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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카슈미르-① 불교의 새로운 무대

부처님이 “녹색 숲 빛나는 지·관 수행 제일 처소” 극찬

▲ 무굴제국의 자항기르 황제가 조성한 정원인 니샤트 바그에서 바라 본 달 호수. 시 외곽의 달 호수 쪽으로 나가자 여기가 카슈미르라는 것이 실감났다.

카슈미르…. 과거에는 카시미론 담요로, 십여 년 전에는 캐시미어 스웨터나 숄로 그 이름을 알린 카슈미르, 혹은 영국의 록밴드 레드 제플린이 “태양이 내 얼굴에 부딪히고 별들이 내 꿈을 채우는 곳, 샹그릴라와 같은 그곳으로 당신을 데려가게 해 달라”고 노래 불렀던 그 ‘카슈미르’. 인도·파키스탄 사이에 몇 차례의 전쟁이 일어났고 지금도 여전히 긴장이 팽팽한 국제 분쟁지역 중의 한 곳인 카슈미르.

해발 2000미터 고원에 위치
어디서든 3000미터 이상 고개
넘어야 비로소 갈 수 있는 곳

첫 개교 때 500가람 있었고
현장법사 방문 때도 100개
쿠샨제국 카니시카 대왕이
후원해 대규모 불교성전 편찬

그곳은 북쪽의 파미르와 동쪽의 히말라야, 서쪽의 피르판잘 산맥 사이에 걸쳐있는 지역으로, 지리학자도 힌두교 신화에서도 원래는 거대한 호수였다고 한다. 카슈미르라는 지명 역시 카샤파미라(kaśapa-mira), ‘카샤파(창조주 브라흐마의 거북 형상)의 호수’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다만 지리학자는 빙하시대 이후 지진으로 물이 빠져나갔다고 한 반면 신화에서는 비쉬누 신이 호수의 악룡을 물리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 예수무덤(요셉의 아들 Youza Asif)으로 전해지는 로자발 성지. 이곳 전설에 따르면 예수는 젊은 시절을 카슈미르에서 보냈으며, 부활 이후 다시 돌아와 스리나가르에 묻혔다고 한다. 제4결집을 주도한 협 존자는 카슈미르를 현성들이 모여드는 곳이라 하였는데, 예수도 그래서 이곳까지 찾았을까?

불교에서도 이 전설을 이용한다. ‘대당서역기’에 의하면 카슈미르는 원래 용지(龍池)였는데, 불타께서 웃디야나(烏仗那)국의 아파랄라 용왕을 조복(교화)시키고 허공을 날아 중인도로 돌아가다 이 나라 상공을 지날 때 아난다에게 말하였다. “내가 입멸한 후 마드얀티카(末田底迦, Madhyāntika) 아라한이 저 땅에 나라를 세워 인민들을 편안하게 하고 불법을 널리 유통시킬 것이다.” 그리고 여래가 반열반에 들고 50년이 지날 무렵 아난다의 마지막 제자 마드얀티카(제3조)가 카슈미르로 와 변화의 신통(神變)을 통해 용왕으로부터 호수였던 이 땅을 얻어 500 아라한을 위한 500여 가람을 세웠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 ‘아육왕경’ 등에서, 혹은 무기명이지만 ‘대비바사론’에서도 전해진다. 그러나 ‘선견율비바사’나 ‘마하밤사’와 같은 남전문헌에서는 아쇼카 왕이 제3결집 후 제국의 변경에 불법을 전파하기 위해 카슈미르에는 마드얀티카를, 스리랑카에는 마힌다를 파견한 것으로 전한다.

카슈미르는, 히말라야의 먼 설산과 자이언트 소나무 숲의 산록과, 마을을 감싸고 있는 미루나무 백양나무 등의 푸르름과, 마드얀티카 존자가 용왕과 그의 권속들을 위해 조금 남겨주었다는 에메랄드 빛깔의 호수가 어울려 정말이지 그림 같은 곳, 무굴제국 아크바르 황제는 이곳을 자신들의 제나두(이상향)로 여겨 좌우대칭의 화려한 정원을 조성하였다. 4대 황제 자항기르는 “지상에 낙원이 있다면 카슈미르가 바로 그곳”이라 하였다. 불타 역시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에서 “녹색(綠色)의 숲(樹林)이 빛나는 저곳 카슈미르는 사마타(止)와 비파샤나(觀)를 닦는데 제일가는 처소”라고 하였다.

▲ 이슬람 모스크인 자마 마스지드 인근 거리 풍경.

그러나 카슈미르는 해발 2000여 미터의 고원으로, 사방 어디서 오든 3000∼4000미터의 고개를 넘어야 한다. 어떻게 이런 곳에 불법이 미치게 되었을까? 그것도 간다라로, 아유타로, 나란다로, 파미르 고원 너머로 영향 미친 불교학의 고향이 될 수 있었던가?

불타 입멸 후 불교의 중심지는 누가 뭐래도 인도의 중국(Madhyamadeśa), 마우리야 왕조의 수도였던 파탈리푸트라(화씨성)였다. 아쇼카 왕 때 라자그라하(왕사성)에서 이곳으로 천도하였다. 이곳 계원사(鷄園寺)에 상좌비구가 거의 다 열반에 들었을 때 대천(大天, Mahādeva)이라는 이가 포살 날에 아라한의 성자성을 부정하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아라한일지라도] 유혹되는 바가 있고 무지하며/ 의혹이 있고 다른 이에 의해 깨달음에 들게 되며/ 도(道)는 [‘괴롭다’고 외치는] 소리에 의해 일어나니/ 이것이 바로 모든 부처의 참된 가르침이다.

그러자 이에 대한 시비분쟁이 일어났다. 그렇지만 대천파가 다수였고, 그의 말은 부처의 가르침이 아니라 사설(邪說)이라는 현성(賢聖)파는 소수였다. 분쟁을 방지하고자 왕은 별주(別住)를 명하였지만 현성파가 계원사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려 하였다. 진노한 왕이 그들을 갠지스 강에 빠트렸고, 그들은 신통을 일으켜 허공을 타고 서북쪽 카슈미르로 떠나갔다. 이에 왕은 사과하고 돌아오기를 청하였지만 거절하자 그곳에 파탈리푸트라에서와 같은 500의 승가람을 짓고 나라를 승중(僧衆)에 보시하였다. 이후 수많은 현성이 출현하여 불법을 전승하고 제조(制造)하여 이전보다 더욱 왕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스리나가르에서 60여km 떨어진 히말라야 산록에 위치한 나랑나그의 힌두교 사원터.

이는 이곳 카슈미르에서 편찬된 ‘대비바사론’(권99; 차회 참조)에서 전하고 있는 대중부와 상좌부의 근본분열 상으로, 불교의 본류가 파탈리푸트라로부터 이곳으로 옮겨왔다는 그들의 자부심이 반영된 전설이라 하겠다.

불교학의 고향, 설일체유부 비바사사(毘婆沙師)의 본향 카슈미르, 처음 개교할 무렵에는 500여 가람이 있었고, 현장법사가 방문할 당시에도 100여 곳의 가람이 있었다는 곳, 쿠샨제국의 카니시카 대왕의 후원 하에 대규모 불교성전의 편찬이 이루어졌던 곳, 10여 년 만에 그곳에 다시 왔다. 그 때는 라다크의 레에서 트럭과 버스를 바꿔 타며 삼일에 걸쳐 왔지만, 이번에는 파탈리푸트라의 현성들처럼 하늘을 날아왔다. 뉴델리에서 잠무를 거쳐 왔음에도 두 시간의 비행으로 도착할 수 있었다. 통상 뉴델리에서 잠무까지 밤기차로, 잠무에서 피르판잘 산맥을 넘어 스리나가르까지 버스로 10시간, 만 하루가 소요되는 여정이다.

잠무&카슈미르 주의 여름 주도(州都) 스리나가르는 막 비가 스쳐지나 간 듯 구름이 낮게 드리워 있었다. 짙은 구름을 뚫고 불쑥 내린 스리나가르는, 공항은 완전히 새로 지어진 듯 현대식 면모를 갖추고 있었지만, 시가는 10여 년 전보다 더 낡아보였다. 오전에 내린 비 때문인지 도로는 질퍽거렸고, 철시한 낡은 목조의 상가는 도로에서 튄 진흙으로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이 날은 마침 1931년 7월13일 카슈미르의 마하라자 하리 싱에 반발하여 일어난 무슬림 저항운동 기념일로 인해 상가가 철시되어 시가는 더욱 썰렁하고 궁색해 보였다.(이 날 모스크는 물론 시내 출입도 통제되었다) 게다가 시내를 관통하는 젤름 강은 홍수로 황토물이 출렁댔고 다리턱에 걸린 온갖 쓰레기가 섬을 이루어 시가의 황량함을 고조시켰다.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나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베단타 사상가 샹카라를 기리는 샹카라차르야 언덕(꼭대기에 작은 시바사원이 있다)을 끼고 시 외곽 달 호수 쪽으로 나가자 여기가 카슈미르라는 것이 실감났다. 녹색의 숲과 함께 멀리 히말라야 자락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구름을 걸친 산봉우리가 비친 달 호수의 에메랄드 물빛, 가지각색의 하우스보트와 그것들 사이를 들락거리는 시카라로 불리는 수상 보트들, 한가로움 그 자체였다.

10여 년 전, 레에서 스리나가르에 이르는 길, 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 없는 황량한 산악을 굽이돌다가 3500여 미터의 조지라 고개를 넘어 소나마르그에 이른 순간 눈 아래로 확 펼쳐진 녹색의 장원, 옆 승객에게 소리쳤다. 저기가 어디냐고? ‘카슈미르’라고 하였다. 저곳이 말로만 들은 그 카슈미르였다. 나는 그동안 카슈미르가, 불전에 나오는 계빈(罽賓)이나 가습미라(迦濕彌羅)가 라다크나 파키스탄 북부 길기트에서 본 것과 같은, 천 길 낭떠러지, 독룡이 우글거리는 깊은 인더스 강 골짝에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거친 바위의 산악지대로만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곳은 달력에 나올 법한,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알프스의 목가적 풍경, 바로 그러한 곳이었다.

▲ 시내 자마 마스지드 정문. 17세기에 지어진 이슬람 모스크. 수백 개의 히말라야 삼나무원목을 통째로 기둥으로 세웠다.

아무런 준비 없이 왔던 그 때, 700년도 넘게 인도의 불교학 중심지였던, 현장도 이곳에서 2년간 수학하였다던 카슈미르에서 불교의 흔적을 찾는다는 것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와 같았다. 카슈미르 제대논사(諸大論師)들이 거닐었을 산야를 거닐어본 것으로 만족해야 할 거나. 이슬람과 힌두 세계인 이곳 어디서 어떻게 불교의 자취를 만날 수 있을까? 혹 어떤 단서라도 찾을 요량으로 스리나가르 중심 박물관인 스리 프라탑 싱(SPS) 박물관에 갔었고, 어둡고 퀴퀴한 방 한쪽에 전시된 손바닥만 한 딱 한 점의 불상을 보았고, 큐레이터라 자처한 이로부터 그것이 파할감의 승원터에서 출토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지만 80km 떨어진 그곳은 전날 왕복 8시간 걸려 갔다 온 곳이었다. 그곳은 카슈미르의 대표적인 휴양명소였지만 인근 아마르나트 산의 동굴의 남근석(링감)이 얼음에 덮여 가장 빛나는 7월 보름날의 예배를 위해 인도각지에서 몰려든 힌두교 순례자(Amarnath Yatree)들로 인해 경치는 고사하고 인산인해에 치여 고생만 한 곳이었다. 그래서 소개받은 또 다른 곳이 파리하스포라의 불교 승원터였다. 그리고 다음날 택시를 대절하여 그곳으로 날 안내해주기로 약속하였다. 그날 저녁 여관(젤룸 강변의 하우스보트)으로 돌아와 박물관 근처 투어리스트 센터에서 얻은 스리나가르 관광지도를 살펴보다 깨알만한 글씨로 적힌 단 한 줄 ‘하르완의 승원, 불교성전의 제4차 결집지(the centre of he Fourth Buddhist Council)’, 정말이지 눈이라도 깜박였더라면 결코 찾지 못하였을 대목이 눈에 띄었다. 그 다음부터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기억이 없다.

파리하스포라 가는 길은 멀었고, 몇 번이고 검문을 받았고, 승원 터는 SSM공과대학을 돌아가니 있었고, 들어가는 입구에 아몬드 과수원이 있었고, 카메라를 갖고 오지 않은 것을 무척이나 후회하였고, 한 낮임에도 너무나 고요하여 가슴이 막힐 지경이었다는 정도의 기억이 고작이다. 하르완의 승원 터 또한 찾는데 너무 고생하여 박물관 큐레이터라는 안내인 신분이 의심스러웠다거나, 저녁어둠이 내릴 즈음 도착한 그곳은 그냥 언덕배기 정도로 500명의 아라한들이 모여 회의하기에는 턱없이 협소하다고 생각한 정도였다.

그 날 저녁 여관주인에게 낮에 갔던 곳을 말하니, 파리하스포라에 가는 시내버스가 있단다. 며칠 후 자기 아들이 쉬니, 그 날 함께 가란다. 그러나 다음 날 파할감에서 기어코 폭탄테러가 일어나 100여 명에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힌두교 순례자들은 잠무로 소개되었다. 거리 곳곳에 잠무 행 버스가 줄 서 있었다. 예약도 필요 없었다. 그들과 동승하여 잠무로 내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하르완, 제4 결집지’, ‘파리하스포라의 SSM공과대학 뒤편의 불교 승원터’, 수첩에도 기억 속에도 꼭꼭 눌러 메모하고 내년에 다시 올 것을 기약하고서. 그 내년이 열네 번 지나고서 마침내 오늘 왔다. 물론 카메라도 갖고서.

이번 카슈미르 답사여행에서 첫 번째로 가 보아야 할 곳은 두 말할 것도 없이 하르완과 파리하스포라, 바로 그곳이다.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 ohmin@.gnu.kr

[1327호 / 2016년 1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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