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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12연기-⑪ 유(有)·생(生)·노사(老死)〈끝〉

끊임없이 생멸하기에 ‘나’는 ‘나’가 아니다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어떤 대상에 달라붙어 자신의 것으로 취하려 하는 욕망은 무상(無常)과의 대결이라는 필패의 싸움을 해야 한다. 자신이 달라붙어 있는 것이 무상하게 변한다면, 달라붙어 있는 채 잃어버리고, 달라붙은 채 떠나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무상은 어떤 대상에 취착하여 달라붙어 있는 것을 의미 없게 만든다. 무상에서 허탈함을 느끼는 것(‘인생무상!’)은 이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취착하는 마음은 자신이 달라붙어 있는 것이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있어’주기를 욕망하게 된다. 취착을 조건으로 유가 생겨난다는 말은 이런 의미일 것이다. 그런 유가 생하고 멸한다고 보게 된다.

주민등록증 사진의 나 보면
어색함이 느껴지는 것처럼
‘나’의 존재도 매순간 변화
영원성에 집착하면 고통 뿐

사실 무상한 생멸의 변화만이 있는 것이고, 유란 그것의 한 순간을 억지로 멈추어 세운 상태다. 그러나 유에 달라붙은 취착의 마음은 이를 뒤집어 이해한다. 저기 있는 것이 변화고 소멸하는 것이라고. 저기 있기에 갖고자 하는 것이고, 여기 있기에 줄 수도 있는 것이라고. 있지도 않은 것을 어찌 가질 수 있으며, 있지도 않은 것에 어찌 달라붙을 수 있겠느냐고. 무상한 생멸은 이 경우 고통이 된다. 내 손에 있던 돈이 빠져나가 없어져 버리는 것처럼 돈에 달라붙은 마음에 고통스런 건 없다. 내가 사랑하던 모습 그대로 영원히 있어주기를 바라건만, 그렇게 되지 않으니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변심한 사람을 비난하기도 하고, 변심하지 않도록 붙들려고 하며, 심하면 변심해도 떠나갈 수 없도록 이리저리 얽어매기도 한다. 오토모 가츠히로의 애니메이션 ‘메모리스’에선 변심한 애인이 떠나버리는 걸 막고 사랑의 기억을 영원히 아름다운 상태로 봉인해두기 위해 차라리 죽여 버리길 선택한 여인의 얘기가 나온다. 영원성에 대한 찬양은 변화하는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이 뱉어낸 고통스런 한탄의 음각화(negative picture)다.

‘나’ 자신에 대한 생각 또한 마찬가지다. ‘나’라는 존재가 ‘있고’, 그렇게 ‘있는’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고 소유하는 거라고 믿는다. 그런 ‘나’가 있게 되는 순간이 탄생이고, 그 ‘나’가 늙고 죽어가는 것이라고. 여기서도 사고는 ‘있음(有)’에서 ‘생멸(生)’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나’라고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단 한 순간도 동일한 ‘나’는 없다. 우리 신체의 세포는 3개월 정도 지나면 모두 다른 세포로 대체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의 신체는 새 세포들이 태어나고 오래된 세포들이 죽는 생멸의 과정 속에 있다. ‘나’가 ‘나’임을 증명하는 주민등록증 사진을 보며 느끼는 어색함이야말로 ‘나’가 ‘나’ 아님을 증명해주는 사례 아닌가!
실상은 생멸하는 신체가 있는 것이고, 그 신체가 갖는 유사성이나 연속성을 통해 ‘나’라는 존재에 동일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곤 ‘유’인 ‘나’가 태어나고(생) 늙어가며 죽는(노사)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유(有)에서 생(生)으로, 노사(老死)로 나아가는 이런 사고는 본말과 전후가 뒤집힌 ‘전도몽상(顚倒夢想)’이다. 이 또한 고통을 낳는다. 동일하다고 믿기에 계속 동일하게 있어주면 좋을 텐데, 실상은 그렇지 않고 늙어가고 죽어가니 괴로운 것이다. 즉 무상이 고통의 이유가 되는 것은 동일성에 대한 취착 때문이다. 동일성에 대한 애착이 클수록 변해가고 늙어가는 것에 대한 고통도 크게 마련이다.

취착하는 마음은 생멸하는 변화만이 있음을 인정하지 못한다. 있다고 보이는 것에 집착하여 존재를 지속하는 ‘유’라는 관념을 만들어낸다. 그래도 부정할 수 없는 생멸은 그런 유가 달라져가는 것으로 간주된다. ‘있음(有)’의 확고함을 확인하여 출발점으로 삼는 철학적 관념이 흔한 것을 보면, 취착의 마음이 흔히 집착이나 고착, 혹은 애착이라는 이름으로 문제 삼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가령 데카르트는 내가 없다면 생각하는 게 어떻게 가능하겠느냐며 나의 ‘존재’를 확고한 지식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헤겔은 그의 ‘논리학’을 ‘유’로 시작한다. 그리고 ‘무’를 거쳐 ‘생성(生)’으로 나아간다. 이는 앞서 전도망상의 논리를 잘 보여주니, 좀 더 살펴보는 것도 좋겠다.

헤겔이 출발점으로 삼는 유는 ‘있음’ 말고는 다른 아무런 규정도 없는 상태다. ‘있다’는 것 말고는 아무 규정이 ‘없으니’, 이는 곧 ‘무(無)’라고 말한다. 유가 바로 무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유와 무는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즉 ‘유’ 속에 ‘무’가 있고, ‘무’ 속에 ‘유’가 있는 것이다. 좋다, 이 정도야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이로부터 양자의 진리는 유가 무로, 무가 유로 소멸되는 운동에 있다고 하면서, 이를 ‘생성’이라고 명명한다. 즉 유에서 무로, 그 다음에 생성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여기에선 뭔가 속은 느낌이 든다. 유에 아무 내용(규정)이 없어서 ‘무’라고 했으니, 이는 정의상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유가 무로 소멸해가고 말고 할 게 없다. 그 자체가 무이기에 이미 그 자체로 무인 유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소멸도, 생성도 있을 수 없다. 텅 빈 ‘유’란 개념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유가 무로 소멸한다거나 무가 유로 생성되어 간다거나 하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전에 말했던 ‘문법의 환상’ 때문이다. 두 단어가 정반대 의미를 갖기에 하나가 다른 것이 ‘된다’고 말해도 될 것 같은 환상.

사실 헤겔은 생멸의 운동을 ‘논리학’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래서 흔히 변증법을 생성의 논리학, 변화의 논리학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그 생멸의 운동을 ‘유’로부터 끄집어내기 위해 이런 억지 춘향 식의 논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유’가 가장 일차적이며, 모든 것은 그 ‘유’로부터 나온다는 생각은 뭔가가 ‘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는 통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순수 유가 아무 내용이 없다는 점에서 순수 무라면, 거기선 어떤 생멸도 나오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개념에서 생멸의 사건이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 따라서 유에서 무로, 무에서 유로 가는 운동은 그가 말한 유나 무 개념에선 나오지 않는다(따라서 무는 공과 다르다. 공은 수많은 규정가능성으로 충만한 무규정성이지 텅 빈 무가 아니다). 그런데도 그 말이 그럴듯하게 들리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생멸의 운동이 있음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매일 보는 게 생성과 소멸의 운동이니까, 그런 게 있다는 말을 ‘맞아, 당연하지’라고 수긍하는 것이다.

사실 생멸하지 않는 것은 없다. 생멸하는 것만이 존재하니, 모든 존재는 생멸이라고 해야 한다. 생멸이란 무엇인가? 있던 것이 없어지고 없던 것이 나타나는 것이다. 즉 유가 무로 되고, 무가 유로 되는 운동이다. 여기서 유와 무는 생멸이라는 현상의 두 극단을 표시하는 개념일 뿐이며, 생멸과 무관하게 존재하지 못하는, 그저 생멸을 운동을 서술하기 위한 ‘말’일 뿐이다. 따라서 생성의 논리란 헤겔 말처럼 ‘유→무→생멸’이 아니라 ‘생멸→유무’로 되돌려놓음으로써 시작해야 한다. 아무런 규정을 갖지 않는 순수 유는 없다. 생멸하는 것의 어떤 한 상태를 ‘유’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흔히 말하는 ‘유’란 이미 모두 생멸하는 것이고, 그 자체에 이미 유와 무를 비롯해 수많은 규정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무명에서 시작해 노사로 끝나는 12연기는 무상한 세계의 실상에서 시작해 그 무상한 세계를 ‘노사’라는 상실의 고통으로 느끼게 되는 과정에 대한 해명이다. 거기서 우리는 살고자 하는 의지(行)의 작용에서 시작되는, 살고자 하는 생명의 노력이 만드는 다층적인 시도들이 애와 취착을 거쳐 확고한 ‘유’를 거쳐 그것의 소멸로 끝나는 과정을 본다. 표면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 과정 전체를 진행시키는 것은 생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카오스 같은 무명 속에서 살고자 하는 의지, 존재를 지속하고자 하는 의지가 행(行)이라면, 이 행의 개념에는 이미 생명의 개념이 함축되어 있는 셈이다. 행을 조건으로 하는 식도, 나와 외부를 구별하는 식이 산출하는 명색도, 나라고 불리는 유기체의 식별작용을 뜻하는 6처도 모두 생명체와 결부된 것이다. 그렇기에 모든 만남이 야기하는 촉발에서 발생하는 쾌감과 불쾌감, 기쁨과 슬픔은 생명력의 증감을 표시하는 현상이다. 이는 좀 더 나은 상태로 살기 위해 이후 어떻게 행동하는 게 좋은지를 판단하게 하는 작용이면서, 동시에 사건 이전에 미리 준비된 선판단이란 점에서 오류나 ‘무지’의 요소를 포함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12연기의 전반부는 생명체가 생명을 지속하기 위해 발생하는 ‘자연적인’ 과정을 다루고 있다 할 것이다. 물론 그 자연적인 과정은 수많은 무지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무한속도의 무상한 변화를 뜻하기에 무명은 인식능력이 따라갈 수 없는 불가능성을 내포하며, ‘근본 무명’이란 이런 점에서 이 근본적인 무지의 필연성을 뜻한다고 할 것이다. 무명 앞에서의 행은 살아남기 위한 맹목적인 의지의 발동으로 시작하며, 이는 무상의 속도를 감속시켜 판단의 자원을 얻는 식별작용의 무지를, 실은 생존에 필요하고 유용하다는 점에서 피할 수 없는 무지를 낳는다. 내외를 구별하고, 나와 대상을, 신체와 정신을 구별하는 작용이 반복되면서 내외를 가르고 나와 대상을 분할하는 경계선을 실체화하는 것 또한 유용하지만 불가피한 무지의 일종이다. 접촉과 촉발에 따른 감수작용은 자신의 생명의 지속에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하며 좀 더 나은 인식과 행동을 준비하게 하지만, 실제 사태와 무관하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하게 된다는 것은 실제 사건 발생 이전에 판단을 내리는 또 다른 무지를 준비하는 셈이 된다.

하지만 여기까지의 무지는 무상한 세계에서, 좀 더 나은 방식으로 생존을 지속하기 위해 피할 수 없는 유용한 무지고, 바로 그렇기에 사실 누구도 벗어나기 힘든 무지다. 이러한 무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자신의 판단이 아무리 훌륭한 근거와 이유를 갖는 것이라고 해도 무상 앞의 무지일 수 있음을 알고, 실제 발생한 사건 앞에서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방식으로 무명의 불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무한속도의 무상한 카오스로 다시 접근하기 위해 갖고 있던 지식의 커튼을 찢을 줄 알아야 한다. 지혜가 지식이나 인식을 견지하는 게 아니라 실상이 그것과 다를 수 있음에 눈을 돌리는 것이고, ‘정견’이 옳다고 믿는 견해를 견지하는 게 아니라 아무리 옳다고 생각되는 것조차 실상 앞에서 내려놓을 줄 아는 것이라 함은 이 때문이다.

무명에 대처하며 얻은 지식이나 인식, 판단이 필연적 무지를 포함하고 있음을 보는 것과 반대로, 그런 지식이나 인식을 다가오는 사건들에 덮어씌우며 판단하게 될 때, 무명의 카오스에 기인하는 이 근본적 무지와 다른 차원의 무지가 발생한다. 접촉과 촉발이 야기한 감수작용에 애증의 마음을 더하여, 좋아하는 것을 당기고 가지려는 마음(貪心)이나 싫어하는 것을 밀쳐내려는 마음(嗔心)이 작용하기 시작할 때가 바로 그것이다. 호오의 분별을 하며 얻은 관념들을 언제나 옳다고 믿는 어리석음(癡心) 또한 여기에 추가되어야 한다. 이로써 또 다른 차원의 고통을 야기하는 세 가지 독(毒)이 우리의 삶에 침투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애(愛)로부터 이어지는 12연기의 후반부는 생명체의 ‘자연적인’ 의지를 뜻하는 욕망(欲)의 과정과 달리, 그 욕망에 애증과 분별의 마음이 더해진 ‘작위적인’ 욕심(慾)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런 애증의 마음이 애증의 대상에 달라붙는 취착의 마음으로 이어지면, 싫어함은 물론 좋아함의 마음조차 애착이나 집착, 혹은 고착이라고 불리는 불행을 산출하게 된다. 취착 뒤에 오는 ‘유’는 취착의 마음이 생멸하는 변화를 작위로 멈추어 얻은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함이 틀림없다’는 동어반복을 기초로 모든 것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범주로 바꾼 것이 ‘유’라는 관념이다. 유란 세상의 실체를 실체이게 해주는 것(실체subsistance란 변화의 근저sub에 변함없이 존속sister하는 것이란 뜻이다)이며 그런 만큼 모든 것의 출발점이 된다는 오인이야말로, 불변의 확고함을 찾는 모든 철학적 시도의 요체인 셈이다.

‘유’를 조건으로 ‘생’이 있다 함은, 이런 ‘유’라는 관념으로부터 ‘생’을, 생성과 생멸을 도출하는 것이고, ‘유’를 기초로 ‘생’을 말하는 것이다. ‘유’가 탄생하고 생성, 소멸한다는 식의 생각이 그것이다. 생멸하는 것의 어느 한 순간을 억지로 멈춘 것이 ‘유’이건만, ‘유’가 있고 그것이 생멸한다고 뒤집어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유에서 생으로 가는 오인은 보편적 범주가 되었기에, 애증 이전에 발생한 자연적 과정에 대해서도 보편화되며 적용된다. 그로 인해 이제 무명과 행, 무상과 인식의 관계 등 모든 것이 본말과 전후가 뒤집힌 몽상 속에 갇히게 된다.

있음과 없음을 대립시키고 생성을 존재에 복속시키는 이 전도(顚倒)된 관념 속에서 생에 집착하고 노사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아니, 가장 일차적인 취착이라 해야 할 그 두려워하는 마음이 전도된 관념을 만들어낸 것이다. 무상세계의 실상인 생성이란 사실 생과 사가, 탄생과 소멸이 매순간 함께 하는 과정이다. 아이의 성장도, 성인의 늙음도 새로운 세포의 탄생과 오래된 세포의 죽음이 동시에 진행되는 과정인 것처럼. 그러나 생성 이전의 근원적 자리에 자리 잡은 ‘유’·‘무’의 관념은 생과 사는 유의 ‘시작’과 ‘끝’이라는 상반되는 지점으로 간주하게 한다. 이로써 생명을 지속하는 자연적인 과정인 생명은 죽음을 물리치고 죽음에 저항하며 ‘유’의 상태를 유지하는 과정으로 전도된다. 19세기 유명한 의사인 비샤는 이렇게 말했다. “생명이란 죽음에 저항하는 힘이다.”

탐진의 마음, 취착의 마음이 야기한 이런 생각 안에서 생(生)이란 오래도록 갖고자 하지만 결코 가질 수 없는 대상이 되고, 죽음이란 밀쳐내고자 하지만 결코 밀쳐낼 수 없는 대상이 된다. 이런 마음 안에서 생이란 본질적으로 죽음을 향한 과정이란 의미에서 ‘노사(老死)’를 뜻하는 것이 된다. 좋아하는 모든 것이 소멸되는, 가장 두렵고 싫어하는 귀착점인 죽음의 공포, 그 공포로 인한 고통들이 모든 생의 순간들을 채우게 된다. 그리고 그런 한에서 생이란 고통으로 가득 찬 것이 된다.

이런 점에서 ‘노사’의 관념은 접촉과 촉발의 자연학적 반응에 애증의 마음을 덧붙이기 시작하며 출현한 새로운 차원의 고통이 집약되는 최고의 고통이고, 그 모든 생의 고통을 만들어내는 본원적 고통이다. 어쩌면 생명을 지속하고자 하는 본능에 기인하는 고통이라 하겠지만, 그것은 사실 살아있음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음을, 그렇기에 탄생마저 고통으로 느끼게 하는 전도된 망상 속에서 오는 것이다.

반면 생성의 과정 가운데 선택된 하나의 우연적 만남이 유라고 명명된 것임을 안다면, 거꾸로 그렇게 무언가 만나서 함께 하고 있는 우연적인 순간순간이야말로 우리 생의 전체고, 우리의 생을 직조하는 것임을 기쁘게 긍정할 수 있지 않을까? 모든 것이 변하며 떠나가는 것임을 안다면, 아직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을 행운으로 긍정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변하여 떠나가는 것조차 새로운 ‘종합’, 새로운 생성의 기회로 긍정할 수 있게 되는 게 아닐까? 오는 것과 가는 것, 머물러 있는 것 모두를 “있는 그대로(如如)” 긍정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여래(如來)’라는 말이 연기법을 깨닫고 연기적으로 오고 가는 모든 것을 선물로 긍정하는 이를 뜻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일 것이다. 이 경우 무상한 세계 자체는 고통의 연속이 아니라 기쁨의 연속체가 될 것이다. 윤회하는 생 그 자체가 해탈이고, 중생들이 사는 세계 그 자체가 바로 극락이 된다는 것은 이런 의미 아닐까?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324호 / 2015년 12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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