 태어난 현장 스님은 둘째 형의 영향으로 13세에 출가했다. 이후 오로지 공부에 매진하며 이른 나이에 명성을 떨쳤다. 그러다 경전 번역에 오류가 많다는 사실을 인지한 스님은 그것을 바로잡겠다는 발원을 했다. 천축으로 건너가 경전을 가져온 뒤 직접 번역하겠다는 발원이었다. 629년 장안에서 시작된 구법의 길은, 그러나 난관의 연속이었다. 당나라 조정이 출국을 금지했기 때문에 양주 변경에서 군사들에게 붙잡혀 도망쳐야 했고, 사막에서는 길을 잃고 헤매다 목숨을 잃을 뻔도 했다. 그렇게 험난한 여정을 통과하며 하미(합밀, 哈密)에 이르렀을 때였다. 신심 깊은 불자였던 고창국의 왕 국문태(麴文泰)가 스님의 명성을 듣고 머물 공간을 제공했다. 국문태는 국사(國師)가 되어줄 것을 청하며 억류했지만 ‘천축에 닿기 전까지는 한 걸음도 동쪽으로 옮기지 않겠다’며 곡기마저 끊어버리는 스님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대신 스님은 고창고성에서 백성들에게 법문을 해주었고, 국문태는 25명의 수행원과 말 30필 그리고 서역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는 통행증을 건네며 스님을 배웅했다. 스님은 천축에서 돌아올 때 고창국을 다시 찾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길을 떠났다.

관리인과 흥정을 마친 가이드를 따라 내부로 들어갔다. 잠이 덜 깬 얼굴의 직원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다듬으며 순례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창고성 유적은 둘레가 5km에 이른다. 걸어서는 시간이 오래 걸리기에 전동차를 타기로 했다. 전동차가 천천히 움직이며 고창고성 구석구석을 훑는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폐허만이 가득하다. 허물어진 성벽과 터만 남은 건물의 잔해가 어떠한 의미도 만들어내지 못한 채 널브러져 있다. 온전한 것이라곤 전동차가 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도로가 전부다. 카메라를 들고 몇 컷 찍어봤지만 동일한 피사체를 담은 것처럼 허무할 뿐이니, 그저 얌전히 손을 내려놓고 흥망성쇠의 숙명을 되짚어볼 따름이다.

투르판 시내에서 동쪽으로 46km 떨어진 화염산 기슭 오아시스에 세워진 고창성은 후한(後漢) 시대인 91년 건축됐다. 한나라가 투르판을 점령한 뒤 작은 성을 쌓고 500명의 군사로 하여금 주둔하게 한 것이 시초였다. 5세기 무렵 고창국이 세워지자 고창성은 어엿한 수도가 되어 동서문명 접점으로서 번영을 구가했다. 특히 지배계층이 대륙에서 흘러들어온 한족이었던 까닭에 대대로 불교를 숭상했으며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 현장 스님이 처음 방문했던 7세기 초반은 고창국 최고의 절정기였다. 둘레 1km의 궁전 주위로 사찰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모습은 장관이었을 것이다. 특히 궁궐 인근의 거대한 사지(寺址)가 유명한데 고창성을 방문한 스님이 머무른 사찰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현장 스님이 설법했던 법당. 최근 복원됐다.

을씨년스러운 폐허에 마음이 지쳐갈 무렵 전동차가 멈춰 섰다. 붉은 흙벽돌 폐허 사이로 나무로 만든 길이 있었다. 이 길 끝에 현장 스님이 설법했다는 대불사(大佛寺)가 있다. 조금 걸어가자 널찍한 공간과 어느 정도 복원된 전각이 나온다. 돔 형태의 설법당, 탑을 모셨던 주전(主展)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국문태의 간청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던 현장 스님이 고창국 백성들을 위해 한 달간 법문을 펼쳤던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 대불사의 탑이 모셔졌던 주전.

주전 문턱에 올라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성벽과 궁전, 전각이 시뻘건 땅을 뚫고 솟아오른다. 고개를 돌려 동쪽을 바라보았다. 형형한 눈빛의 스님이 걸망을 지고 화염산을 넘어오고 있었다. 이윽고 광장에 도착해 설법당으로 들어가자, 그곳에서 찬란한 빛이 새어나왔다. 화염산 기슭에서 나부끼던 흙먼지가 푸른 눈의 투르판인들로 모습을 바꾼다.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고, 말끔하게 정비된 성곽을 통과해 대불사로 모여들었다. 왕도, 백성도 무릎을 꿇고 빛의 가피에 몸을 맡긴다. 빛은 고창국을 감싸 안으며 한 달 동안 꺼지지 않았다. 고창국 역사상 가장 눈부셨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성(盛)하고 흥(興)한 것들은 필히 쇠(衰)하고 망(亡)하기 마련이니, 고창국도 그러한 운명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7세기 중반, 서돌궐을 정복하려 했던 당나라는 20만 대군을 보내 일대를 휩쓸었고, 고창국도 그 과정에서 멸망하고 말았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았던 현장 스님은 결국 국문태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귀국해야만 했다.

▲ 투르판 북역의 모습.

전동차를 타고 고창고성을 빠져나왔다. 이번 순례의 마지막 여정인 베제크릭(백자극리극, 伯孜克里克) 석굴로 향한다. 버스가 달리는 길 주변으로 포도밭들이 보인다. 건조한 기후와 풍요로운 햇살은 카레즈 물길을 만나 세상에서 가장 당도가 높은 포도를 만들어냈다. 중국의 미식가들은 오로지 포도를 맛보기 위해 투르판을 찾는다고 한다. 풀 한포기 자라기 힘든 삭막한 땅에서도 생명은 그렇게 질기고 억척스러웠다. 고창고성 폐허 어디엔가 묻혔을 1500년 전의 빛도 다시금 생명으로 발화할 순간을 기다리고 있진 않을는지. 부질없이 소멸하는 것들을 가로질러 머나먼 서쪽 끝, 천축에 당도하고야 마는 영원의 빛이 손에 잡히는 듯하다.

김규보 기자 kkb0202@beopbo.com


[1323호 / 2015년 12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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