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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국민께 처음으로 드리는 글

“기꺼이 가난했고 궁핍 익숙했기에 지금의 불광산 존재합니다”

▲ 불광산은 대만 남부 가오슝에 위치해 있으며 1967년 창건되어 현재는 120만㎡ 규모에 달한다. 현재 대만과 해외에 300곳의 분원을 개설해 운영하고 있다. 대만 불광산 제공

“불광산 1000여명의 비구, 비구니들은 월급도 없고 휴일도 없습니다. 교실과 숙소는 50여년 전에 지어진 전통시설로 에어컨 설비없이 지내고 있지만 불광산의 에어컨은 모두 손님들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

 과거 중국대륙의 출가자들은 스스로를 ‘빈승’이라며 낮춰 불렀습니다. 출가인 마음속에 삼천 대천세계를 품고 있는데 어째서 스스로를 ‘빈승’이라고 업신여기나 해서 저는 이렇게 부르는 것을 아주 싫어했습니다. 어린시절 저의 집은 끼니걱정을 해야 할 정도로 가난했지만 저는 궁색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비록 돈이 없어서 학교에 갈 수 없었지만 저에게는 두 손과 두 발, 눈·귀·코·입·몸 모두 있었으니 어찌 빈궁함을 느꼈겠습니까?

저는 일생(一生)으로 중국 북벌,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을 거쳤습니다. “‘장개석’(蔣介石, 1887년 10월31일~1975년 4월5일)이 강소성에서 북벌군을 이끌고 오성(五省)연합군과 교전하며 대문 앞에서 군인들이 사람을 죽이고 있었던 때에 제가 태어났다”고 하시던 어머니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열 살 때는 노구교사변(蘆溝橋事變 일본군이 1937년 7월7일 밤 ‘중국이 사격을 가했다’는 이유로 중국 ‘노구교’를 점령한 사건으로, 중일전쟁을 촉발시켰다. 역자 주)이 발생하면서 항일전쟁이 시작되었고 저는 가족들과 함께 난민들을 따라서 강소성 북쪽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총알이 빗발치는 속에서 몸을 피하고 시신더미 가운데 몸을 숨기며 생존해야 했습니다. 포연이 가득한 이 시기에 부친이 남경에서 실종되셨고 모친 홀로 아이들과 남겨지는 처지가 되었으니 어찌 빈궁함이란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전쟁터는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고들 말하지만 총알과 포탄이 퍼붓는 삶을 겪게 되면 가난과 생사에 대해 저절로 남다르게 느끼는 것이 있게 됩니다.

12세에 출가한 이후로도 종찰 의흥(宜興) 대각사(大覺寺)의 가난과 공부하던 남경 서하사(棲霞寺)의 궁핍함으로 생활은 줄곧 어려웠지만 저는 감내하며 달갑게 지냈습니다. 66년 전 제가 23세에 대만으로 건너왔는데 친척이나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절을 찾아서 방부를 들이려고 해도 받아주는 곳이 없었지만 여전히 저는 궁색하게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여러 인연으로, 일부 매체에서 불광산 재산을 계산해 보고 5000여억원이 될 거라고 하였던데 어디 고작 그것뿐이겠습니까? 그 중에는 남화(南華)대학에 들어간 1500여억원, 불광(佛光)대학에 들어간 2000여억원, 보문(普門)중학교에 들어간 700여억원, 균두(均頭)초중학교와 균일(均一)초중학교에는 700억원 정도가 들었고 무의탁 노인을 보살피는 ‘인애지가(仁愛之家)’와 고아원 및 불광산 건축 등으로 들어간 총 지출비용이 2조원만 되겠습니까? 빈승의 계속되는 글에서 여러분들께 일일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비록 그렇게 많은 금전적인 지출이 있었고 그만큼 많은 불교적 사업을 성취해 왔지만 90세가 다 된 지금 제 자신이 확실히 ‘빈승’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모든 것이 다 내 것이 아니고 대중과 사회가 함께 공유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방에서 오고 시방으로 가며 함께 시방의 불사를 이루어낸다. 만인이 베풀고 만인이 나누면서 함께 만인의 인연을 맺어 나간다”라는 말처럼 이 모든 것이 저와는 관계없으며 저는 단지 그 가운데의 작은 인연일 뿐입니다. 빈승 자신도 역시 “한 명의 신도로서 기꺼이 베풀고 나누는데 동참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금강경’에서 보시는 상(相)이 없어야 하고 중생제도는 무아(無我)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여기서 언급할 가치가 없습니다. 불광산에서 설립한 학교나 사찰은 본래가 시방대중에게 속한 재물이고 저는 이 몸 하나뿐이니 ‘빈승’이 아니라면 누구겠습니까?

그러나 ‘성운공익신탁교육기금’의 400여억원을 누락시켰다고 말하는 사람이 사회에 있지만 그것 역시 제 것이 아닙니다. 이 기금은 은행에서 대신 관리하기 때문에 개인이 손을 댈 수 없고 필히 위원회 회의를 거쳐 공익적으로 사용해야만 지출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은행이 규정에 맞춰 곧바로 필요로 하는 기관이나 사람에게 입금해주도록 되어 있어서 ‘빈승’도 달리 참견할 수 없습니다. 요 근래 몇년 동안에 ‘진선미전파공헌상(眞善美傳播貢獻奬)’‘삼호교원상(三好敎園奬)’‘전세계중국어문학상(全球華文文奬)’‘탁월교사상(卓越敎師奬)’ 등을 주최하였습니다. 물론 이 기금들도 희사금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빈승이 60여년 동안의 원고료, 인세, 붓글씨 및 사람들의 공양금 등을 모아서 조성하였습니다. 그래서 미약하나마 좋은 일에 쓰고자 시작한 당연한 일이니 공로를 언급할 거리가 못됩니다.

50년 전 불광산을 창건할 때를 되돌아보면 저는 “없음을 있는 것으로 삼고, 공을 즐거움으로 하겠다(以無爲有, 以空爲樂)”라는 생각에서 금전을 모으지 않겠다고 서원하였습니다. 시달림을 생업으로 삼지 않고, 바깥으로 화주 받으러 다니지도 않고, 정부기관으로 부탁을 다니거나 신도 집을 들락거리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 50여년 이래로 백화점에 가거나 무슨 슈퍼마켓에 가서 물건을 산 적도 없습니다. 빈승은 금전을 모으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불광산 교단 소유로 귀속됩니다. 심지어 신도가 저에게 주는 빨간 봉투도 저는 다 거절하고 마음 편하게 저의 ‘빈승’ 일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저는 빈궁함을 누리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부 여성이나 남성들이 텔레비전이나 신문지면에서 자주 저를 비평하거나 심지어 욕설을 하더라도 저는 모두 다 고맙게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빈승이 이러한 비평과 왈가왈부의 대상이 되는 것도 저의 인생에 한줄기 색깔을 더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일생은 “내가 갖지 않으니 불교에 재산이 생긴다(以不要而有)”라는 생각으로 살아왔기에 개인적으로 아무것도 갖고 싶은 것이 없지만 불교와 교단은 발전을 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비록 ‘빈승’이라 할지라도 교단의 발전을 바라지 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현재 불광산 1000여명의 비구, 비구니들은 월급도 없고 휴일도 없습니다. 교실과 숙소는 50여 년 전에 지어진 전통시설로 에어컨 설비 없이 지내고 있지만 불광산의 에어컨은 모두 손님들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모두들 근검함 속에서 불도를 닦으면서 사회를 위한 봉사까지 하고 있는데, 자기주장을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이러한 시간적, 공간적인 인연에 대해서 좀더 공부하고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요?

불제자들은 대부분 근검하게 살고 있으며, 설사 사찰재물이 있다고 하더라도 개인소유가 아닌 사찰의 소유이자 사회적 공유로서 모두 사회대중을 위해 쓰입니다. 근래에 여러 매체에서 불교를 아주 잔인하게 짓밟고 있고, 소수의 매체만이 전통적인 도덕을 지키면서 몇 마디 바른말로서 불교에 대한 공평함을 지키고 있습니다. 저는 일생으로 사무용 책상을 써본 적이 없고 장롱을 써본 적도 없습니다. 지금은 비록 책상도 있고 주위에 서랍장도 있지만 쓰거나 열어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길이 8미터짜리 탁자가 있어서 식사하고 손님 만나고 저술하고 회의하고 붓글씨 쓰는 것을 다 이곳에서 합니다. 심지어 이등휘 전임 대통령이 불광산을 방문하였을 때와 수많은 불자들이 방문했을 때에도 다들 이 탁자에 앉았습니다. 이 장방형의 녹색 탁자를 이 손님들과 불자들이 아직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기다란 탁자는 저의 40여년을 줄곧 함께 해 오고 있습니다.

빈승은 생활을 검박하게 보내는 이외에 대외적인 접대나 사교모임을 좋아하지 않아서 “출가인은 산속에 앉은 것이 적합하지 내로라하는 잔치에는 적합하지 않다”라는 옛 어른의 말씀을 아주 좋아합니다. 애당초 대만 남쪽으로 내려와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펼치고자 한 것도 북부 불교계에 회의가 많은데 참석하지 않으면 협력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게 되고 식사를 대접한다는데 참석하지 않으면 체면을 살려주지 않는다는 말을 듣기 때문이었습니다. 체면을 세워주고, 맞추어주려고 매일 회의에 참석하고 밥을 먹다 보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빈승은 자신이 타이베이의 모임활동에 부적합하다고 느꼈기에 60년 전에 남부로 내려왔습니다. 그 당시, 대만 남부에는 본토출신의 출가자가 많지 않아서 많은 대외 활동을 줄일 수 있었기에 빈승에게 저술, 독서, 제자교육을 할 시간이 있었고 인생의 즐거움도 느끼게 되었습니다.
빈곤한 생활에 안주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찰을 지을 수 있었고 부족한 생활에 안주할 수 있었기에 그 많은 인연이 있게 된 것을 빈승도 잘 알고 있습니다. 매체에서 종교를 한 푼의 가치도 없는 것처럼 욕을 하고 있는데, 만약 대만에 이렇듯 많은 사찰과 교회, 도교사당 등 종교시설이 없었다면 다양한 색깔과 모습을 가진 안정되고 즐겁고 아름다운 보물섬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들은 우리가 돈을 아주 가치 있게 썼다고 자신합니다.

빈궁함은 죄악을 야기합니다. 대만은 부유하고 인간미가 넘치는 곳으로 우리들 모두가 대만에 사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남들이 가진 것을 질투하지 말고, 부유한 사람을 적대시 하지 말며, 종교를 배척하지 말고, 신앙을 헐뜯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우리의 문화는 관대한 포용력과 인정이 넘치는 문화입니다. 불교의 수많은 ‘빈승’을 위하고 그들의 미래 생존이 달린 위상을 위해서라도, 저는 지금 이 시점에 저 자신을 사례로 하여서 그들을 대표하여 몇 마디 바른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326호 / 2016년 1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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