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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12연기-⑩ 취(取)

하나의 대상 향한 욕망에 떨어지지 못하는 상태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손에 잡은 것 놓지 못해
결국 잡히는 원숭이처럼
취착은 좋아하는 대상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무능력한 수동적인 마음

서양철학의 어법으로 말하자면, 촉(觸)이란 일종의 ‘종합’이다. 분석이 분해하고 나누어 핵심적인 요인을 찾는 것이라면, 종합은 분리된 것이나 떨어져 있는 것, 다른 것을 결합하여 ‘하나’로 묶는 것이다. 결합한다고는 했지만, 사실 이 결합이 꼭 의도적인 것이나 의식적인 것만은 아니다. 가령 어떤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귀의 ‘주인’인 내가 그 소리를 듣고자 하는 의도 이전에 발생하는 사건이다. 습관적으로 떠올리는 주어 ‘나’를 벗어나 말한다면, 어떤 주파수의 진동이 내 고막과 결합되는 사건이란 점에서 ‘수동적 종합’이다. 오케스트라의 소리라면, 그 소리 자체가 이미 수많은 악기소리들의 종합이다. 듣기 전에 이미 발생한 종합이고, 듣는 이와 무관하게 발생하는 종합이니 ‘자동적 종합’이라고 해도 좋겠다. 내가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듣는 것은 그렇게 자동적으로 종합된 소리를 듣는 또 한 번의 종합이다. 그런 소리를 듣기 위해 내가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이는 ‘능동적 종합’을 이런 종합 뒤에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애(愛)는 그렇게 종합된 것을 향한 마음이다. 종합을 통해 포착된 ‘대상’을 향해 쏠리듯 움직이는 힘과 의지고, 그것에 투여되는 에너지다. 물론 증은 그와 반대방향으로 향한 마음이다.

취(取)란 무언가를 가지려는 마음이다. 좋아하는 대상으로 달려간 마음이 그 대상에 달라붙는 것이고, 대상에 투여된 욕망이 좋아하는 대상 주변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취착(取着)이라고도 한다. 취가 착(着)인 것은 좋아하는 것을 가지려는 ‘능동적’ 마음에 그치지 않고 그것에 ‘달라붙어(着)’ 버린 마음이기 때문이다.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니 이 또한 ‘수동적인’ 마음이다. 떨어질 수 없다는 점에서 ‘무능력’의 표현인 이 마음이, ‘나’를 주어로 하는 가지려는 마음 밑에 숨어서 그 마음을 움직인다. 달라붙어 버렸기에 떨어지지 못하고, 그래서 다른 것으로 옮겨가지 못하게 한다. 새로운 종합은 중단된다. 취착이란 하나의 종합을 편집증적으로 반복하는 것이다. 착(着)은 취착에 포함된 욕망의 편집증적 투여를 표시하는 말이다.

손에 잡은 것을 놓지 못해 병에서 손을 빼지 못하고, 그로 인해 사냥꾼에게 잡히는 어리석은 원숭이 얘기는 차라리 쉬운 경우에 속한다. 어리석지 않은 원숭이라면 얼른 손을 뺄 수 있다고 할 수 있으니까. 문제는 취착의 욕망이 의식보다 일차적이고 강하다는 점이다. 가령 대부분의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에 사로잡히는 것이란 점에서 수동적 종합에서 시작한다. 얻을 수 없는 사랑 앞에서 ‘그럼 사랑하지 않겠어’라고 결심하며 거기서 벗어날 수 있다면, 사랑으로 고통 받는 이가 그리 많을 리 없다. 더한 것은 일방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그 사람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맴도는 스토커의 경우다. 스토커라고 비난을 받아도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최대치의 취착이 최대치의 무능력임을 보여주는 경우다. 자식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나를 따라다니며 달라붙어 있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자식의 욕망이라고 오인하며 자식의 삶에 부착시키는 식이기에 ‘능동적’인 것으로 오해되기 쉬운 ‘자식사랑’의 욕망도 실은 달라붙어 떨어지지 못하는 무능력한 취착이다. 이런 취착을 흔히 ‘집착’이라고 한다.

자식이든 ‘사랑하는’ 대상이든 이런 ‘종합’은 자신이 좋아하는 대로 이것과 저것을 결합하고자 하며 그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못 견딘다는 점에서 일방적 종합이다. 자식도 ‘사랑받는’ 이도 이런 종합을 견뎌내는 것은 지극히 고통스럽다. 자신의 의사와 무관한 종합이고, 자기 의사에 반하여 달라붙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반대방향의 힘을 발생시킨다. 애(愛)에 반하는 증(憎)을, 진심(嗔心)을 일으키고, 달라붙는 이를 밀쳐내려는 마음을 생산한다. 이는 달라붙으려는 이를 고통스럽게 한다. 방향은 반대지만, 고통스럽긴 양쪽 다 마찬가지일 게다. 그래도 눈치가 있어서 때에 따라 떨어질 줄 안다면 고통은 줄어들 것이다. 이처럼 떨어질 줄 아는 취착을 ‘애착’이라 한다. 애착은 무언가를 좋아하여 갖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대개는 갖고 있는 마음이다. 그러나 떨어져 있을 때도 마음이 사실은 거기에 쏠려 달라붙어 있다면, 이 차이는 본성의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에 불과할 것이다. 돈에 대한 애착, 가족에 대한 애착이 그렇다. 모두 오직 하나의 대상에 쏠려 있다는 점에서 욕망의 편집증적 투여라고 할 것이다. 이런 욕망 속에서 우리는 스토커의 병적인 집착과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고 해야 한다.

‘취착’이라고 할 때에도 흔히 취착하는 주어·주체를 상정하기 십상이다. 원숭이나 스토커가 취착의 주어이고 주체이다. 그러나 취착은 의식 이전의 욕망에 속하고, 그렇기에 의식을 가진 주체보다 앞서 움직인다. 취착이 ‘수동적’ 종합이라 함은 이런 뜻이다. 이 욕망 앞에서 의식은 무력하다. 그래서 자신이 욕망이 어떤 대상에 달라붙어 취착의 마음이 생겨버리면, 의식을 동원해 떼어내려 해도 잘 되지 않는다. 스토킹이나 자식에 대한 집착, 심지어 돈에 대한 욕망조차 ‘하지 말아야지’ 결심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프로이트는 어떤 대상에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사태를 ‘고착’이라고 명명한다. 이 고착은 ‘나’의 집착이기 이전에, 욕망의 흐름이 집중된 것으로부터 내가 떨어지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령 ‘항문기’의 욕망의 대상에 고착되어버리면, 성인이 되어도 욕망은 반복하여 고착된 대상으로 되돌아간다. 이로 인해 병적인 어떤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예컨대 프로이트는 돈에 대한 집착을 똥이라는 부분대상에 대한 고착된 욕망으로 설명하다. 항문기의 아이에게 똥은 자기 신체의 일부고 항문에 집중된 성감대를 자극하는 욕망의 대상이다. 똥을 싼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소중한 신체의 일부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대상에 고착되면 누구에게도 주지 않고 자신이 갖고 있고자 하게 된다. 똥처럼 돈 또한 그 자체론 아무런 사용가치가 없는 상품세계의 배설물이지만, 상품세계의 욕망을 자극하는 대상이다. 그래서 똥에 욕망이 고착된 아이는 돈에 집착하는 증상적 행태를 보이며 그 결과 돈에 모든 욕망을 투여하는 인색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구두쇠라는 주체는 자아 이전의 욕망이 어린 시절의 어떤 대상에 고착되어 형성된 결과물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취착에는 두 가지 다른 형태가 있다고 해야 한다. 자아 성립 이전의 고착에 의해 발생하는 취착과, 자아가 성립된 이후에 발생하는 취착이 그것이다. 후자는 자아의 판단에 의해 의식적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능동적이지만, 전자는 그것만으론 떨어지기 힘들다는 점에서 수동적이다. 하여, 무의식적 욕망의 고착이 발생하면 이는 의식으로도 어쩔 수 없는 병적인 집착으로 나타난다. 정도는 다르지만 모든 취착은 특정한 대상에 달라붙은 욕망이다. 그로 인해 생각도 행동도, 마음도 삶도 그 대상에 매이게 된다.

정착 또한 이런 취착과 관련하여 이해해야 한다. 여러 장소를 돌아다니며 사는 유목과 반대로, 정착이란 어딘가에 달라붙어 사는 것이다. ‘나’의 땅, ‘나’의 집, ‘나’의 영토, ‘나’의 전공, ‘나’의 권한 등 ‘나의 것’을 소유하고, 그 소유물에 기대어 사는 것이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다고 믿지만(我所相) 사실은 그 소유물에 붙어서 사는 것이고 그 소유물에 갇혀서 사는 것이다. 그래서 삶도 행동도, 심지어 생각도 그 영토에 갇혀서 벗어나지 못한다. 습관이나 버릇처럼, 익숙한 것에 달라붙어 하는 생각이나 행동도 이런 정착의 한 양상이다. 이것이 몸에 배면 떨어질 줄 모르는 수동적 종합이 되고 만다. 이런 ‘아소상(我所相)’이 형성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가섭 스님은 참선을 할 때도 한 자리에 3일 이상 앉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는 정착에 포함된 취착의 힘을 잘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불교의 가르침이 미시적 차원에서조차 정착적인 것과 반하는 방향을 향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조주 스님이 80이 될 때까지 세간을 행각하며 돌아다닌 것 또한 이런 가르침을 몸소 행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정착에서 벗어난다 함은 단지 자리를 옮겨 다니는 이동을 뜻하는 건 아니다. 어디를 가도 마음이 오직 하나 가족에 달라붙어 있다면, 그건 이동하는 정착이요 취착이라 해야 하니까. 진정한 유목이란 같은 자리에 앉아서도 다른 사고나 행동을 향해 마음이 열려 있음을 뜻하며, 소유물을 다룰 때에도 그 소유물에 달라붙지 않은 채 행동할 수 있어야 함을 뜻한다. 그렇게 될 경우 한 자리에 며칠 앉아 있는가는 실질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달마대사처럼 9년을 한 자리에서 면벽하고서도, 마음이 어디에도 달라붙지 않고 자유로이 움직인다면, 앉은 채 유목을 한다고 할 만하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낸다”(應無所住 而生其心)이라는 유명한 명구가 가르치는 것도 이것일 게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323호 / 2015년 12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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