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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철 스님 유시

18년 만에 회수된 성철 스님 유시

 
2012년 3월,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에 성철 스님의 유시(諭示)<사진> 위작이 유통되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서울 종로구 소재 미술품 경매회사 운영자 K씨가 석연찮은 입수 경위를 내세우며 인터넷 경매에 유시를 올렸다는 것이다. 광역수사대는 일단 위작 유통 혐의에 초점을 맞추기로 하고 수사에 착수했지만 몇 가지 난관에 봉착해 더디게 진행됐다. 그 즈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제보자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경매에 출품된 것과 똑같은 유시를 책에서 봤어요. 경매에 올라온 유시가 왜 가짜라는 거죠?”

사진작가 A씨가 은닉하고
공소시효 지나길 기다려
경매 넘겨져 낙찰됐지만
결정적 제보에 덜미 잡혀

결정적 제보였다. 유시가 진품이라면 위작 유통이 아닌 문화재 절도였다. 광역수사대는 문제의 ‘책’을 찾기 시작했다. 성철 스님 관련 유품들이 기재된 책이라는 게 단서였다. 발견되지 않는다면 성철 스님 유시는 누군가의 소장품으로 넘어가버린 채 다시는 세상의 빛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성철 스님의 사자후가 녹아있는 유시는 정녕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영영 지워져버리고 마는 것일까?

그러던 어느 날, 작디작은 책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광역수사대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순간이었다. 한 장, 한 장 종이를 넘기다 이윽고 마지막 부분에 이르렀을 때, 반으로 접힌 유시 사진이 불쑥 튀어나왔다. 지계(持戒)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경매에 올라왔던 유시와 글자체를 비교해보니 완벽하게 똑같았다. 제보전화를 받은 지 1년. 드디어 유시가 진품임이 확인된 것이다.

그때부터 수사는 급물살을 탔다. 사진을 찍은 A씨에게 수사가 집중됐다. 추궁한 결과 사건의 내막이 밝혀졌다. 원택 스님은 성철 스님이 입적하고 2년 뒤인 1995년 책에 싣기 위해 유품들에 대한 사진촬영을 의뢰했다. 성철 스님과 친분이 있던 사진작가가 담당하기로 했다. 그는 보조작가 A씨에게 몇몇 유품들을 찍게 했는데, 사건은 바로 여기서 시작됐다. A씨는 유시를 슬그머니 빼낸 뒤 공소시효가 지나기만을 기다렸다. 공소시효가 만료되자 A씨는 매매를 시도했고, K씨는 장물이라는 사실을 버젓이 알면서도 2012년 1월20일 1000만원에 매수했다. 유시는 결국 2012년 6월경 2100만원의 금액으로 낙찰돼 부산의 S씨 소유로 넘어가 있었다.

광역수사대는 압수영장을 발부받아 대대적인 수색에 나섰지만 실패했다. 두 차례 더 압수영장을 발부받았어도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세 번의 압수수색 영장과 세 번의 수색이 모두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숨겨놓고 내주지 않으려는 자와 찾으려는 자 사이에 첩보작전을 방불케 하는 공방이 벌어졌다. 그러다 검사가 고의로 장물을 취득했다며 공소장을 제출하고 실질심사까지 진행되자 상황이 반전됐다. 구속될 수 있다는 압박감은 마침내 유시를 다시 세상에 내놓게 했다.

2013년 5월2일, 광역수사대는 기자회견을 열어 유시가 회수됐다는 사실을 알렸다. 持戒淸淨(지계청정), 和合愛敬(화합애경), 利益衆生(이익중생)하라는 성철 스님의 당부가 생생히 살아 있었다. 기자회견에 참석했던 원택 스님의 바람대로 유시는 성철 스님이 주석했던 해인사 백련암으로 돌아갔다. 그렇다면 애초에 유시를 빼돌렸던 A씨는 어떻게 됐을까. 문화재 절취·은닉의 공소시효인 10년이 지났기에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이에 대한 공소시효를 현행법상 가장 긴 25년으로 늘려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을 그는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지금쯤 어딘가에서 또 다른 A씨가 공소시효가 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김규보 기자 kkb0202@beopbo.com
 

[1327호 / 2016년 1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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