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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꽃 한 송이가 보여주는 진리

기자명 김용규

발아한 생명에는 생장수장 고통 고스란히 담겨

나는 숲을 스승으로 삼고 그 속 생명들이 걷는 길을 참구(參究)하여 사람의 길을 살피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숲에도 법(法)이 있다. 조주(趙州) 스님 말씀하신 ‘뜰 앞에 잣나무(庭前柏樹子)’를 떠올려보자. 스님은 잣나무 한 그루에도 법이 깃들어 있음을 말씀하셨는데 하물며 무수한 생명들이 깃들고 뒤엉켜 생장수장(生長收藏)의 순환을 반복하는 숲에는 얼마나 큰 법이 있겠는가? 알다시피 법(法)이라는 글자에는 물(水)이 흘러가는(去) 양상 속에 담긴 깊고 자연스러운 질서를 살핀 뜻이 담겨 있다. 숲이 펼쳐내는 생명들의 삶에도 거스를 수 없는 질서가 작용하고 있다. 내가 숲을 스승으로 삼고 있다는 뜻은 숲에서 펼쳐지는 생명들의 양상 속에서 삶의 지혜를 배운다는 뜻이다. 오늘은 꽃 한 송이가 어떻게 피어나는지, 봄꽃 한 송이에 담긴 이야기 일부를 나누고 싶다.

봄에 온전히 깃들 수 있어야
주변의 꽃도 쳐다볼 수 있어
지난여름부터 준비한 나무만
마침내 봄날 제 꽃을 피워내

요즘 숲은 한겨울의 추위를 건너고 있다. 걱정스러울 만큼 따스했던 12월의 기온은 지난 소한(小寒)을 기점으로 단번에 지워지고 겨울날씨의 매서움이 살아난 탓이다. 갑자기 추워지자 내 간사한 마음은 이제 봄기운을 그리워하는 모양이다. 아직 남쪽에서조차 꽃소식이 없거늘 자주 마당과 숲을 서성이면서 봄꽃 나무들을 들여다보게 된다. 나의 오두막 마당에는 통상 산수유와 매화, 목련 따위가 가장 먼저 제 꽃을 터트린다. 내가 기대어 살고 있는 이곳 ‘여우숲’, 그 숲으로 이어지는 길 가장자리에서는 통상 노란색 꽃다지 꽃이 잔설을 녹이며 피어난다. 숲으로 걸음을 옮겨보면 그 바닥에서는 현호색 꽃이 가장 이르고, 조금 더 높은 자리에서는 생강나무 노란꽃이 소리없이 터지며 봄소식을 알려온다. 허나 아직은 그들 중 누구도 꽃 소식을 전하지 않고 있다.

그대가 사시는 뜰 앞에는, 혹은 늘 오가는 길가에서 어떤 나무가 제일 먼저 꽃을 피우는가? 당장 떠오르지 않는다면 지금부터 찬찬히 살필 일이다. 사는 동안 몇 수십 번의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았을 텐데 주변에서 피고 지는 다른 생명에게 눈길을 주고 마음을 나누지 않았다면 그 하루하루가 얼마나 삭막한 시간이었는지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강연에서 청중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져보면 도시에 사는 사람 대다수는 멀뚱히 바라보며 고민하고, 그 중 몇몇이 개나리나 목련이라고 답한다. 그렇게 머물고 오가는 주변에서 봄날 가장 먼저 피우는 꽃을 특정해 지목할 수 있는 사람들은 비교적 ‘오늘과 순간’에 철저했던 사람들이라고 나는 짐작한다. 봄을 맞을 때 봄에 온전히 깃들 수 있는 사람만이 주변의 꽃을 본다. 전투를 치루는 것처럼 하루를 사는 사람들은 대체로 그것을 간과한다. 그들은 걷고 있으면서도 걷는 것을 모르기 쉽고, 숨 쉬고 있으면서도 숨 쉬고 있음을 알아채기 어렵다. 하물며 노여움이 찾아올 때 노여움에 사로잡히려는 자신을 알아채는 것이 가능할까?

그렇게 봄을 알아채며 그것을 맞이해 본 사람들에게 나는 다시 물어본다. “봄에 개나리나 목련이 피어나면 어떠세요? 우선 반가우시죠? 또 움츠리게 했던 겨울이 물러나고 약동하는 봄기운이 참 좋구나, 이렇게 느끼기도 하시죠? 그런데 그 반가운 개나리며 진달래며 목련은 언제쯤 그 꽃망울을 만들었을까요?”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잠시 생각한다. 그리고 대다수가 ‘겨울’이라고 답한다. 그대는 어떻게 알고 있는가? 그대의 답도 ‘겨울’이라면 역시 틀린 답이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는 6월이 가기 전에 그 꽃망울을 만든다. 봄날 피어나는 목련 한 송이는 이미 지난해 여름 입구에서 제 꽃망울을 만드는 것이다. 목련꽃의 살은 여름날의 뙤약볕과 폭우와 강풍을 뚫고 차오른다. 그렇게 여름을 건너면 상강(霜降) 찬 서리의 시간을 맞아야 한다. 그리고 지금 닥쳐 있는 이 엄혹한 북풍과 한설 속에서 그 꽃망울을 지키고 간수해야 마침내 이른 봄날 제 꽃을 피우는 것이다. 피워낸 꽃이 찬란한 빛이라면 그것을 위해 감당해야 하는 긴 그림자의 시간이 꽃에게 있는 것이다. 피워낸 꽃을 이루어낸 빛으로 보는 관점 역시 절반만 본 것이다. 열매로 바뀌지 못하는 꽃은 허사니까. 열매를 온전한 빛이라 여긴다면 역시 절반의 진실에 머문 것이다. 씨앗으로 성숙하지 못하는 열매 역시 허사니까. 씨앗은 발아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 그림자요, 발아한 생명에게는 생장수장(生長收藏)에 담긴 고(苦)가 고스란하다. 그러므로 봄 꽃 한 송이 오래 보는 이는 그 안에서 제행무상 일체개고(諸行無常 一切皆苦)의 법을 보게 될 것이다. 이제 입춘(立春)이 멀지 않았다.

김용규 숲철학자 happyforest@empas.com
 

 [1328호 / 2016년 1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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