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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선인이 노닐던 불교학의 산실, 동아시아 불교의 고향

▲ 한때 1400여 가람과 1만8000의 승도를 품었던 스와트 강. 힌두쿠시에서 발원한 이 강은 페샤와르 인근 차르사다에서 카불 강과 합류한 후 아톡에서 인더스 강으로 흘러든다. 밍고라 인근 우디그람(Udegram) 뒷산 라자기라 요새에서 본 스와트 강 전경.

불타는 북천축(웃디야나)의 아파랄라 용왕을 교화하고 중천축으로 돌아가던 중 녹색의 숲으로 빛나는 카슈미르에 이르러 예언하였다. “저곳은 비파샤나를 따르는 자들의 제일가는 처소로, 내가 열반에 들고 백년이 지난 뒤 한 비구제자가 저 땅에 정법을 전하게 될 것이다.”(‘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

카슈미르는 선정 제일처
제4차 결집 이루어진 곳
동아시아 불교의 고향

간다라는 무착·세친 등 배출
불교 논사들의 고향으로 칭명

구법승들의 여행기 길잡이로
불적과 논사들 발자취 순례

예언의 비구제자는 마드얀티카(Madhyantika, 末田地)였다. 아난다는 그에게 이 같은 여래의 예언을 부촉하고서 “카슈미르는 방사(房舍)와 와구(臥具)를 쉽게 구할 수 있을뿐더러 선정을 닦는데 제일가는 처소”임을 다시한번 강조하였다.

‘부법장인연전’에서 가섭-아난다에 이어 세 번째 법장으로 기록된 마드얀티카는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한 마힌다와 함께 가장 대표적인 불교 전도사이다. 이후 스리랑카가 남아시아로의 불교전파의 기점이 되었다면, 카슈미르와 간다라는 동아시아로의 불교전파의 기점이 되었다. 카슈미르와 간다라는 이른바 실크로드 도상에 있었다. 이곳 카슈미르와 천축(인도)의 수많은 승려들이 힌두쿠시와 파미르(총령) 너머로 불법을 전파하였다. 현장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구법승 또한 이곳을 통해 천축으로 들어갔고 천축을 나갔다.

▲ 불타와 바라문(위), 불타와 외도(아래). 스와트 박물관. 1∼3세기. 바라문이 뭔가를 질문하였고, 부처님이 설명하자 매우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이며 제자들 역시 함께 웃고 있다. 불타 당시 불교학의 현장을 보는 듯 생생하다. 한눈에 플라톤이 제자들과 디오게네스 등의 이학(異學)에 둘러싸여 진리에 대해 토론하는 라파엘로의 ‘아테네학당’이 연상되었다. 부처님은 이렇게 가는 곳마다 마주하게 된 사문·바라문과 허물없이 토론하여 그들의 귀의를 받았을 것이다.

 
바라나시나 라자그라하(마가다)를 중심으로 한 갠지스 강 중류지역이 불타의 현생 무대였다면 간다라 일대는 전생의 무대였다. 현장의 ‘대당서역기’에 따르면 보살은 나가라하라(오늘날 잘랄라바드)에서 연등불이 지나는 진흙 길에 머리카락을 펼쳐 여래를 찬탄하고 미래불의 수기(授記)를 받은 이래 백겁의 생을 통해 이곳에서 보살행을 닦았다. 간다라 북쪽 단타로카(단특산: 샤바즈가리의 메카산다)는 수다나 태자가 나라의 보배인 흰 코끼리를 적국에 보시하여 쫓겨난 곳이고, 웃디야나의 몽게라(밍고라)는 인욕선인으로서 갈리 왕에게 지체를 절단 당한 곳이며, 탁샤쉬라(탁실라)는 월광 왕이 천생(千生)에 걸쳐 자신의 머리를 보시한 곳이다. 그래서 탁샤쉬라(‘잘려진 머리’)였다. 그런 곳에는 어김없이 아쇼카 왕이 세운 스투파가 있었다. 현장은 카슈미르와 간다라 지역에서 26기의 아쇼카 대탑을 확인하고 있다.

이런 인연 때문인지 카슈미르와 간다라는 불교학의 산실이었다. 일찍이 일단의 현성들이 파탈리푸트라(오늘날 파트나)에서 대천(大天) 무리의 이설과 국왕의 박해를 피해 카슈미르로 날아든 이래 쿠샨제국의 카니시카 왕 때는 인도불교사에서 ‘제4차’(티베트 전승에서는 ‘제3차’)로 명명된 결집(結集)이 이루어졌다. 협(脇) 존자의 발의와 세우(世友)의 주재로 500명의 아라한이 모여 각기 10만송의 우파데샤(論議)로써 경·율·론 삼장을 해설하였다는데, 그 중 하나가 현존의 ‘아비달마대비바사론’이다.

여기에는 바사(婆沙)의 4대 논사로 일컬어진 법구·묘음·각천·세우를 비롯한 카슈미르와 간다라의 여러 위대한 논사들(諸大論師)과 우리에게 그 이름도 생소한 수많은 논사들이 등장한다. ‘발지론’(한역 20권)의 주석서라는 문헌사적 위상에도 불구하고 불교철학의 제 문제에 대한 어마어마한 분량(한역 200권)의 논의로 볼 때, 하나의 주제에 대해 제기된 수많은 이설에 대한 비평으로 볼 때 당시 카슈미르를 중심으로 한 불교학의 탐구가 얼마나 치열하였고 방대하였을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카슈미르에서는 이후로도 시타반니(尸陀槃尼) 등 여러 논사들이 광략(廣略)의 ‘비바사론’을 저술하였고, 이들을 계승하여 오입(悟入), 중현(衆賢) 등의 논사가 출현하였다. 길장 계통 전승에 따르면 ‘유만론’(‘대장엄경론’)의 쿠마라라타(童授)와 ‘성실론’의 하리발마(獅子鎧)도 카슈미르 출신의 소승학자이다.

카슈미르 서쪽 피르판잘 산맥 너머의 간다라 또한 우리는 대개 불교미술의 고향 정도로만 이해하지만, 현장법사는 이곳을 불교논사들의 고향(作論之師本生所)이라 하였다. 무착, 세친, 법구, 여의(如意), 협 존자 등은 모두 간다라 출신이었다. 그에 따르면 세친과 여의는 푸루샤푸르(오늘날 페샤와르)의 카니시카 대가람에서 각기 ‘구사론’과 ‘비바사론’을 저술하였고, 법구와 세우는 푸쉬칼리바티(차르사다)에서 ‘잡아비담심론’과 ‘중사분아비담론’(신역은 ‘품류족론’)을, 이슈바라(Īśvara)는 바르샤(샤바즈가리)에서 ‘아비달마명등론’을 저술하였다.

이 밖에 설일체유부의 개조라 할 만한 가다연니자(迦多衍尼子, 구역은 迦旃延)는 치나북티(암리차르 일대)에서 ‘발지론’을 저술하였고, 나가세나 비구는 샤카라(현 시알코트)에서 박트리아의 왕 메난드로스(인도명은 밀린다)와 불법에 관해 대론하였지만, 이곳 펀잡 역시 사실상 카슈미르 불교의 영향권이었다.

영향권으로 말하자면 서역과 중국 또한 빠트릴 수 없다. 초기의 중국불교사를 장식한 역경승 중 많은 이들이 카슈미르 출신이거나 그곳에 유학하였다. ‘고승전’에는 수많은 카슈미르(계빈罽賓은 구역) 출신 승려가 언급된다. 우리 귀에 익숙한 이들만 꼽자면 ‘비바사론’(383년)을 역출한 승가발징, ‘아비담팔건도론’(383년)과 ‘아비담심론’(384년)을 번역한 승가제바, 유부율인 ‘십송율’을 번역한 불야다라, ‘사분율’과 ‘장아함경’(410-425년) 등을 번역한 불타야사, ‘오분율’을 번역한 불타집, ‘보살선계경’을 번역한 구나발마(377-431년), ‘40화엄’의 역자 반야, ‘원각경’의 역자 불타다라가 그들이다. 구역의 대표자로 ‘금강경’ ‘법화경’ 등을 번역한 구마라집(344∼413) 또한 어려서 카슈미르에 유학하였고, 역경의 대 종장 현장 역시 카슈미르에 2년간 머물면서 ‘구사론’과 ‘순정리론’을 학습하기도 하였다. 일찍이 결집을 발의하였던 협 존자는 카슈미르를 현성들이 모여들고 선인이 노니는 곳이라 찬탄하였다.

카슈미르와 간다라는 가히 불교학의 고향, 동아시아불교의 산실이라 할만하다. 이같이 불교학을 생산하고 전파한 지역을 인도 어디서 또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응당 나란다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그곳은 5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역사에 등장한다. 4∼5세기 불교학의 또 다른 중심지로 무착이 미륵보살에게서 ‘유가사지론’ ‘장엄대승경론’ ‘중변분별론’ 등을 품수하고, 세친이 형의 권유에 따라 대승으로 전향하여 대소승의 여러 종류의 이론(異論)을 제작한 곳, 상좌 슈리라타(勝授)가 ‘경부비바사’를, 진제 전승에서 세친이 ‘구사론’을, 중현이 ‘광삼마야론’과 ‘수실론’을 지었다는 아유타국을 들 수 있다. 혹은 ‘현양성교론’이나 ‘유식론’이 제작되었다는 인근의 코삼비(오늘날 알라하바드 인근)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 또한 모두 간다라 혹은 카슈미르 출신이었다. ‘구사론’의 주석서를 쓴 야쇼미트라(稱友)는 “카슈미르인이지만 비바사사(毘婆沙師)가 아닌 이는 경량부의 대덕(슈리라타)이며, 비바사사이지만 카슈미르인이 아닌 이는 외국 즉 서방 간다라의 비바사사”로 분별하기도 하였다. 이 말은 곧 초기불교학을 생산한 비바사사는 거의 다 카슈미르와 간다라 출신이었다는 뜻이다. 간다라의 논사 역시 아비달마 비바사사였다. ‘비바사사((Vaibhāṣika)’란 비바사(毘婆沙 vibhāṣā: 廣論)에서 노니는 이, 다시 말해 논의를 전문으로 하는 설일체유부의 논사를 말한다. 북천축 최대의 승원이었을 간다라의 카니시카 스투파와 대가람은 이들 설일체유부의 스승들께 바쳐진 것이었다.

오늘 우리가 접하는 아비달마 논서는 거의 다 카슈미르와 간다라에서 제작되었다. 이는 중관·유식·여래장으로 이어지는 불교학의 정초였다. 정리(正理)의 법성을 추구하는 이들의 학적 성향과 전통이 아유타국으로, 나란다로 전해졌으며, 동아시아 불교학의 초석이 되었다. “5세기 이전의 카슈미르·간다라 불교는 인도불교가 교리적 혁신을 이루게 된 원천의 하나로, 이로부터 새로운 불교가 생겨났고 불교의 재생이 도모되었다.” 일본의 불교학자 히라카와 아키라(平川彰)의 말이다. 필경 이 같은 이유에서 카슈미르 비바사사는 불교 4대 학파 중의 첫 번째로 손꼽히게 되었을 것이다.(나머지 셋은 경량부와 대승의 중관·유식학파)

언제부터인가 그곳에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카슈미르와 간다라는 인도 중국, 불타의 활동무대이기도 하였던 갠지스 강 중류 지역에서 본다면 서북 변방지역에 위치할뿐더러 오늘날 그곳은 이슬람의 세계이다. 인도와 파키스탄에 걸쳐있는 카슈미르는 세계 주요 분쟁지역 중의 한 곳으로, 1949년 이래 우리네 휴전선과 같은 정전선으로 갈라져 같은 종교의 이웃임에도 서로 넘나들 수 없다. 간다라 역시 아프가니스탄과의 접경의 파슈툰의 땅으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인 탈레반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지역이다. 그들은 한 때(2007∼2009) 북부 밍고라 지역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아마도 오늘의 그곳에서 세친과 중현은 커녕 카슈미르 비바사사나 간다라논사의 자취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아니 불교의 흔적조차 박물관에서나 허물어진 폐사지로서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 옛날 불교의 선지식(śāstṛ:論師)들이 거닐었던 그 땅을 딛고 싶었고, 이고 살았던 그 하늘을 보고 싶었다.

 
비록 1300여 년 전에 쓰여진 것일지라도 길잡이가 될 만한 여행기도 그곳으로의 답사를 유혹하였다. 현장은 ‘대당서역기’에서 당시 인도 지리와 불교현장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으며, 그의 제자 혜립은 ‘대자은사삼장법사전’에서 스승이 인도에서 무엇을 보고 배웠는지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현장(629∼645년 인도여행)은 오늘날 신장(투루판·쿠차)지역과 키르키즈스탄, 우즈베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간다라(오늘날 페샤와르)로 들어와 웃디야나(밍고라)―탁샤쉬라(탁실라)―카슈미르―탁카(시알코트)―치나북티(암리차르 일대)―잘란다라를 거쳐 중인도로 들어갔다. 해로로 입국한 혜초(723∼727)는 반대로 잘란다라―탁카―카슈미르―간다라―웃디야나를 통해 출국하였다. 이들 이전에는 법현(399∼416)과 송운·혜생(518∼522)이 간다라를 여행하였고, 이후에는 오공(750∼790)이 사신으로 왔다가 간다라에서 출가하여 카슈미르에서 구족계를 받기도 하였다.

물론 오늘날 그들이 갔던 길을 따라 갈 수는 없다. 인도/파키스탄은 암리차르와 라호르 사이의 아타리/와가 국경으로만 왕래할 수 있을 뿐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편의상 답사지역을 몇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인도의 스리나가르를 중심으로 한 카슈미르 지역, 잠무(아크누르)와 암리차르, 파키스탄의 라호르·시알코트 등의 펀잡 지역, 페샤와르와 밍고라를 중심으로 한 간다라와 스와트 지역, 그리고 다시 파키스탄의 아자드(자유) 카슈미르주의 주도(州都)인 무자파라바드와 만세라의 순으로 답사를 계획하였다. 라왈핀디에서 만세라와 무자파라바티를 거쳐 스리나가르에 이르는 공로는 현장·혜초 시대는 물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간다라와 카슈미르를 잇는 가장 대표적인 길이었지만 양국의 분리 독립이후 폐쇄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구법승들의 여행기를 길잡이 삼아 카슈미르와 간다라의 도시와 불적과 관련 논사들의 행적과 저술, 역사, 전설 등을 따라가 보려 한다. 거기서 오늘 우리 불교(학)의 현실도 돌아보게 될 것이다.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 ohmin@gnu.kr


[1325호 / 2016년 1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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