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3. 건설적인 미술사 논쟁을 위하여〈끝〉

문헌 고증에 묶인 인문학에게 상상의 자유 돌려주길

▲ 623년 쇼토쿠 태자를 위해 조성되었다고 하는 내용이 담긴 일본 호류지 금당 석가삼존상의 광배명문. 그러나 이는 후대에 따로 새겨졌다는 해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의 기록이라는 해석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는 문제의 기록이다.

미술사는 미술작품을 다루는 학문이다. 거기에는 미적취향, 감수성과 같은 주관적 요소가 개입되기 마련이다. 때문에 미술사를 엄밀하고 객관적인 학문으로 만들기 위해 미술사 연구자들은 많은 노력을 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 미술이라고 하는 지극히 주관적인 영역으로 보이는 대상을 다루는 학문이니만큼 그 객관성을 비판받는 경우가 많다. 그 비판의 요점을 쉽게 표현하자면 “미술사란 어차피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학문 아닌가?” 하는 것이다.

지나친 문헌 확실성 강요가 
인문학 전반에 문제 일으켜

학문 논쟁은 이론·해석 싸움
주장·반박·보완 이어질 때
건설적 논쟁과 학문 발전 가능


특히 미술작품에 접근하는데 있어 문헌사료에 의존하는 경향이 많은 탓에 미술사는 대개 역사학의 범주에 포함된다. 종종 미술사학자들은 명확한 문헌사료가 없이는 스스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애틋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역사학자들은 미술사학자들의 사료인용이 잘 못 되었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럴수록 미술사학자는 더욱 정교한 사료인용에 매달리고, 그 바람에 미술사는 미술사 고유의 역할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작품이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편년하거나, 그 작품이 진작인가 위작인가를 판단하는 일들은 문헌사료를 뒤진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점차 이러한 연구들은 마치 미술사학자들이 하는 일이 아니라, 보존처리자, 혹은 골동품상이 해야하는 일처럼 간주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편년의 문제를 보자. 미술사란 학문은 작품을 그것이 만들어진 시대적 배경 속에서 해석하는 학문이기에 일단 작품을 특정 시대에 자리매김해야한다. 그것이 편년이다. 그렇다면 연구자들은 어떻게 작품을 특정 시대에 자리매김하는가? 이상적인 상황은 작품에 명문이 있는 경우이다. 때로는 명문이 후대에 쓰여진 것이 아닌가 의심을 받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그래도 가장 확실하고 보편적인 편년의 기준이 된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미술사의 방법론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저 명문에 의존하는 것은 그것이 길거나 짧거나 간에 문헌이라는 점에서 역사학의 방법론에 속한다. 그마저도 한국의 고대 불교미술작품에서 명문이 남아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명문이 있는 작품들을 시대순으로 열지우고 이들의 양식적 특징과 비교하면서 기록이 없는 작품들을 기준작과 기준작의 사이 어디 즈음에 위치시키게 되는데, 이때 미술사만의 판단력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 ‘삼국유사’와 같은 문헌사료나 불교경전이 보조적인 자료가 되기는 하지만, 역시 최종적인 결정은 미술사학자의 안목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 경주 남산 장창곡에서 발견된 석조삼존불. 명문은 없지만, ‘삼국유사-생의사석미륵’에 등장하는 삼화령 불상으로 추정되어 선덕여왕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국 미술사의 토대를 닦은 선학들은 아직 체계가 완전히 갖추어져 있지 않았던 탓에, 그리고 너무나 조사된 것이 없었던 탓에 직접 유물을 만지고, 움직이고, 바로 눈앞에서 보며 연구할 수 있었던 분들이다. 그러나 지금은 세분화되고 영역이 구분되면서 직접 유물을 만질 수 있는 연구자는 거의 없다. 필자가 알기로는 박물관 학예사조차도 마음껏 유물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때문인지 미술사 연구자들은 점차 작품을 보는 시간보다 문헌을 뒤지고 있는 시간이 더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과연 문헌은 우리에게 확실성을 줄 수 있을까? 사실상 미술작품에 대해 문헌이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며, 그나마 상세히 언급하는 경우는 더더욱 드물다. 때문에 미술사학들이 인용하는 문헌의 내용이라는 것도 대부분 간접적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사 연구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논지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을만한 문헌을 탐색하고 인용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러나 만약 문헌이 그렇게도 확실하다면 그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논쟁이 없어야 한다. 실제 그런가? 아니다. 문헌을 다루는 역사학자들도 문헌의 내용을 두고 다양한 견해를 보인다. 바로 그 점을 인정하기에 근래 국정교과서 추진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다양한 견해가 공존해야 한다며 들고 일어난 것이다(하지만 평소 다른 연구자의 견해에 인색했던 학계의 풍도도 국정교과서와 같은 아이디어가 자라나는데 일정부분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듯하다). 따라서 미술사연구자들이 확실성의 담보로 생각하는 문헌사료조차도 어떻게 해석해야하는가에 따라 다양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미술사학자들이 인용해야하는 문헌사료에 대해 스스로 역사학자 수준의 검증을 시도해야한다면, 도대체 작품은 언제 연구한단 말인가? 그야말로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다 가랑이가 찢어지는 형상이 될 판이다.

결국 문제는 인문학에 대해 지나치게 확실성을 강요하는 것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는 미술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시대 인문학의 문제이다. 인문학이 거의 ‘교양’과 동일어가 되어가는 듯한 상황에서 우리는 이제 그 공허한 ‘확실성’에 대해 반성할 필요가 있다. ‘멋진 신세계’로 잘 알려진 앨더스 헉슬리(Aldous Huxley, 1894~1963)는 ‘천재와 여신(The Genius And The Goddess)’에서 “소설의 문제점은 그것이 너무나 논리적이라는 것이다. 반면 현실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고 했다. 학자들은 까마득한 과거에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하지만,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는 확실한 답을 내어놓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학을 “확실하게” 만들려고 몰아부치는 시도가 점차 인문학을 죽이고 있으며, 인문학 수요자의 욕구를 자극하지 못하는 것이다.

▲ 구례 화엄사 천왕문의 북방다문천. 조선시대에는 비파를 든 천왕이 북방다문천이었음이 밝혀졌다.

언젠가 미술사에서 과연 확실한 것이 있는가 다른 연구자들과 논쟁을 벌인 일이 있다. 그때 한 사람이 “사천왕 중에 북방다문천이 탑을 든 것은 경전에도 나오는 확실한 사실이다” 했지만, 그 연구자의 확실성도 얼마 지나지 않아 깨어지고 말았다. 조선시대에는 비파를 든 천왕이 북방다문천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인문학의 매력은 무엇인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려야하는 무수한 판단은 확실성 속에서 내리는 것이 아니라 늘 불확실성 속에서 이루어진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을 확실한 상황 하에서 판단을 내리는 교육만 학교에서 받으면 현실에 나와서는 아무런 판단도 내릴 수 없다. 때문에 인문학은 사회적 문제해결에 실질적 도움이 되지 않으며 공허하다고 비판하게 된다.

주관적이라고 치부하는 작품이 건네는 말은 오히려 현실이 우리에게 주는 불확실한 정보와 닮았다. 때로는 주관적으로 쓰여진 글보다 눈에 보이는 실재가 차라리 더 현실적이고 객관적이다. 그 불확실하다는 정보들을 끼워 맞춰가면서 점차 큰 그림이 그려지면 사람들은 나름대로 정보를 분석하고 종합해 하나의 해석모델을 만들어내게 된다. 그리고 새로운 정보가 주어지면 다시 모델을 수정하고, 통합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때문에 그 모델은 항상 확장가능한 형태로 유동적이어야 한다. 이렇게 확실성이나 정답을 요구하는 인문학이 아니라 상상력에 의해 모델을 만들어나가는 인문학으로 돌아가야 한다.

물론 궁극에는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 문헌사료와의 비교도 중요한 검증의 한 방법이다. 다만 그것은 검증의 한 방법일 뿐, 미술사적 논리의 유일한 기초는 아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검증은 내적 논리이다. 논리는 문헌을 초월하여 보다 보편적이다. 보편적이기 때문에 여러 작품에 두루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어떤 해석이든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중에서 좋은 해석과 나쁜 해석을 구분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의 작품에만 적용될 수 있는 해석인가, 아니면 여러 정황을 두루 설명할 수 있는 해석인가의 차이이다.

▲ 사천왕도 아니고, 팔부중도 아닌 사천왕사지 신장상에 대해 다양한 대안적 해석이 제기되었다.

사천왕사에서 출토된 소조상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어떤 해석은 오로지 사천왕사에서의 현상만 설명할 수 있는 반면, 다른 해석은 사천왕사의 복잡한 상황을 통해 시대적인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확장된 해석을 제시하기도 한다. 물론 현실에서는 오로지 한 장소에서만 유효한 이론이 존재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학문이 요구하는 것은 실제 그러했는가 아닌가의 결론보다는 보편적으로 다양한 현상을 해석할 수 있는 인식의 틀과 도구(tool)일 뿐이다.

인문학이 엄밀성을 위해 그토록 닮고자 하는 과학조차 ‘불확정성의 원리’를 통해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자연보다도 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간을 연구하면서, 나아가 그 인간의 가장 주관적인 부분인 예술성을 연구하면서, 미술사의 상상력은 문헌 아래에 묶여버리고 말았다. 지난 1년간 연재를 통해 불교미술사의 쟁점들을 다루고 다양한 견해를 소개한 것은 특정 견해의 편을 들고 옳고 그름을 가리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 그저 논쟁은 그 자체로 아름답기 때문이었다. 논쟁은 일단 주장이 있어야 가능하고, 그런 주장을 내세울 수 있다는 것은 기존의 틀을 벗어나 상상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래는 주장은 사라지고 다만 작품에 해당하는 문헌을 찾아 연결시키는 연구가 대세를 이루다보니 반론을 제기할 필요도, 이유도 사라지는 듯하다.

논쟁이 없이는 학문의 발전도 없다. 정치가 사람의 대결이 아니라 공약의 대결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학문적 논쟁도 파벌의 싸움이 아니라 이론과 해석의 싸움이어야 한다. 나아가 어차피 불확실한 상황에서 나만의 확실성으로 상대방의 확실성을 재단하기 보다는, 상대방이 주장하는 해석모델이 설명해주지 못하는 현상이 무엇인지 지적해주고, 그에 대한 보완이 이루어지고, 다시 그 대답을 듣는 것으로서 논쟁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야말로 건설적인 논쟁이 될 것이다.

더불어 미술사 연구자가 아닌 일반 독자께서도 어느 누구의 견해가 옳은지 굳이 결정하시기 보다는, 과거의 유산 앞에서 기꺼이 자신만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펼쳐보시길 권해드리고 싶다. 학자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자신의 생각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다만 자신의 상상을 적용할 수 있는 다른 작품을 찾아보려는 집요함이다. 연재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작품 하나하나에 이미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그 다양한 해석의 식탁에 독자의 숟가락이 하나 더 얹힌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다.

그간 ‘쟁점 한국불교미술사’ 연재를 읽어주신 독자제위께 심심한 감사를 드리며,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주제로 새해에 다시 인사를 올리고자 한다. 아무쪼록 현실세계에서만은 쟁점없이 순탄한 연말을 보내시길 아울러 기원드린다.

주수완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indijoo@hanmail.net

  [1323호 / 2015년 12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