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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정토문과 참선문 〈끝〉

기자명 이제열

염불은 상근기 하근기 차별을 두지 않는다

▲ 금선묘 불화 ‘아미타삼존도’.

불교의 목적은 성불에 있다. 성불은 깨달음과 열반과 해탈을 수반한다. 깨달음은 중생의 근원적인 어리석음이 사라진 것이고 열반은 갈애와 집착이 사라진 것이며 해탈은 생로병사를 비롯한 일체의 괴로움이 사라진 것이다. 우리가 중생 놀음을 끝내고 성불하려는 이유는 결국 이를 성취하기 위해서다. 정토경은 성불의 길로 아마타불이 세운 극락세계에 나기를 발원하고 일심으로 아미타불을 부를 것을 제시한다. 중생이 극락세계에 태어나고자 오로지 아미타불을 부르면 그 중생이 일으킨 정토왕생원과 중생을 정토에 나게 하려는 아미타불의 본원이 하나가 되어 마침내 성불하게 된다. 여기서 성불한다는 것은 중생이 곧 아미타불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미타불을 부르는 자와 듣는 자가 필경에 없어져 한 몸을 이룬다. 염불이 아닌 참선을 하고 다라니를 외우고 간경을 해도 그 얻어지는 바는 아미타불의 경계이다. 선종의 목적인 견성은 실상에 있어 아미타불을 자신의 마음에서 친견하는 것이며 이 세계가 곧 아미타불의 극락임을 아는데 있다.

참선 통한 견성의 실상은
아미타불을 친견하는 것

선종의 위대한 조사들도
참선과 염불을 함께 권장

과거로부터 불교수행을 논함에 있어 참선에 비해 염불을 낮은 근기의 수행법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염불로는 견성성불하기 어려우므로 오로지 참선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불교수행의 이치를 등진 매우 편협한 사고임이 분명하다. 중국선종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육조혜능 대사의 ‘선정쌍수집요’를 보면 “염불에 무슨 이익이 있느냐?”는 물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무아미타불하고 염불하는 한 구절이야말로 만세의 티끌을 뛰어넘는 묘한 길이며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는 정당한 원인이다. 삼계와 천상, 그리고 인간의 바른 눈이며 마음을 밝히고 성품을 보는 지혜등불이고 지옥을 깨뜨리는 용맹한 장수이며 삿된 무리를 베는 보검이다. 또한 오천대장경의 골수이며 팔만다라니의 중요한 문이고 암흑을 여의는 등불이며 생사를 벗어나는 좋은 방법이다. 능히 괴로움의 바다를 건너는 배이며 삼계를 뛰어넘는 지름길이요, 가장 크게 중하고 가장 높은 묘한 문이며 한량없고 그지없는 공덕이니라. 이 한 구절을 생각하여 생각마다 앞에 나타내고 늘 마음에서 떠나지 않으며 일 없을 때에도 염하고 일 있을 때에도 염하며 살았을 적에도 이렇게 염하고 죽을 적에도 이렇게 염하며 한결같은 생각이 분명하면 무엇을 다시 남에게 물어서 갈 길을 찾겠는가? 오로지 아미타불을 염불하고 다른 생각이 없으면 손가락 튕길 수고도 없이 곧장 서방극락세계로 왕생하리라.”

또한 당나라 말기의 최고의 선사로 추앙받는 영명연수 선사는 설혹 참선을 하여 견성을 했다하더라도 다시 염불을 하여 이루지 못한 나머지 일들을 완성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영명선사가 염불에 관해 네 가지 게송으로 설한 사료간(四料簡)을 보면 염불이 수행자들에게도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첫 번째, 참선수행도 있고 염불공덕이 같이 있다면 마치 이마에 뿔이 달린 호랑이와 같아서 현세에는 모든 인간의 스승이 되고 장래에는 부처나 조사가 될 것이로다. 두 번째, 참선수행은 없어도 염불공덕이 있다면 모두 왕생하리니, 다만 아미타부처님을 뵈옵게 되면 어찌 깨닫지 못할까 근심할 것인가. 세 번째, 참선수행만 있고 염불공덕이 없다면 열사람 중에 아홉은 비껴가리니 중음의 경계가 눈앞에 나타나면 미혹하여 그 경계를 따르고 만다. 네 번째, 참선수행도 없고 염불공덕마저 없으면 지옥의 쇠침대와 구리기둥을 껴안고서 만겁이 지나고 천생을 거치도록 믿고 의지할 사람 하나도 없으리라.

이 내용을 보면 참선을 하여 지혜를 얻었다할지라도 염불공덕을 닦지 않으면 거의가 중도에 머무르거나 퇴락하여 큰 뜻을 이루지 못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 비록 참선은 못해도 염불은 해야 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염불은 불문에 귀의한 일반신도가 되었건 참선을 하는 수행자가 되었건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닦아야 할 긴요한 방편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선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선지식 보조지눌 선사도 염불과 참선수행이 다르지 않다는 선정일여(禪淨一如)를 주장하며 염불의 중요성을 갈파했다. 지눌 선사는 ‘염불요문’이라는 저술까지 내면서 잘못된 염불관을 바로 잡고 일념진각에 이르도록 인도했다. 지눌선사의 염불요문의 특징은 십종염불(十種念佛)이다. 십종염불은 몸으로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면서 염불해야한다는 계신염불(戒身念佛), 입으로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면서 염불해야한다는 계구염불(戒口念佛), 마음으로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면서 염불해야한다는 계의(戒意念佛), 몸을 움직일 때도 염불해야한다는 동억염불(動憶念佛), 몸이 고요할 때도 염불해야한다는 정억염불(靜憶念佛), 말을 하고 있을 때도 염불해야한다는 어지염불(語持念佛), 말을 하지 않고 있을 때에도 염불해야한다는 묵지염불(默持念佛), 늘 부처의 모습을 떠올리고 염불해야한다는 관상염불(觀相念佛), 모든 생각이 끊어지고 오로지 아미타불만 생각해야한다는 무심염불(無心念佛), 마침내 일체의 언어와 형상을 초월하여 진여불성이 드러난다는 진여염불(眞如念佛)이다. 지눌 선사는 이 가운데에 마지막 진여염불을 돈오(頓悟)로 해석하였고 앞의 염불들을 점수(漸修)로 해석하면서 이 둘이 함께 성취되기를 권하였다. 지눌선사는 점차적인 염불수행을 통해(漸修) 진여의 아미타불을 찰나에 친견하고(頓悟) 성불하는 방편을 제시한 것이다.

사람들은 수행이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정토문에서 본다면 불교수행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발원과 염불만 있으면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 염불문에는 상근기와 하근기에 차별을 두지 않고 출가와 세속에 구분을 두지 않으며 앉고 서고에 한계를 두지 않는다. 불교의 모든 교리가 염불수행으로 귀결을 짓는다면 많은 이들이 이고득락(離苦得樂)의 감로법을 얻을 것이 분명하다.

이제열 불교경전연구원장 yoomalee@hanmail.net

 [1324호 / 2015년 12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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