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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뀌고 세상을 바꾸는 발원] 5. 근·현대 발원의 삶을 산 불자들

  • 새해특집
  • 입력 2015.12.29 10:45
  • 수정 2016.01.08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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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그라지는 불 지피듯 대중화 대원력으로 한국불교 일신

한국사회에 있어 근·현대는 격변의 시대이듯 불교계 역시 조선조 배불에 이어 일제의 통제라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삶이 퍽퍽한 시대였지만 그런 가운데 발원을 하고 실천한 불자들이 있다. 특히 다음의 세 분은 남다른 발원과 함께 신앙적 결과를 이루어 우리의 귀감이 되고 있다. 복을 비는 신앙이 만연한 요즘 그들의 발원과 실천을 살펴보는 것은 현대불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불교 대중화 구현 장경호 거사
‘한국불교 발전’ 원력 세워
불서보급·교육불사에 매진
전 재산 보시해 진흥원 건립
방송 등 대중화 불사는 계속

▲대원 장경호 거사=1899년 부산에서 태어난 장경호 거사는 어린 시절 어머니와 통도사에 다니며 불심을 키웠다. 부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14살 되던 1912년 청운의 꿈을 갖고 상경했다. 보성고보에 입학해 학업을 마친 후 1919년 3·1운동에 가담했다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일본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경제적 어려움도 컸으나 식민지 백성이라는 홀대는 뼈저린 아픔이었다. 마음에 상처만 입고 귀국한 그는 인생의 길을 찾고자 많은 책을 구해 읽고, 수많은 사람을 만나 지혜를 얻고자 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답이 없었다. 그런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이 부처님 말씀이었다. 불경(佛經)에서 혜안을 얻은 그는 그대로 실천하면 사람답게 살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그런 그의 뜻을 펼칠 수 있었던 곳이 어린 시절 다녔던 통도사였다. 세속의 아픔을 씻고자 절을 찾았고, 수행정진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려 했다. 선방에서 정진하고 싶었으나 허용되지 않았다. 출가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때 그의 입방을 허락한 분이 구하 스님이었다. 그의 수행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입방을 허락받은 그는 스스로 서원을 세웠다. ‘재가인의 몸이지만 출가자답게 살겠다’는 것이다. 서원대로 평생을 수행자처럼 지냈다.

거사의 두 번째 서원은 ‘한국불교를 발전시키겠다’는 염원이었다. 27세 되던 해 구하 스님의 지도로 동안거를 지낸 그는 궁핍한 사찰경제를 보고 사업에 성공해 그 모든 재원을 불교를 위해 쓰겠다는 서원을 세운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이루기 위해 돈을 벌기 시작했다. 형이 운영하는 목재소, 쌀가마니 도매업인 대궁양행(大弓洋行), 종합물산회사인 남선물산(南鮮物産), 그리고 조선선재주식회사를 운영했다. 이런 사업을 기반으로 1954년 한국특수철강을 인수해 주식회사 동국제강을 설립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재산이 모이자 자신의 서원을 실천했다. 먼저 1967년 불서보급사를 설립했다. 많은 불자들이 불서를 읽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불교대중화의 원력을 실천한 것이다. 1972년에는 서울 남산 아래 후암동에 대원정사를 설립했다. 이곳에서 대중을 상대로 불교대학을 설립한 것은 한국불교 대중교육의 효시일 만큼 영향력이 컸다.

대원 장경호 거사는 평소 ‘나의 재산은 나의 것이 아니다. 잠시 위탁관리를 할 뿐이다. 그러므로 한 푼도 헛되이 쓸 수 없다. 모든 재산은 불교를 위해 환원되어야 한다’는 소신을 가족에게 밝혔다. 1975년 4월 모든 재산을 정리한 후 7월10일 박정희 대통령에게 ‘불교발전을 위해 재산을 희사하겠다’는 서한을 보냈다. 대통령도 그 뜻을 높이 여겨 이원경 문공부장관에게 불교계, 학계, 정부, 입법부 대표로 구성된 재단법인 대한불교진흥원 설립을 지시했다. 이를 통해 불교방송이 세워지는 등 그가 추구한 불교의 현대화·대중화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생활·실천불교 제시 회당 정사
‘육자진언’서 진리 깨달아
현실에 맞는 새 불교 제시
실천하는 능동적 불자 강조
사회·공적 일에 우선 순위

▲회당 대종사=서울 지하철 6호선 월곡역 3번 출구로 나와 300m쯤 지나면 예사롭지 않은 건물이 있다. 전통 사찰양식과 다른 모습을 한 대한불교진각종의 문화전승관이다. 전승관 옆으로 진각종 수행도량인 탑주심인당이 있다. 진각종에서는 수행도량을 심인당(心印堂)이라 한다. 그것은 불교의 법당이 자신의 마음을 찾는 곳이기 때문이다. 심인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이며, 진리를 아는 마음이다. 심인에는 진언 가운데 가장 중요하면서도 간결한 마음의 진언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나에게 있는 마음이 곧 부처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회당 대종사 손규상은 1902년 5월10일 울릉도에서 태어났다. 한학과 신학문을 배운 후 세상에 나가 자신의 뜻을 펼치던 형이 36살에 세상을 떠나는 일을 겪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불심이 돈독한 어머님 권유에 따라 불교에 귀의했다. 이는 새로운 삶의 계기가 되어 깨달음을 구하는 생활로 일관했다. 이후 10년 동안 불법의 체득에 심신을 바친 결과 1947년 5월16일 경북 달성군 성서면 농림촌에서 육자진언(六字眞言)을 통해 불법의 진리를 깨달았다. 그리고 어려운 기존 불교를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새로운 불교관을 정립했다. 대종사는 기존 불교의 장점과 단점을 검토하고 그 한계를 넘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기존 불교의 수행, 공간, 용어, 그리고 의식 등 여러 면에서 확연히 다른 불교의 모습을 제안한 것이다. 그것이 ‘생활불교·실천불교’다.

생활불교는 중생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 맞는 새로운 불교신앙을 세우는 일이다. 불교는 전문 수행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의 현실 속에 쉽게 접근될 수 있도록 쉬워야 한다. 중생들이 단순히 수행자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수동체가 아니라 스스로 불교를 알고 행할 수 있는 능동적인 자세를 지닐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신앙생활이 이루어지려면 수행 도량이 멀리 있어서는 안 된다. 산 속의 사찰처럼 멀리 떨어져 어쩌다가 찾아가는 그런 도량이라면 생활불교로서의 성격보다는 기복적인 성격이 강해질 수 있다.

생활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신앙은 시대를 바라보는 시각을 변화시킨다. 또한 현실 세계를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임을 확인시켜 준다. 그런 현실적인 불교관의 사회적 실천을 강조한 것이 실천불교이다. 이는 개개인이 긍정적 사고를 지닌 다음 그 역량이 사회적 실천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개인보다 사회유지에 우선순위를 두어 개인적 욕심에 의해 공동 사회의 일이 방해받아서는 안 되고, 공적인 법칙을 어겨 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일들을 경계한 것이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폐단의 책임이 바로 우리에게 있으며, 그것을 없애 깨끗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불교실천의 본질이다.

▲ 법정 스님에게 보살계를 받고 있는 길상화 김영한(사진 왼쪽) 보살.
무주상보시 표상 길상화 보살
서울의 유명 요정 대원각
무소유 법정 스님에 보시
청정도량 ‘길상사’ 탈바꿈
재물이란 시 한 줄만 못해

▲길상화 김영한 보살=시인 김광섭이 노래했듯 성북동 비둘기들은 채석장 소리에 놀라 그곳을 떠났고 그 자리에는 큰집들이 들어섰다. 그런 집들 사이로 절이 아닌 듯 들어선 사찰이 있다. 얼마 전까지 법정 스님이 회주로 있던 길상사다. 이곳의 건물은 사찰로 지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반 한옥풍이다. 이곳은 음주가무가 질펀하게 이어졌던 요정 대원각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권력과 이권을 좇아 불나방처럼 달려들던 곳이다.

이곳 주인은 김영한이었다. 불교에 귀의한 뒤에 길상화(吉祥華)란 법명을 받았다. 1916년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난 그녀는 가난한 탓에 15살에 시집갔지만 남편이 일찍 죽었다. 살길이 막막해 1932년 조선 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다. 미모가 뛰어난 덕분에 금방 두각을 나타냈다. 기생이었지만 삼천리문학에 글을 발표할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고 글씨는 물론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흥사단에서 그녀의 재주를 눈여겨 본 신윤국이 동경 유학을 보냈다. 공부하던 중 스승이 함흥감옥에 투옥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해 찾아 갔다. 스승을 만나지 못했으나 평생의 사랑을 만났다. 함흥 영생여고보 교사들 회식 장소에 나갔다가 영어 교사 백석을 만난 것이다.

운명적인 만남은 달콤한 사랑을 남긴다. 그러나 달콤한 사랑일수록 오래가지 못하고 가슴 아픈 사연만 남길 뿐이다. 백석은 부모가 둘 사이를 반대하자 만주로 떠나자고 제안했다. 그녀는 백석을 생각해 가지 않았다. 잠시 떨어져 있으면 될 줄 알았는데 6·25한국전쟁으로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

서울에 혼자 남은 보살은 생활을 위해, 또 백석을 잊기 위해 대원각을 열었다. 그렇게 시작한 요정은 날로 번창해 우리나라 제일의 요정이 되었다. 많은 남자들이 그녀에게 마음을 주었지만 그녀의 마음속엔 늘 백석뿐이었다. 1999년 83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사랑하는 백석을 그리워하며 삶을 보냈다.

1997년 죽음이 임박해진 길상화 보살은 자신이 운영하던 대원각을 법정 스님에게 맡겼다. 아무런 조건 없이 1000억원에 가까운 재산을 넘긴 것이다. 그녀는 1000억원이란 돈이 백석의 시(詩) 한 줄만도 못하다고 했다. 이 정도면 무소유의 경지에 오른 것이 아닐까?

사람들의 이목이 성북동에 쏠렸다. 무소유에 익숙했던 스님은 보란 듯이 시주받은 대원각을 길상사로 탈바꿈시키고 회주로 지냈다. 2003년 12월 그마저 던져버리고 강원도 산골로 들어가 차를 마시며 지냈다.

종교의 가치는 인간을 구원하는데 있다. 불교는 무소유를 실천해 스스로 해탈한다. 해탈의 시작이 발원이다. 길상사에 가면 참 많은 것이 생각난다. 사랑, 발원, 그리고 무주상과 무소유. 오늘도 무주상과 무소유가 어우러져 탐욕에 물든 우리의 정신을 맑고 향기롭게 한다.

김경집 교수 kyungjib@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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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집 교수는 동국대 불교학과와 동 대학 대학원을  졸업했다. 위덕대 불교학부 겸임교수 등을 역임하고 현재 진각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불교학회· 한국불교학연구회 이사, 보조사상연구원 연구위원 등을 맡고 있다.

 

 

[1325호 / 2016년 1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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