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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는 있는 것인가?

기자명 법상 스님
  • 세심청심
  • 입력 2015.12.15 10:38
  • 수정 2015.12.15 10:40
  • 댓글 2

초기 경전에서는 무아(無我)를 설하며, 대승경전에서는 아상 타파를 설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자성청정심이니, 참나니, 본래면목이니, 주인공, 일심(一心), 법성(法性), 마음, 법 등을 설하기도 한다. ‘나’라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참나, 본래의 나, 진실된 나가 있다고 말하니 이 즈음에 이르면 많은 분들은 깊은 수렁에 빠질 것이다. 실제 불교의 역사 속에서 이 문제는 끊임없이 제기되어 온 주제 중 하나다. 심지어 필자가 대학에 다닐 때는 진아(眞我)와 무아를 두 편으로 나누어 어느 쪽이 맞는지 토론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런 혼란스러움을 잠시 비워두고 부처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을 하셨는지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고 있는 ‘참나’에 대하여 조금 더 생각해 보자.

‘참나’ 찾으라고 말하는 건
진리 찾으라는 방편의 말
인식·분별로 확인될 수 없어
구별하려는 것은 결국 집착

보통 우리가 참나를 말할 때, 그 참나는 참나가 아니라 참나라는 말일 뿐이고, 생각일 뿐이고, 참나라는 개념의 인식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 많은 선지식 스님들께서 참나를 찾으라고, 본래면목을 보아야 한다고 방편설법을 하시지만, 많은 제자들은 ‘도대체 참나가 무엇일까’ 하고 참나에 대하여 생각하고, 분별하고, 인식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참나는 생각되어질 수 없고, 말로 표현되어질 수 없으며, 우리의 인식과 분별 그 너머에, 있고 없음을 넘어서 있을 뿐이다. 행여 ‘생각 그 너머에 있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나’를 말로 표현했다고 했을 때조차 그것은 그렇다고 말로 표현되어지고 있을 뿐이지 그것은 여전히 참나가 될 수 없다. 단지 ‘우리의 생각과 인식, 말을 초월해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일어날 뿐인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 중생들의 마음에서는 무언가 표현을 하길 바라고, 논의되길 바라고, 설하여지길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경전에서는 그 자리는 표현할 수도 없고, 논의의 대상도 아니며,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 대한 그 어떤 상(相)도 내세우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세속제(世俗諦)와 제일의제(第一義諦)라는 말이 대승불교 경전이 나온 이후에 논사들에게 설파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상으로 내세울 수 없는 것을 어쩔 수 없이 언어라는 상으로 설하지 않을 수 없는 딜레마에서 세속제와 제일의제로 구분하는 방편을 썼던 것이다.

그동안 방편으로 부처가 되어야 한다고, 자성불을 찾아야 하고, 본래 면목을 보아야 한다고 했던 그 말 또한 단지 방편의 말일 뿐이었음을 잘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즉, 우리가 쉽게 쓰는 말 ‘참나’니, ‘자성불’이니, ‘본래면목’이니, ‘한마음’이니 하는 모든 것들 또한 하나의 진리를 표현하는 방편의 ‘말’일 뿐이지, 그것 자체가 당처(當處)인 것은 아니니, 그러한 말에 걸려서는 안 되며, 집착해서도 안 된다. ‘금강경’의 표현대로 한다면 ‘참나는 참나가 아니라 이름이 참나일 뿐’인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방편일 뿐이지만 참나, 자성불이 있긴 있는 게 맞지요?’ 하고 질문하실 분이 계시겠지만, 그런 질문이 바로 우리의 이해하려는 습성, 있는지 없는지를 둘로 나눠놓고 그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식(識)의 허망한 습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반야심경’에서도 오온, 십팔계가 다 허망하다고 했듯이, 알음알이라는 분별심인 ‘식’은 허망하다. 알음알이를 통해서는 결코 선에 이를 수 없다. 그래서 선에서는 언제나 선문답이나 화두를 통해 식이라는 분별심이 오도가도 못 하도록, 생각이나 이해가 꽉 막히도록 이끌지, 머리로 이해시키려 하지 않는다.

초기불교를 공부하는 일견에서는 대승이나 선불교의 법, 마음, 본래면목 등을 보고 불조의 가르침인 무아에서 어긋난 것이라고까지 폄하하는 일이 있던데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언어적 방편이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 ‘참나’나 ‘본래면목’이 진짜 있다는 말은 아니다. 물론 없다는 말도 아니다.

▲ 법상 스님
목탁소리 지도법사
실제 ‘육조단경’에서는 ‘본래무일물’이라고 했고, ‘백장어록’에서는 ‘원래 부처란 없으니, 부처라는 견해를 내지 말라. 부처란 중생에게 사용하는 약이다’라고 했다. 또한 임제는 ‘구할 수 있는 부처도 없고, 이룰 수 있는 도도 없고, 얻을 수 있는 법도 없다’고 했고, 황벽은 ‘본래 부처에게는 진실로 한 물건도 없다’고 했으며, 대혜종고는 ‘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고 조사가 서쪽에서 왔지만, 역시 전해줄 수 있는 법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그러니 참나는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으니 오직 중도(中道)로써 설할 뿐이다.

  [1323호 / 2015년 12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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