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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폭력과 분배 정의

기자명 이중남
  • 법보시론
  • 입력 2016.01.04 14:12
  • 수정 2016.01.08 10:35
  • 댓글 0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 국가를 일정한 영토 내에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폭력을 독점하는 집단이라고 정의했다. 그 자체 불가침의 폭력인 홉스(Thomas Hobbes)의 ‘리바이어던(Leviathan)’을 계승한 것이지만, 국민들이 일정한 정당화 절차를 통해 그 폭력 독점을 인정한다는 제한이 붙는다는 점에서 차별된다. 현대의 민주주의 정치이념은 기본적으로 정치권력에 대한 불신에서 출발한다. ‘권력 분립’이나 ‘견제와 균형’ 같은 헌법 원리는 국가가 지닌 폭력의 자의적인 행사를 막기 위한 장치다.

물론 국가가 폭력만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다. 전후 서구에서 발달한 사회국가 체계는 사회적 재분배 권한을 국가에 부여했다. 이 체계에서 국가는 냉혹한 시장 경쟁에 참여하기에 불리한 조건을 가진 사람들 또는 경쟁에 참여했다가 패배한 사람들에게 과세를 통해 확보된 재원을 재분배한다. 이로써 국가는 폭력 독점이라는 무서운 얼굴과 재분배를 통한 공정성 조율이라는 따뜻한 얼굴을 함께 갖게 되었다.

그렇지만 1980년대 이후 글로벌 자본주의가 국제 분업체계를 재조정하면서 많은 선진국에서 사회국가 원리가 후퇴하고 신자유주의가 힘을 얻고 있다. 승자독식의 신자유주의는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 시장의 패자에 대단히 가혹하고, ‘작은 국가’를 주장함으로써 시장의 실패를 보완할 국가의 역량마저 축소한다. 여기서 ‘작은 국가’란 독점하는 폭력이 아니라, 사회적 재분배 능력이 작은 국가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신자유주의의 민낯, 즉 시장의 냉혹함과 정부의 무력함을 동시에 뼈저리게 경험한 것은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 직후 IMF ‘치하’에서였다.

지난 12월9일 조계사에 피신 중이던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을 체포하기 위해 경찰 1000여명이 강제 진입을 시도한 일이 있었다. 평소에 노동 현안에 무관심한 탓에, 처음에는 조계사에 물리력을 투입할 만큼 한 위원장이 심각한 혐의를 받고 있나보다 생각했다. 조계사는 1000만이 넘는 신자를 보유한 한국불교의 행정적 구심인 동시에 상징적인 성역이다. 그런데 경찰이 집행하겠다고 제시한 체포영장에 적시된 그의 혐의가 지난 4월에 있었던 세월호 참사 1주기 추모행사에서의 일반교통방해죄(벌금 100만 원 정도)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나는 경악했다. 교통방해죄가 조계사에 경찰 1000명을 투입할 만큼 중대한 범죄가 아니라는 것쯤은 상식이다. 이것은 대단히 정당화하기 힘든 국가 폭력이고, 불교와 불자 모두에 대한 모욕이다.

이 사단의 배후에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확대하고자 하는 대기업과 그것을 저지하고자 하는 노동계의 한판 대결이 도사리고 있다. 먹고 사는 일이 걸렸으니 계급, 계층간 갈등이 없을 리가 없다. 정당제도란 그런 사회적 갈등이 발생하면 정당을 통해 국회에서 해결하라고 보장되어 있는 것이다. 부(富)의 사회적 분배 방식을 변경하는 일은 각 이익집단 간에 이해가 대립하므로 타결에 이르기까지 지난한 협상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런데 노동계의 중요한 행위자를 체포함으로써 이 당연한 과정을 건너뛸 요량으로, 고작 교통방해죄 영장을 들고 종로 한복판의 불교 성지에 공공의 안전[公安]을 위해 보유한 폭력을 투입하는 것이 민주정부인가?

비정규직 제도를 처음 도입할 당시에 정부와 대기업측은 경제만 나아지면 곧 비정규직을 없앨 것처럼 얘기했다. 요즘은 국민소득 3만 불 운운하는 시절이다. 그런데 비정규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확대하자는 주장이 왜 나오는지 모르겠다. 민생이 어렵고 경기가 부진한 것은 대기업들의 실적이 나빠서가 아니다. 사람들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거나, 일을 해도 너무 적은 돈을 받으며 앞날을 기약할 길 없이 살기 때문이다. 경제인구의 4분의 1을 넘는 자영업자들 상당수가 경기침체로 인해 반(半)실업자나 마찬가지다. 이런 판국에 청년이 취업을 못하고 결혼 연령이 늦어지고 출생아가 줄어드는 이유가 경직된 노동시장 때문이라니, 범국민적 공론장을 열어 심각하게 검토해야 할 궤변이다. 물론 양쪽의 발언권 모두를 충분히 보장하면서 말이다.

이중남 젊은부처들 정책실장 dogak@daum.net
 

 [1326호 / 2016년 1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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