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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안도 히로시게, ‘아타케 대교의 소나기’

기자명 조정육

믿고 공부하며 묵묵히 실천한다면 저절로 증명될 것이다

▲ 안도 히로시게(安藤廣重), ‘아타케 대교(大橋)의 소나기’ 명소 에도 100경(名所江戶百景), 오오반니시키에, 1857년, 34×22.5cm, 일본 야마타네(山種)미술관.

3년 동안 지속해 온 불법승 연재를 끝마칠 때가 되었다. 그동안 인도에서 시작해 티베트, 중국, 한국, 일본까지 건너오면서 기라성 같은 고승대덕을 많이 만났다. 그분들은 때론 근접할 수 없는 천재성으로, 때론 탁월한 법문으로, 때론 목숨을 건 수행으로 불교사에 빛나는 별이 되었다. 물론 나에게도 북극성 같은 존재가 되었다. 지증보살(智增菩薩)의 화현인 듯한 그분들의 삶의 궤적을 지켜보면서 감탄했고 절망했고 자극받았다. 연재는 곧 마치지만 그분들의 가르침은 내가 이승을 떠나는 순간까지 계속될 것이다.

닌쇼 스님, 민중구제 뜻 두고
평생 동안 계율 실천에 철저
여러 해를 한센병환자 돌보자
바람에 풀 눕듯 백성들이 따라

승편 연재를 시작할 때 마지막은 꼭 이 두 스님으로 마무리해야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 첫 번째가 닌쇼(忍性,1217~1302) 스님이다. 다음 회에 마지막으로 살펴보게 될 스님도 닌쇼 스님과 비슷한 삶을 산 분이다. 내가 두 스님을 선택한 이유는 단 한가지다. 어떤 행동을 선택해야 할 때 가장 먼저 생각난 스님이 두 분이었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이익과 사람의 도리 사이에서 갈팡질팡할 때 만약 두 분이 이 상황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신기하게도 내 몸은 나를 위한 이익보다 타인을 배려하는 쪽을 선택하고 있었다. 두 분의 삶 자체가 워낙 눈부셨던 만큼 나의 고민은 고민이랄 것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 눈부심의 정체가 바로 자비행이었다. 두 분은 비증보살(悲增菩薩)의 발현이었다.

지증보살과 비증보살은 불교의 두 가지 특징인 지혜와 자비를 상징한다. 지증보살은 오로지 부처만 바라보고 부처의 가르침대로 살고자 지혜를 닦고 번뇌를 끊으려 수행한다. 성불을 지향하는 수행자의 본보기다. 그런데 비증보살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한걸음 더 나아간다. 이타(利他)에 대한 원이 워낙 강해 자리(自利)는 잠시 뒤로 미룬다. 지증보살의 수행은 기본이되 중생들을 이롭게 할 수 있다면 자신의 성불조차 포기한다. 자비심의 절정이다. 지장보살이 대표적인 경우다.

닌쇼 스님은 13세에 육식을 하지 않기로 서원하고 17세에 도다이지 계단에 올랐다. 그는 지계를 강조한 스승 에이존(叡尊) 스님의 뜻에 따라 민중 구제 사업과 율종의 실천으로 평생을 보낸다. 그는 사회에서 소외되고 병든 자들을 치료하고 그들에게 수계를 주었으며 율종 교단의 확립에 헌신했다. 일본 최초로 불교 문화사를 다룬 ‘원형석서(元亨釋書)’에는 그의 자비행이 어느 정도였는지 확인할 수 있는 일화가 적혀 있다.

“그가 나라사카(奈良坂)에 있을 때였다. 어떤 문둥병자가 손발이 뒤틀려져서 구걸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여러 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였다. 그때 닌쇼는 사이다이지(西大寺)에 있었는데 그것을 불쌍하게 여겨 새벽이면 나라사카의 집으로 가서 문둥병자를 업고 저잣거리에 데려가서 두었다. 저녁이면 업고서 그 집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여러 해 동안 하였는데, 하루 걸러서 가되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거나 춥거나 덥거나 빠뜨린 적이 없었다. 문둥병자는 죽을 때 맹세했다. ‘나는 반드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스님의 종이 되어서 스님의 은덕을 갚겠습니다. 얼굴에 부스럼이 하나 있을 것이니, 이것이 신표입니다.’ 과연 닌쇼의 제자 가운데에 얼굴에 부스럼이 있는 자가 있어서 스님을 잘 봉양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문둥병자의 후신이라고 불렀다.”

그 결과 “동쪽 지방(關東)의 백성들은 바람에 풀이 눕듯 그를 따랐다”고 전해진다.

장대비가 쏟아진다. 하늘에 아직 시커먼 먹구름이 가득한 것을 보면 비는 쉽게 그칠 것 같지 않다. 폭우가 내리쳐도 길을 떠나야 하는 사람이 있다. 길을 나선 사람들은 쫙 펼 수도 없는 우산 하나에 의지에 폭우를 뚫고 앞으로 나아간다. 발은 이미 다 젖었고 다리와 옷과 어깨까지 젖었다. 얼굴 하나를 겨우 가릴 수 있는 우산이나 도롱이는 있으나마나다. 오늘 내린 비는 시간이 지나면 그치겠지만 인생에서 만나는 비는 언제쯤 그칠까. 그들의 앞날이 하늘의 먹구름처럼 어둡기만 하다.

안도 히로시게(安藤廣重,1797~1858)의 ‘아타케 대교(大橋)의 소나기’는 ‘명소 에도 100경(名所江戶百景)’에 실려 있는 우끼요에(浮世繪)다. 제목에서처럼 그는 에도의 명소 100곳을 지정해 채색판화로 남겼다. 안도 히로시게는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廣重)라고도 불린다. 그는 천재적인 작가 카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의 뒤를 이어 서정적인 풍경 판화를 많이 제작했다. 자연과 인간의 교감을 다룬 그의 채색 판화는 명소를 다녀오거나 동경한 사람들에게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당시 그는 최고의 인기화가였다. 그의 작품이 단지 여행지의 추억을 기념하는 용도로만 인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자연을 진지하게 관찰하고 이를 시적인 세계로까지 끌어올린 그의 작품을 보며 사람들은 자연과 인간의 위대함을 동시에 느꼈다. 그의 작품에는 자연과 교감하고 저항하지만 끝내 다시 화해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 담겨 있다.

우끼요에는 ‘덧없는 세상의 그림’ 혹은 ‘뜬구름 같은 세상의 그림’이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 ‘에도회(江戶繪)’라고 부르듯 에도시대(1603~1867)에 에도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발생한 그림이다. 에도는 일본의 수도였던 옛 도쿄(東京)를 가리킨다. 전국통일에 성공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천황이 있는 교토를 떠나 에도에 신도시를 건설했다. 신도시 건설의 주역은 사무라이 계급이었고 에도시민의 80퍼센트가 외지에서 온 독신남이었다. 척박한 땅 에도에는 남성위주의 문화가 발달되었다. 즉석음식이 개발되었고 가부키(歌舞伎)극장이 성행했으며 유곽 등의 향락문화가 자리 잡았다. 무로마찌시대까지 계속되던 내전과 천재지변으로 백성들의 삶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에도시대가 되어 사회는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이라면 덧없고 뜬구름 같은 인생을 괴로워하는 대신 마음껏 즐기며 살자는 생각이 팽배해 있었다. 이때 등장한 그림이 우끼요에다. 우끼요에는 유흥가와 유곽의 유녀 그리고 가부키 배우가 소재였다. 판화의 특성은 반복생산이 가능하다. 헛헛한 가슴을 가진 남자들을 겨냥한 강렬하면서도 유혹적인 배우 이미지가 마구 뿌려졌다. 가슴이 헛헛한 남자들은 요즘 젊은이들이 유명 배우의 사진을 가지고 다니듯 우끼요에 판화를 품고 다녔다. 토슈사이 샤라쿠(東洲齋寫樂), 카츠시카 호쿠사이, 안도 히로시게 등의 대가들은 이런 배경에서 탄생하게 되었다. 토슈사이 샤라쿠가 가부끼 배우만을 전문적으로 그린 것에 반해 카츠시카 호쿠사이와 안도 히로시게는 자연풍경의 아름다움에 주목했다. ‘아타케 대교의 소나기’도 그 중의 하나다.

세상에서 가장 아픈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아프다고 죽는 소리를 치는 사람이 아니다. 맨날 죽겠다고 엄살떠는 사람은 무시해도 된다. 차마 아프다는 말조차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픈 사람이 진짜 아픈 사람이다. 너무 아파서 신음소리조차 낼 힘이 없는 사람이 진짜 아픈 사람이다. 진짜 아픈 사람은 아프다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 아니 하지 못한다. 닌쇼 스님이 만난 한센병환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한센병은 문둥병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전생에 악업을 지어 그 벌로 문둥병에 걸렸다고 손가락질하며 무시했다. 천벌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몸이 아픈 것도 서러운데 사람들의 질타까지 감당해야 하는 문둥병 환자들은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온몸으로 비를 맞아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아파도 아프다는 신음소리조차 낼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사람이되 사람 노릇을 할 수 없는 천민 중의 천민이 문둥병 환자였다. 이런 문둥병 환자들을 보통 사람들과 똑같이 온전하게 대한 사람이 닌쇼 스님이었다. 그는 거지나 문둥병환자 등 버림받은 계급 사람들은 문수보살이 그런 모습으로 나툰 것이라 생각했다. 그에게 문둥병환자와 문수보살은 동일한 부처님이었다. 내가 행복할 권리가 있듯 그들도 나와 똑같이 행복해야 할 불성을 지닌 부처님이었다.

불교의 목표는 ‘일체중생의 이고득락(離苦得樂)과 상락아정(常樂我淨)’이다. 괴로움을 떠나 행복함을 얻는 것이고, 번뇌가 없는 청정한 덕에 이르는 것이다. 그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이 신해행증(信解行證)이다. 부처님의 법을 믿고 공부하고 그 법에 의지해 행을 닦아 마침내 과(果)를 증득하는 것이다. 백천만겁난조우한 부처님 법을 믿는 것은 큰 복이다. 그 복을 누리며 수승한 법을 공부할 수 있는 것은 더 큰 복이다. 그러나 이런 복도 행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말만 번지르르하고 행동은 전혀 따라주지 않는 사람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다. 절에 오래 다녔다고 전부 불보살이 아니듯 경전구절을 많이 외운다고 해서 참다운 불자가 아니다. 실천하는 사람이 진정한 불자다. 네 가지 덕목 중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으나 그 중에서 으뜸은 행(行)이다. 행은 실천이다. 말이 필요 없다. 묵묵히 실천하면 그만이다. 비증보살처럼 실천하는 것이다. 믿고 공부한 것을 실천하는 행이 뒤따라줄 때 불교의 목표는 저절로 증명이 된다. 어떤 목표인가. ‘일체중생’의 이고득락과 상락아정이다. 나 혼자만의 이고득락이 아니라 ‘일체중생’의 이고득락이다. 그래서 행이 필요하다. 너와 나는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이 암에 걸렸는데 나 혼자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아픔은 곧 나의 아픔이고 그의 고통은 곧 나의 고통이다. 그와 나는 분리될 수 없다. 닌쇼 스님의 행은 불이의 완성이자 동체대비 사상의 절정이다. 신해행증의 모범이다.

일본불교사를 공부할 때 니찌렌(日蓮,1222~1282) 스님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우리에게 ‘남묘호렝게교(南無妙法蓮華經)’로 잘 알려진 ‘법화경’을 절대 신봉한 스님이다. 일본불교사에 큰 족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다수의 신도를 거느린 종파이다. 이렇게 중요한 스님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제외하고 닌쇼 스님으로 일본 편을 마무리하는 것은 지면 관계상 다음 회에 만나게 될 스님을 빠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분은 닌쇼 스님과 함께 나의 삶의 척도이자 행동의 지침이며 내가 지향해야 할 삶의 모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온 몸으로 구현한 생불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 스님에 의해 비로소 마침표를 찍는다. 다음 회에 마지막으로 비증보살의 현현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323호 / 2015년 12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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